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巨樹 保護樹 記念物/慶山 老巨樹

慶山 龍城 느티나무 / 회나무 (보호수)

초암 정만순 2018. 1. 20. 09:37





慶山 龍城 느티나무 / 회나무




 

촬영일 : 2018. 1. 18 (맑음)

촬영자 : 솔바람(정만순)

소재지도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자라는데 흔히 부락 어귀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정자나무이기도 하다.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나무 모양이 둥글고 수형이 웅장하고 아름답게 보이며, 흔히 굵은 가지가 줄기의 밑 부분에서 부터 갈라지고 키가 약 30m까지 자란다.

오래된 나무의 수피(樹皮)는 진한 회색으로 비늘처럼 떨어지며 피목(皮目)이 옆으로 길게 만들어진다.

어린가지에는 털이 나기도 한다.

잎은 어긋나고 잎 끝은 뾰족하지만 잎 밑은 둥글거나 심장처럼 약간 들어가 있으며 잎맥을 경계로 양쪽이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가을에 단풍은 황금색, 붉은색, 주황색, 구리빛으로 단풍이 든다. 단풍나무보다 더 단풍이 아름답다.


느티나무는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목재의 쓰임새가 넓고 그 재질이 띄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인 인식에 있어서는 느릅나무 회화나무 등에 밀려난 뜻한 느낌이 있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유는 우리의 선조들이 회화나무는 괴목(槐木)이라 해서 귀한나무로 여겼고 기록에 많이 나타나 있지만 느티나무는 그 명칭 거수(欅樹)가 옛 책에는 잘 나타나지 않고 있다. 회화나무는 괴위(槐位)라든가 괴정(槐鼎)이라 해서 높은 벼슬자리를 상징하는 중국 주대(周代)부터의 고사에서 사람들의 아낌을 받아 왔고 심겨 졌지만 느티나무는 그렇지 못했다.

선만식물자휘(鮮滿植物字彙)에 보면 거수(欅樹 또는 柜樹)마저도 팽나무 비슷한 것으로 설명하고 그 열매는 성숙 했을때 달고 생으로 먹을 만하다. 따라서 거수라 하면 팽나무를 뜻하는 것으로 된다.

괴(槐)를 회(櫰, 괴) 쓰기도 하나 이 두글자의 중국 발음은 서로 같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槐를 일반적으로 쓰지 櫰는 그다지 쓰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우리나라 느티나무를 광엽거(光葉欅), 또는 대만거(臺灣欅)라고 한다. 이것은 잎에 녹색의 윤기가 있어서 이러한 명칭을 얻었고 대만거라고 했다 해서 대만에서 자라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왜 그런지 우리나라의 고서나 시와 문장에 느티나무는 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느릅나무, 회화나무, 팽나무 등과는 조금 다르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는 풀이하기 쉽지는 않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느티나무 한자 명칭으로 여러 가지를 들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우리나라와 중국과 공통이라고 할 수 있는 느티나무 거(欅)이다. 회화나무를 뜻하는 괴목(槐木)을 느티나무의 한자명으로 들고 있는 것은 지난날 나무명칭에 대한 한자명의 부정확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느티나무를 괴목으로 말했고 느티나무로 만든 밥상을 괴목상이라 해서 귀 하게 여겼다. 왜 괴목이란 말로 느티나무를 뜻하게 되었는지 알수 있다. 또 느티나무 명칭으로 느릅나무 유(楡)자도 들고 있는데, 옛적에는 느티나무, 느릅나무, 회화나무가 혼동된 일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괴목(貴木)이란 명칭도 있는데 귀자는 가마채나무 귀로 읽는다고 옥편에 나와 있다.

