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穴學/혈자리 서당

기(氣)가 막힌 걸 '기막히게' 뚫는 단중혈(膻中穴)

초암 정만순 2017. 11. 29. 11:28



호흡, 비울수록 편안하다


- 기(氣)가 막힌 걸 '기막히게' 뚫는 단중혈(膻中穴) -


호흡곤란 여고생과 '낭만파' 의사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전에 없던 이상한 경험을 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집에서 할 일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리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치 심장이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코 뒤에서 맥박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얼굴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고 거울을 보니 평상시 얼굴이 좀 붉어졌을 때와는 다른 느낌의, 조금은 섬뜩한 검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이러다 곧 죽을 것만 같아 정신을 최대한 집중하고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숨을 아무리 깊이 들이쉬려 해도 겨우 목구멍에 닿는 정도였지만 호흡과 함께 증상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상황이 시작된 지 10분이 채 되지 않아 나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에 복귀할 수 있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가슴통증 실상은 연애욕망??


그런데 그 이후로도 어쩌다 한 번씩 비슷한 일이 일어났고, 두려운 마음에 나는 곧 동네 내과를 찾았다. 푸근한 인상의 의사 선생님은 내 가슴에 청진기를 대어보시고, 가만히 맥도 짚어보시고 또 혈압도 재보시더니 어느 순간 청진기를 탁 내려놓으시며 별일 아니라는 듯 유쾌하게 말씀하셨다. "연애하면 낫는 병이야, 연애해!" "네에...?!" 여기가 웬 점집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예상치 못한 진단에 놀랍기도 하고, 도저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선생님 얼굴만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선생님께선 이렇게 덧붙이신다. "부정맥이 좀 있긴 한데 그건 연애를 하면 나을 거예요. 그것 말곤 별다른 이상 없음!" 


이렇다 할 치료나 처방전도 없이 그렇게 병원을 나오는 길. 함께 갔던 엄마는 요즘 세상에 무슨 저런 '낭만파' 의사가 다 있느냐며 다시는 그 병원에 가지 말자고 하셨다. 하지만 웬일인지 나는 입가에 배시시 웃음이 나오며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해보라. 졸업을 앞둔 여고생에게 그보다 더 흡족한 처방이 있으랴! 안타깝게도 증상은 훗날 연애를 할 때에도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처방은 적어도 무슨 큰 병이 있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병원을 찾았던 나의 마음을 풀어주기엔 충분했다. 중병인 줄 알았는데 연애를 하면 낫는 병이라니. 진단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나의 몸을 한결 가볍고 유쾌한 시선으로 보게 했던 그 발상의 전환! 그것은 당시 의사선생님으로부터 내가 받을 수 있었던 최상의 처방이었다.

나를 '불'로 보지 마!


그렇다면 그때 내가 겪은 그 '숨 가쁜' 증상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하기야 나는 어릴 적부터 폐와 기관지가 약했다. 너덧 살 때부터 컹컹거리는 기침이 워낙 심해서 도라지와 배를 달인 물을 달고 살았는데, 그래도 잘 낫질 않아 용하다는 한의사 선생님으로부터 폐를 보하는 약을 지어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 뒤로 기침은 많이 좋아졌지만, 환절기만 되면 코와 목이 고장 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살아오며 특별히 숨이 가쁘다고 느꼈던 건 앞서 말한 때가 처음이었다. 대체 그때 내 몸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폐는 기를 저장하는데, 기가 지나치게 많으면 기침이 나고 숨이 차며 [...] 가슴과 얼굴이 다 벌겋다. [...] 냉기(冷氣), 체기(滯氣), 역기(逆氣), 상기(上氣)라는 것들은 모두 폐(肺)가 화사(火邪)를 받아 기가 타오르게 되어 기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오지 않아 청도(淸道; 숨 쉴 때 공기가 통하는 길. 기도(氣道).)를 훈증하는 것으로, 이것이 심해지면 심한 병이 된다.


