寒暄古宅과 銀杏나무
달성군 한훤고택과 도동서원은 현풍·구지면을 아우르며 우뚝 솟은 대니산 자락에 있다.
현풍 소재지에서 구지방향으로 10분쯤 가다보면 오른편에 용흥지가 있다.
용흥지를 지나 직진하면 현풍곽씨 세거지 마을이 나오고, 용흥지를 따라 오른쪽으로 가면 못 끝자락에 ‘소학세향(小學世鄕)’이라고 새겨진 거대한 표지석이 보인다.
‘내고향 지리(池里·못골)’란 표지석도 보인다. 연못 끝자락에 부채처럼 펼쳐진 동네가 한훤당 종가가 있는 못골 마을이다.
서흥김씨 세거지 못골마을에 김굉필 선생 종가
‘한훤고택’ 자리해…
小學世家·光霽軒 등 편액에서 인품 짐작
다람재에서 내려 본 도동서원은 ‘산수화’
한강 정구 선생이 심은 은행나무 울창…
선조 하사한 편액 등 유물들도 볼 만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지 관심
◆ 한훤고택
한훤당(寒暄堂)은 김굉필(金宏弼·1454∼1504) 선생의 아호이다.
선생의 관향이 서흥(瑞興)이기에 못골 마을은 서흥김씨 세거지로 알려져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수령은 무려 400년.
그 옆에 연자방아 맷돌과 오래된 우물도 있다.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훤고택(寒暄古宅)’이라 새겨진 안내석이 놓여 있다.
안내석을 따라 외삼문을 들어가니 종택 안집이 보이고, 왼편으로 사랑채인 듯하여 들어서니 네모난 연못이 있고, 오래된 반송이 있는 기와집이 있다.
한훤고택이라 편액한 일자형 건물이다.
축대는 오래 되었으나, 건축물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은 모습이다.
6·25전쟁 당시 폭격 때문에 불타 없어진 탓이다. 그나마 받침대를 받친 고송이 고가의 전통을 짐작하게 한다.
주인을 못 뵌 채 바깥에서 고택의 대청문만 살짝 열었다.
마루 중앙에 ‘소학세가’란 큰 편액과, ‘광제헌(光霽軒)’이란 작은 편액이 걸려 있다.
소학세가란 선생의 소학(小學) 실천 정신을 기려 붙인 이름이다.
광제헌은 ‘광풍제월(光風霽月·시원한 바람과 맑은 달이란 뜻으로 맘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형용한 말)’의 줄임말이다.
본채를 중심으로 양편에 기와집 두 채와 뒤편 언덕 높은 곳에 가묘(家廟)가 있다.
◆ 김굉필은 누구
도동서원은 선생의 도학을 계승하기 위하여 1605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한강 정구 선생이 주도하여 세워졌다.
1607년 선조로부터 ‘도동(道東)’이란 현판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1607년 정구 선생이 추가 배향된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도동서원 이전에 선생을 모신 서원은 쌍계서원(雙溪書院)이다. 쌍계서원은 선생이 돌아가신 지 64년 후인 1568년에 비슬산의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지는 달성군 유가면 쌍계리 초곡천 산기슭에 세운 서원이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불타고 말았다. 그 후 선조 38년(1605)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 하였다. 2년후 나라에서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도동서원이란 편액을 하사한다. 이로 인해 마을 이름도 도동리로 불린다.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요 학자다. 본관은 서흥, 자는 대유(大猷).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김유(金紐), 어머니는 중추부사 한승순의 따님이다. 그의 선조는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하였는데, 증조부인 김사곤이 수령을 지내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게 되면서 이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선생은 어려서는 성품이 매우 호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함에 따라 분발하여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주로 영남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처가), 성주의 가천(伽川·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선비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운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짐에 따라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됨에 따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다. 성균관유생들의 문묘종사 건의가 계속되어 1577년에는 시호가 내려졌고, 1610년에는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하여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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