흔히 느티나무로 가마채를 만들었다면 또 느티나무가 귀(貴)한 나무(木)라고 친다면 이 명칭은 받아 들일 수 있다. 또 느티나무를 규목(樛木)으로 말하는데 규자는 나뭇가지가 아래로 처지는(木枝下曲) 모습을 표현 하는 글자다. 느티나무는 오래되면 곁가지가 멀리 퍼지고 그 곁가지에서 다시 작은 가지들이 많이 나서 아래로 느러지게 된다. 그래서 느티나무는 정자나무라는 별명을 얻을 많큼 그 아래에 좋은 그늘을 만드는데 이것은 긴 곁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데 이유가 있다. 이러한 느티나무의 성상을 생각 한다면 규목(樛木)이란 명칭은 좋은 착상에서 얻어진 것으로 생각 된다. 느티나무를 거류(欅柳)로 말하는 것은 곁가지의 처지는 성상에 관련된 명칭으로 생각 해 본다.

느티나무는 장수 하는 나무다. 은행나무, 회화나무, 향나무, 팽나무, 왕버들, 비자나무, 이팝나무, 가시나무, 녹나무, 후박나무, 등과 같이 느티나무는 수하는 개체가 많다. 오래 사는 나무는 대체로 몸집이 크다. 오래 살자면 많은 에너지의 축적이 필요하고 그것을 담아 두자면 넉넉한 몸통을 가져야 한다 주변의 다른나무와 경쟁에 이기려면 우선 큰 나무로 되어 넓은 생활공간을 점유할 필요가 있다.

느티나무는 집으로 말하면 대궐 같은 공간을 자랑한다. 그러면서도 깨끗하고 품격이 있는 나무다. 스스로 화려한 곳을 찾지 않으나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영광스럽게 해준다. 나무아래에서는 민주주의 광장으로 되어서 지방자치단체의 열매를 맺게 해주고 때로는 야외 교육장으로되어 글방 훈장의 목소리와 휴식공간으로도 정신수련의 도장으로도 쓰이고 나무 그늘에서 정치, 집안일, 시집살이, 사랑이야기, 호랑이 잡는 이야기, 신선의 이야기, 담배농사이야기 등으로 아무런 제한이 없다. 그래서 정자나무로 이용하면서 화려하고 당당한 건물보다도 값이 있는 기능이 있는 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마을에 대게 느티나무 한 그루 쯤이 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값진 생물학적 문화 공간을 가지고 살아 왔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느티나무는 잎을 떨어 뜨려 길바닥에 햇볕을 내릴 것이다. 원초적으로 마련된 자연의 순리 또는 질서라 하지만 인간을 위해 마련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우리가 서로 도와 살아가는 것을 보면 느티나무를 다시 보게 된다.

경주에 있는 계림(鷄林)은 느티나무, 회화나무, 팽나무, 왕버들 등 노거목들이 모여서 만들고 있는 종교림(宗敎林)의 성격을 가진 숲이다. 계림은 너무나도 이름난 숲이다. 삼국사기에 탈해왕 9년 (서기65년) 3월 왕이 밤중에 금성(金城) 서쪽에 있는 시림(始林)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호공(瓠公)을 보내어 알아 본적이 있다. 보아 하니 나뭇가지에 황금으로 된 상자가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 흰색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 하자 왕은 사람을 시켜 그것을 가져와 열어 보았다. 그 안에 어린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그 용모가 기이하고 출증 하였다. 그래서 왕은 기뻐하면서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아이가 아닌가 하고 양육 하였더니 총명 하였다. 그래서 이름을 알지(閼智)로 하고 금괴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였다. 그리고 시림이란 숲의 명칭을 계림으로 고쳤다. 그리고 계림은 나라의 이름으로 삼았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 삼국사기에 ‘김알지의 탄생은 전설적 요소를 담고 있으나 세상사람 들은 이것을 전하여 사실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였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있듯이 느티나무가 그의 격에 맞는 나무로 팽나무, 회화나무, 시무나무, 왕버들을 친구로 해서 계림의 주인공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그의 품위에 어울린다. 위대한 인물은 위대한 숲에서 태어난다는 역사는 다른 곳에서도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 서울의 느티나무에서 창덕궁과 창경궁 경내에는 큰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그밖에도 서울시내에는 곳곳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남산에 노거목 중 느티나무가 최고령으로 200년생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이보다 남산에는 주위에 많은 느티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옛날 서울 청계천 제방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던 모양이다. 도읍지로서의 서울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해서 내사산(內四山)안의 면적을 사방 10리의 규모로 표현 하였다. 북악산(北岳山, 白岳山)과 인왕산(仁王山) 그리고 남산의 물이 모여 청계천(또는 開川)이 되고 그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러 마침내 한강과 합류하여 그 다음부터는 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들어간다. 그런데 청계천은 종종 홍수로 범람하여 주거지를 침범하고 제방을 손실 시키고 해서 당시 서울 시민의 주거지 안정성이 극히 취약 하였다고 한다. 하수가 범람하여 농경지, 가축이 죽게 되고 하수에서 나오는 악취가 진동하여 위생 환경도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시내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을 동원해서 방축을 쌓고 나무를 심게 하였다. 태종 1년(서기1411년)에는 개천도감(開川都監)이란 관직을 마련하여 청계천의 기틀을 튼튼이 하고자 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전라, 경상, 충청 3도의 군인과 민간인 2,035명(그중 승려군 500명)을 동원해서 돌 쌓기와 돌다리 놓기 등을 하였다고 한다. 세종 4년(서기1422년)에는 43만명을 동원해서 도성을 수축하고 청계천 개수 작업을 끝냈다. 성문도감(城門都監)을 설치 한 것도 이해이다. 그 뒤 청계천제방에 버드나무류를 식재해서 청계천 수풀이 조성 되었다. 이처럼 청계천 제방의 수림조성은 조선조가 나라의 기틀을 완성 하고자 하는 기간에 있어서 실시된 본보기로 생각 할 수 있다.

