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遺跡 /古懸板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4] 울진 ‘대풍헌’

초암 정만순 2018. 2. 25. 13:11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4]

울진 ‘대풍헌’



“뱃길의 순풍을 기다리며…”울릉도 순찰 나선 수토사들의 숙소


조선시대 울릉도를 조사하고 관리하던 수토사들이 울릉도로 가기 위해 순풍을 기다리던 곳인 대풍헌.
대풍헌에 걸린 현판 ‘대풍헌’.










울릉도와 독도를 조사하고 관리하기 위해 그곳을 향해 배를 타고 떠나야 했던 조선시대 관리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물던 장소가 울진에 있다.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에 있는 대풍헌(待風軒)이다.

작은 포구인 구산리 마을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대풍헌은 정면 4칸의 일자형 팔작 건물이다. 이 대풍헌은 1851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처음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2010년에 해체·복원된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모여 마을 일을 논의하고 행사를 열던 장소로 활용된 이 작은 건물이 조선시대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순찰하며 해적이나 왜적을 수색해 토벌하던 수토사(搜討使)들이 바람을 기다리던 숙소 겸 관청이었던 것이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이 작은 한옥이 이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2005년 대풍헌에서 조선시대 문서 ‘수토절목(搜討節目)’과 ‘완문(完文)’이 발견되면서 그 사실이 드러났다.

완문은 조선시대 관청에서 백성에게 어떤 사실을 알리거나 특전을 부여할 때 그 내용을 적어 발급하는 문서다.


2∼3년에 한 번씩 울릉도 시찰
80명 규모 배 4척에 나눠 출항

체류비용은 구산마을서 맡아
수령들도 도와 주민 부담 줄여


◆ 울릉도를 관리하는 수토사들이 순풍을 기다리던 ‘대풍헌’

수토사 일행의 경비 조달에 관한 내용이 기록돼 있는 대풍헌 ‘완문’.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울릉도를 조사하고 수토하기 위해 관리를 파견했는데, 이를 수토사 또는 수토관(搜討官)이라 했다. 수토사로는 월송포 만호(萬戶)와 삼척포 진영(鎭營)의 수장인 영장(營將)이 번갈아 파견됐다. 18세기에는 2년에 한 번씩 수토사가 파견되기도 했으나, 19세기에는 대풍헌 수토절목에 따르면 3년에 한 번씩 파견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수토사와 그 일행은 울릉도로 가기 위해 이 대풍헌에서 순항이 가능한, 순풍이 부는 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대풍헌의 ‘대풍’은 이처럼 ‘순풍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을 ‘대풍소(待風所)’ 또는 ‘수토소(搜討所)’라고 지칭한 기록도 있다. ‘구산동사(邱山洞舍) 중수기’에 의하면 1851년에 중수하고 ‘대풍헌’이라는 현판을 단 것으로 되어있다. 현재 전하고 있는 ‘대풍헌’ 현판도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1883년에 작성된 ‘수토절목’은 ‘삼척 진영 사또와 월송 만호가 3년에 한 번씩 울릉도에 공무로 방문할 때 구산진(구산리)에서 출발하고 돌아오는데, 바람의 형편에 따라 대풍헌에서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기도 하여 월송 만호에서 구산진 등 9개 촌락에 돈을 풀어 거기서 발생한 이식(利殖)으로 그 기간의 경비를 조달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71년의 ‘완문’은 삼척 진영 사또와 월송 만호의 울릉도 수토 공무를 위해 필요한 비용 마련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울릉도와 독도는 울진군의 관할에 있었고, 수토사들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울릉도로 향하던 출발지가 구산리였음을 알 수 있다.


◆ 수토사 일행의 규모는?

2~3년에 한 번씩 울릉도를 시찰하던 수토사 일행의 인원수 등은 어느 정도였을까? 1794년 실록 내용에 따르면, 월송 만호 한창국이 수토사가 되어 울릉도로 출발할 때 배가 4척이고, 배에 탔던 일행은 총 80명이라고 했다. 상당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일행으로 원역(員役), 격군(格軍), 왜학인(倭學人), 채삼군(採蔘軍) 등이 포함돼 있었다. 다양한 인력으로 구성된 그들 일행이 울릉도에 머문 기간은 10일 정도였다.

10일 동안 그들은 산과 계곡, 폭포, 논밭 등 전반적인 지형의 조사와 더불어 나무, 풀, 물고기, 곤충, 짐승 등 생태조사도 병행했다. 인가에 대한 조사, 인삼 등 진상품 채취도 이뤄졌다.

울릉도에서 10일 정도 체류하던 수토사 일행은 출발을 위해 대풍헌에서 얼마나 머물렀을까? 대풍헌 수토절목에 따르면, 수토사 일행은 보통 8~9일 머물렀다. 기상악화로 순풍이 불지 않을 때는 10일 이상 체류했다.