세계역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최초의 측우기가 세종 24년(서기1441년)에 창안된 것도 이러한 수재와 연관을 가졌을 것이다. 서울 도읍지에 있는 나무를 철저히 보호하고자 처음에는 감역관(監役官)을 두었으나 뒤에 이것을 승격시켜 사산참관(四山參軍)으로 하여 기능수행에 만전을 기하도록 노력 했다. 이곳에서는 수해방비를 위한 호안림(護岸林)이 조성된 것이 특이 할만하다. 이때 버드나무류가 꺽꽂이로 많이 조성 되었을 것이다. 구한말(1910년경)에 청계천 제방에는 느티나무, 소나무, 능수버들, 회화나무 등의 노거목이 많았다고 한다. 느티나무는 서울의 녹지환경을 담당하는 주 수종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청계천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그 주위에 가로수는 이팝나무로 잘 정리 되어져 있다.

다음은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도계리에 천연기념물 제95호인 긴잎느티나무가 있다.

서있는 장소는 도계여자중학교 운동장인데 학교는 지금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나무수령은 1000년으로 잡고 있으나 삼척군 지역에서는 2000년 정도로 높게 잡혀지고 있다. 이 나무의 높이는 20m, 가슴둘레는 70cm나 되는 거목이다. 도계읍의 서당나무로 주민을 지켜주는 유래로 전해 왔다.

긴잎느티나무는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잎이 일반느티나무보다 잎이 길어 긴잎느티나무로 이름을 지었다. 도계의 긴잎느티나무는 무언가 바람을 기원하면 성취시켜준다는 말이 있어서 그것이 습속의 하나로 되기도 했다. 특히 고려 말에는 많은 선비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했기에 이 나무는 학문하는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고 도 했다. 그래서 입학시험의 계절이 되면 많은 학부모들이 이 나무를 찿아 자녀의 합격을 기원 한다. 이 나무가 학교 운동장에 서 있어 서당나무로 다른 곳의 나무로 바꾸려고 한 적이 있다. 그때 이 나무가 진노를 하여 천둥이 치고 번개가 내려 변경 계획이 취소 되었다는 말이 있다. 나무의 신은 학생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이 불편을 느끼지 않은 모양이다. 또 도계 주변에는 이 나무를 대신할 나무가 없다.

신이나 사람이나 오랫동안 나무나 정이 들어서 옮기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도계의 느티나무는 너무나도 웅장한 맛을 풍기고 있어서 그곳을 쉽게 떠나고 쉽지 않다. 나무가 커서 사진에 담기도 어려워 멀리서 나무에 수형을 넣을수 가 있다.

이웃나라인 일본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처럼 고향의 나무로서 곳곳에 느티나무가 식재 되었다고 한다.

식재의 목적은 그 나무의 모양의 아름다움과 바람막이 기능에도 있었지만 목재의 용도에도 큰 비중을 두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느티나무의 목재 색깔로서 두 가지로 나무고 있는데 첫째는 붉은느티나무라고 해서 비싼 것이고 다른 하나는 푸른느티나무라 해서 질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 가격의 차이가 컷으나 지금은 가공기술, 건조기술이 발달되고 느티나무재의 자원이 줄어들면서 가격차는 좁혀 지고 있다.

중국에 있어서도 특히 심재가 선홍색인 것을 혈거(血欅)라 해서 그 목재를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일본 동부의 느티나무는 줄기가 비교적 곧고 서부의 느티나무는 밑가지높이가 낮고 모양새가 좋지 못하다. 그들의 경험으로서 단풍색깔은 유전적으로 보이는 개체변이 일 것이라고 하고 있다. 목재생산을 위해서는 줄기가 곧고 밑가지높이가 길며 자람이 왕성하고 심재가 붉은 나무를 선별해서 개량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는 것이다.

느티나무는 가지의 분기각도(分岐角度)에 있어서 빗자루모양 또는 수형에 있어서 조경적 가치가 평가될 만하다. 빗자루형 느티나무는 좁은 가로수로 알맞다. 잔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느티나무는 더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수형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나무들이 벌써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이용되고 있다.

줄기에 혹이 발달하면 그것은 목재의 질이 떨어진다고 한다. 나무 높이는 보통 20~25m, 가슴높이 지름은 60~70cm 이지만 큰 것은 나무높이가50m, 가슴지름 3m에 이르는 것이 기록 되고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 우령 마을 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 382호로 지정 되어 있다. 이곳 사람들은 느티나무 세그루에 뜻을 주어 이곳을 삼귀정(三槐亭)으로 부르고 있다. 나무이름은 상괴(上槐), 하귀(下槐)로 말하고 있었는데 또 하나의 큰 느티나무를 인괴(隣槐 이웃느티)로 부르기도 하고 상괴와 줄기가 접촉하다시피해서 자라고 있는 작은 느티나무를 소괴(小槐)로 부르기도 한다. 상괴와 하괴는 약 60m 북쪽의 지대가 높은 곳에 있고, 또 상괴와 인괴는 130m거리로 떨어져 있다. 인괴는 북쪽에 하괴는 남쪽에 있다. 하괴에 비해 건강하게 자라는 편이다.

이곳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느티나무를 괴(槐)로 나타내고 있는 데에 주목이 간다. 과거부터 우리는 느티나무를 흔히 괴목(槐木)이라 말해 왔다. 그러나 괴는 회화나무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고 이처럼 받아들여 왔지만 때로는 느티나무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그것을 이곳 삼귀정의 이름에서 인식 할 수 있다.

상괴와 하괴는 수령이 800~900년으로 추정 되고 있고 상괴목 옆에 있는 가슴둘레 40㎝ 정도의 작은 느티나무로 구성되어 있다. 상괴목은 나무높이가 25m와 19m이고, 지름은 270cm, 280cm로 측정 되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마을이 생긴 이래로 음력 정월 대보름날 자정에 성황제를 지낸다고 한다. 이 나무 밑동에는 마을에서 쉼터로 활용하기 위하여 5단의 시멘트 구조물을 설치해 놓았다. 오가리의 행정 구역은 본래 연풍군 일의면의 면내 지역에 속했으나 1018년(고려 현종 9) 장연면이 신설되면서 그 중심지가 된 지역이다. 오가리라는 이름은 이 지방의 산과 물과 땅이 좋고 곡식이 잘 되며, 인심이 좋은 등 5가지가 좋다는 데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또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마치 정자처럼 생겼다 하여 삼괴정(三槐亭)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오래살수 있는 나무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다. 나무가 오백년 이상 되면 과학적으로 정확한 나이를 알기는 힘들지만 대체로 느티나무가 가장 오래 살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느티나무는 당산목(堂山木- 성황당목)으로 된것이 많다. 느티나무에 얽힌 이야기로서는 봄에 잎이 피는 모습을 보고 그 해 농사가 풍년인지, 흉년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많다.