대풍헌에서 머무는 동안 그들이 소비한 비용은 이틀 동안 대략 100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8일 이상 머물렀으니 그 체류비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던 모양이다.


◆ 수토사 일행 체류비 조달

이 체류비는 어떻게 마련되었을까? 평해군 수령 심능무와 이윤흡의 ‘영세불망지판(永世不忘之板)’에 따르면, 체류비는 울진의 아홉 마을 사람들이 부담해 마련하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대풍헌이 있는 구산마을이 단독으로 부담하게 되었다. 구산마을 사람들의 부담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의 불만과 청원이 끊이지 않자 1866년 평해군 수령 심능무가 그 형편을 알고는, 수령의 봉급 70냥을 보태 마을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다음 수령인 이윤흡은 부임한 후 1868년, 관아 비용 마련에 사용되던 토지 15결을 내어줘 그 생산량을 수토사 체류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토지에서 생산되는 것이 대략 30냥이었다고 하니, 3년에 90냥 정도 생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덕을 기리기 위해 1870년 영세불망지판을 만들어 대풍헌에 걸게 되었다.

또한 수토절목을 보면, 포구에 정박하는 상선에 세금을 부과해 거두고, 그 세금을 구산동에서 관리해 수토 비용으로 사용했다. 두 수령의 보조금과 경작지 생산물, 상선세를 토대로 수토사 체류비를 마련했던 것이다.

추가로 소요되는 비용은 구산동에서 마련한 120냥을 9개 마을에 나누어 이식하게 했다. 원금은 보존하면서 그 이자를 평해군 관아로 보내 관리하게 한 것이다. 대풍헌 완문은 이와 같은 추가 비용에 대한 관아와 마을 간의 약속을 기록한 것이다. 1871년 평해군수가 이 완문을 발급했다.

아래는 ‘완문’의 내용이다.

‘이 완문은 영구히 준수할 일이다. 방금 구산동 백성들이 올린 등장(等狀)을 보니 울릉도를 수토할 때 진영의 사또와 월송 만호의 행차에 드는 잡비를 봉행하는 등에 관한 절목에 대한 내용으로, 전에는 해안가 9개 동에서 힘을 합쳐 수호(隨護)했지만, 근세에 구산동(邱山洞)에서 유독 이 일을 전담함으로써 피해가 편중되고 단독으로 고생하는 데도 하나도 해결되는 게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동에서 가까스로 돈 120냥을 모아, 수토할 때 만에 하나 첨가되거나 보충해야 할 자원이 필요할 경우 각 동에 나눠줘 원금은 남겨두고 이자만 취하게 하되 매년 2월에 추봉(推捧)한다 했다.

내가 부임한 이후 여러 군영의 폐단을 살펴보니, 너의 동(구산동)이 수토시에 지탱하기 어렵다는 정황을 이미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제 이 돈 120냥을 각 동에 포식(布殖)하겠지만,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허비하지 않는 은혜를 갖춰야 하므로 향청(鄕廳)과 작청(作廳)에서 이 돈을 정확하게 각 동에 분배하고, 1냥당 3푼 변리(邊利)로 매년 2월에 추봉해 수토시 추가되는 비용으로 쓰라는 뜻으로 완문을 작성해 발급하는 것이니, 이를 준수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신미 7월 일.’

여기에다 구산동을 비롯해 인근 마을인 표산동, 봉수동, 어현동, 직고동, 구암동, 포차동, 야음동 등 원금을 나누어 관리하던 아홉 마을의 이름과 함께 마을별로 할당된 금액도 적고 있다. 구산동이 30냥으로 가장 많다.

울릉도 수토사들에게 소요되는 경비 중 추가비용을 어떻게 조달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 2012년 5월 경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현판들

대풍헌에 걸려 있던 현판 12점은 2012년 5월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41호로 일괄 지정됐다. 대풍헌에 걸려 있던 현판 가운데 1910년 이전에 만들어진 12점이다.

그 목록은 ‘기성구산동사(箕城龜山洞舍)’ 1점(1851년), ‘대풍헌(待風軒)’ 1점(1851년), ‘구산동사중수기(邱山洞舍重修記)’ 1점(1851년), ‘영세불망지판(永世不忘之板)’ 6점(1870~1878)‘구산동사기(邱山洞舍記)’ 1점(1888년), ‘동계완문(洞楔完文)’ 1점(1904), ‘중수기(重修記)’ 1점(1906)이다.

이 유물들은 조선이 19세기에도 울릉도·독도를 실질적으로 지배·관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울릉도·독도의 수토와 관련된 사료를 찾기 어려운 현 상황에서 이 현판들이 갖는 자료적인 가치와 독도 문제의 중요성 등을 감안해 유형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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