정자나무로서는 느티나무 아니고서는 회나무, 팽나무, 피나무, 느릅나무, 능수버들, 음나무, 호두나무, 단풍나무, 등을 들 수 있는데 거목이어야 한다.

느티나무는 동양산의 나무이기 때문에 무언가 우리에게 호감이 더 간다. 그것은 어느 높은 재 먼길 나그네에게 산마루에서 있는 한 그루의 정자 밑에서 땀을 씻어내는 정자나무로서 그 길을 넘어본 사람들끼리는 그 나무에 인연을 맺게 된다.

그래서 각 마을마다 전설하나씩은 간직하고 있는 언제나 넉넉한 풍채를 자랑하며 동네의 어귀를 지키는 넉넉하고 든든한 나무이기에 느티나무를 더 좋아하는지 모른다.


-박형순의 신비로운 나무의 생태-



김민수의 「우리말 어원사전」에 따르면, 느티나무의 이름은 누를 황의 ‘눌’과 회화나무의 괴[槐]의 합성어에서 ‘느튀나모’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느티나무의 이름이 황과 괴와 관련해서 정한 것은 이 나무의 잎이 누렇고, 회화나무와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헌의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를 오역하는 사례가 아주 많습니다. 
 
중국 주나라 봉건시대에는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삼공三公’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종종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어서 ‘삼괴三槐’라 불렀습니다.
충남 아산의 ‘구괴정九槐亭’은  조선시대 맹사성孟思誠(1360-1438)을 비롯한 당시 세 명의 정승이 각각 세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어서 생긴 이름입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회화나무를 느티나무로 수용한 ‘문화변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느티나무는 충북의 괴산군 오가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82호 느티나무인데, 이 느티나무의

나이는 800살입니다.
충북 괴산(槐山)은 느티나무의 이름을 가진 행정명인데다 전국에서 느티나무 노거수가 가장 많은 지역입니다.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의 ‘현고수懸鼓樹’는 아주 특별한 느티나무입니다.
현고수는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이 나무에 북을 달아 의병을 모아서 붙인 이름입니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에서 목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합니다.
국보 제18호인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의 무량수전의 기둥이 바로 느티나무입니다


느티나무는 쐐기풀목 느릅나무과로 괴목, 굴목낭, 굴무기, 귀몽, 귀목나무, 귀한나무, 느끼낭, 잎지는 큰키나무 등등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김새는 평균적으로 높이는 26m정도, 지름3m정도, 나무껍질은 회색빛을 띤 흰색이고 오래 묵은 나무껍질은 비늘처럼 떨어진다고 합니다.


잎은 굵은 가지가 갈라지고 어린 가지에는 잔털이 촘촘히 어긋나기로 나며 길이는 2∼7cm, 너비 1∼2.5cm의 타원형으로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고 측맥은 8∼14쌍입니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한 나무에 있으며 5월경에 피는데 수꽃은 세가지 밑에 모여달리며 4∼6개로 갈라진 화피와 4∼6개의 수술이 있습니다. 암꽃은 새가지 윗부분에 1개씩 나고 퇴화한 수술과 암술대가 2개로 갈라진 암술이 있습니다.


열매는 핵,지름이 약 4mm의 찌그러진 공 모양으로 딱딱하고 10월에 익으며 깊은 뿌리는 조경용, 목재, 식용, 약용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시골 어귀, 한 마을의 역사를 간직한 정자나무의 역할을 하는 수종은 주로 은행나무, 팽나무, 회화나무, 그리고 가장 많은 느티나무 등이라고 합니다.


느티나무는 수명이 길어 오래 살 뿐만 아니라, 줄기가 곧게 자라면서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생김새도 좋고 목재로도 우수하여 모든 면에서 으뜸이라 산림청에서 밀레니엄 나무로 선정 되기도 하였습니다. 가지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주로 종자로 번식합니다.


꽃은 5월경에 피는데 아주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보는 것조차 어렵지만 나무 밑바닥에 가득 떨어진 좁쌀 모양이 떨어져 있다면 느티나무의 꽃을 만나는 행운을 얻을 수 있다고 하니 귀한 나무인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봄에는 어린잎을 떡에 넣어 쪄서 먹기도 하고 목재는 노란빛을 띤 갈색으로 결이 곱고 잘 썩지 않으며 벌레도 없을 뿐 아니라, 마찰과 충격 등에 강하고 단단하여 관재, 기구, 생활도구 등을 만드는 재료로 널리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로수와 조경수로 흔히 만나게 되는 느티나무는 오래전부터 우리 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복, 귀목, 신목으로 받들어 봄에 트는 싹의 모양을 보고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는데 느티, 느릅, 시무나무의 싹을 따다 떡을 해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의 ‘개나무’란 이름의 느티나무는 주인을 구하고 죽은 개의 전설이 있으며,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의 천연기념물 45호 느티나무는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흔히 우리나라를 소나무 문화로 알고 있으나 소나무를 널리 이용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이후이고 그 이전의 유물은 느티나무 문화가 대부분입니다.

속리산에서 자라는 둥근잎 느티나무와 강원도, 경상남도에서 자라는 긴잎느티나무도 있습니다.




수종 : 느티나무  
지정종목 : 보호수 11-34   
수량 : 1본  

수령 : 527년(지정일자 기준)

수고 : 17m

직경 : 5.4m 
지정일 : 1982. 9. 20  
소재지 : 용성면 용천리 300
관리자 : 

* 정자목



 사진첩

























회화나무



회화나무는 오래전부터 신성시하는 나무로 함부로 하지 않았다.

높은 선비의 집이나 서원, 궁궐에만 심을 수 있었고 특별한 공이 있는 신하에게 임금이 상으로 내린 나무이기도 했다.

옛날 중국에서는 재판관이 송사(訟事)를 들을 때 반드시 회화나무 가지를 들고 재판에 임했다고 한다.

회화나무가 진실을 가려주는 영험한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회화나무 꽃이 필 무렵(음력 8월 무렵) 중국에서는 수나라 문제 때 처음 실시한 과거 중 진사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래서 진사 시험 시기를 괴추(槐秋) 혹은 괴황(槐黃)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과거 시험에 응시하러 가거나 합격했을 경우 집에 회화나무를 심곤 했습니다.

또한 중국 주나라에서는 조정 앞에 회화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래서 조정을 괴정(槐庭 )이라 불렀습니다.

특히 중국 주나라 때 외조에는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었습니다. 삼공(태사, 태부, 태보)이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향해 앉았습니다. 그래서 삼공을 삼괴(三槐) 혹은 괴문(槐門), 괴위(槐位)라 부릅니다.

창덕궁 돈화문을 지나면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유학자들 집에서도 종종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에는 죽은 회화나무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옛날 천원 권 지폐 뒷면에서는 아주 무성한 회화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고산 윤선도가 거처한 녹우당에서도 아직 회화나무가 살고 있습니다.”


고대 신분사회에서는 신분에 따라 무덤에 심는 나무가 달랐다.

회화나무는 주나라 때 사대부 계층의 무덤에 심은 까닭에 학자수라 불린다.

한편 중국의 과거시험 중 진사시험을 괴추槐秋라 불렀는데, 시험 시기가 음력 7월 회화나무에 꽃이 피는 시기와

같았기 때문이다.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들은 합격을 기원하는 뜻으로 회화나무를 심었다.

이런 관행은 송나라까지 이어져, 회화나무는 사대부, 학자, 선비를 상징하는 나무가 됐다.


송대 사대부는 세 가지 위상을 차지한다. 첫째는 관료, 둘째는 지주, 마지막으로 성리학자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성리학자로서의 사대부는 회화나무와 아주 중요한 연관이 있다.

사대부를 상징하는 나무가 바로 학자수인 회화나무이기 때문이다.

사대부는 송학宋學(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송학은 일차적으로 불교와의 결별 선언이자 유학의 재생, 즉 르네상스였다.

송학을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고전의 재생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창덕궁이나 성균관, 옛 경상감영 터를 답사할 때 건물을 우선적으로 보다보면 풍경을 놓치기 쉽다.

창덕궁은 품격 높은 정원과 다름없다. 돈화문에 들어갈 때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다고 왼쪽 담을 등지면, 가장 중요한 회화나무 천연기념물을 볼 수가 없다.

 

조선의 왕들이 거처한 창덕궁에 회화나무가 살고 있는 것은 주나라 때의 관례에 따른 것이다.

창덕궁회화나무군2006년 천연기념물 제472호로 지정되었다.

창덕궁의 천연기념물 회화나무는 조선의 지배이념이 성리학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나무의 나이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창덕궁에 소나무를 심었다는 내용은 있지만 회화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은 없다.

창덕궁 회화나무의 나이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동궐도. 동궐도에서는 현재 위치의 회화나무를 볼 수 있다.

이 그림이 1824~1827년에 제작되었음을 감안하면, 창덕궁의 회화나무는 적어도 300~400살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_

  

창덕궁의 회화나무는 국내 다른 회화나무 천연기념물에 비해 나이가 적다.

그러나 창덕궁의 소나무가 왕을 상징한다면, 회화나무는 선비를 상징했다.

소나무와 회화나무는 조선 왕조의 지배층을 상징하는 나무였다.

궁궐에 두 나무가 어우러진 것을 보며 그 시대를 떠올릴 수 있다.


서원은 선비들의 공간이었다.

서원을 세울 때는 건물뿐만 아니라 서원의 기능과 관련한 상징을 만든다.

조선시대 서원 건립 때 가장 활발히 사용한 상징물이 바로 나무였다.

퇴계 이황을 모셔 유명한 도산서원의 경우, 이황은 서원을 짓고 회화나무를 심었다.

구지폐 1000원권 뒷면에 실려 유명한 도산서원 도안을 보면, 회화나무가 선명히 그려져 있다  

도산서원의 회화나무는 500살로 추정하고 있지만, 서원의 설립연도를 고려하면 아무리 많아도 440살을 넘지 않는다.

500살은 나이가 많다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인 나이다.

도산서원의 죽은 회화나무는 후손들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 회화나무는 이황을 비롯해 이곳을 출입하던 사람들의 선비 정신을 일깨워주었던 역사적인 나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곳의 회화나무는 죽은 지 벌써 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쓰러지지 않고 서 있다.

도산서원 같은 문화재 공간의 나무는 죽었다 하더라도 가능하면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그래야만 전통을 계승할 수 있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정신 또한 우리가 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판권의 「나무열전」 <회화나무와 선비문화> 에서 인용-



회화나무 아래의 사인삼경(), 강희언26x21cm <개인소장>


회화나무는 수백 년에서 천 년을 넘겨 살 수 있고, 다 자라면 두세 아름에 이르기도 한다. 키만 껑충한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고루 고루 뻗어 모양이 단아하고 정제되어 있다.

그래서 궁궐이나 알려진 서원, 문묘, 양반 집 앞에 흔히 심는다.

잡귀가 붙지 않는 나무라고 믿어 회화나무 세 그루를 집 안에 심어두면 그 집에 복이 찾아온다고 한다.

다만 회화나무는 창경궁 회화나무 팻말 내용처럼 옛 사람들이 느티나무와 같이 괴()로 표기하여 혼란이 있다.

앞뒤 관계로 구분하는데 간단치 않다.

사도세자의 명으로 심었다는 온양행궁의 영괴()도 지금 살아있는 나무는 느티나무다.

두 나무는 바깥 모양은 다르지만 나무 속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세포모양이나 배열이 비슷하다.

따라서 재질이나 쓰임이 거의 같아서 같은 한자를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느티나무는 거()라 하여 따로 구분하여 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가일몽의 괴안국()도 회화나무 아래에 있던 개미나라 이야기다




수종 : 회화나무  
지정종목 : 보호수 11-35   
수량 : 1본  

수령 : 527년(지정일자 기준)

수고 : 16m

직경 : 5.1m 
지정일 : 1982. 9. 20  
소재지 용성면 용천리 151
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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