─ 『동의보감』, 「기(氣)」, 법인문화사, 250~251쪽


『동의보감』에 의하면 나처럼 숨이 차고 얼굴이 벌겋게 되는 것은 우리 몸의 기(氣)가 위로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폐(肺)가 화사(火邪)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 화사(火邪)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빛이나 열, 외부 자극이나 스트레스 따위를 말한다. 사실 적당한 열과 자극은 우리의 삶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필요 이상으로 많아지면 우리 몸은 말 그대로 '과열(過熱)'되어 곳곳에 불이 붙게 된다. 특히 오행상으로 금(金) 기운에 속하는 폐(肺)는 이러한 불길에 매우 취약하다. 그리고 이처럼 폐에 불이 붙으면 폐가 주관하는 기(氣) 역시 타오르는 불과 함께 가슴과 얼굴 쪽으로 솟구치게 된다. 따라서 마치 굴뚝이 연기를 뿜듯 기침이 나는 동시에 숨을 들이마시기는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호흡곤란을 느꼈던 각각의 상황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숨이 차는 증상은 특히 사우나나 목욕을 할 때처럼 뜨거운 수증기가 가득 찬 밀폐된 공간에 있을 때, 화장품이나 세제의 진한 향기나 담배 연기, 매연 등을 많이 맡았을 때, 혹은 무더운 여름날 빈속에 뜨거운 물을 마셨을 때 등의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여기서 뜨겁게 데운 물이나 진한 냄새 등은 모두 자극적인 것들이지만, 우리의 폐(肺)는 웬만해선 이것들을 화사(火邪)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수증기나 연기로 둘러싸여 호흡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자 그렇지 않아도 약한 폐가 외부 환경의 변화에 쉽게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실제로 주변을 관찰해보면 폐가 튼튼한 사람들은 웬만한 환경 변화에도 여유를 가지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에 나처럼 폐가 약한 경우에는 조그마한 온도 변화나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작은 불씨라도 옮겨붙을까 나도 모르게 조심하게 되는 것이다. '폐기(肺氣)가 곧 패기(覇氣)'라고들 하는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일 거다. 환경의 변화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패기는 곧 튼튼한 폐에서 비롯될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나의 호흡곤란은 단순히 사우나를 피하고 맑은 공기를 마신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웬만한 시련과 고난 따위는 화사(火邪)로 여기지 않는 신체, 즉 불을 불로 보지 않는 그 배짱이 나에게 필요한 '폐기-패기'가 아닐까.

화사한 봄날이 남기고 간 ‘화사(火邪)’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다. 사실 폐가 약한 것도, 목욕을 하거나 매연을 맡은 것도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무렵에 유독 그런 증세가 나타났을까? 이런 나의 질문에 『동의보감』은 보다 근본적인 지점부터 들여다볼 것을 권하고 있다.
 

기에 처음 병이 생길 때는 그 원인이 매우 사소하다. 혹은 칠정(七情)으로 인해 생기고, 혹은 육기(六氣)에 감촉되어 생기고, 혹은 음식으로 인해 생기는데 [...] 일체의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로 감정이 생겨 답답한 것, 명예나 재물이 뜻대로 오지 않아 억울하면서 고민스러운 것, 칠정으로 상하여 음식 생각이 없고 얼굴이 누렇게 뜨면서 몸이 여위며 가슴속이 더부룩하고 답답한 것이다.


─ 『동의보감』,「기(氣)」, 법인문화사. 261~262쪽


윗 구절을 읽으면서 번뜩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거듭되는 호흡곤란 증상을 느끼고 '낭만파' 의사선생님을 찾아갔던 날, 사실 내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었다. 당시 나는 1년 넘게 사귀어 오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내 나름의 가슴앓이를 하던 중이었다. ‘니가 없는 거리에는 내가 할 일이 없어서~’라는 노래 가사처럼(푸훗!) 그때 나는 어디를 가나 한 사람만을 그리고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지냈던 것 같다. 지나고 보니 ‘오글거리는’ 하나의 에피소드일 따름이지만, 어쨌든 그러고 보면 그때 내게 '연애를 하라'던 의사선생님의 처방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화사(火邪)만 남기고, 화사한 봄날은 간다.


그렇다. 어쩌면 숨이 가빠오고 가슴이 답답할 때 가장 먼저 돌아보아야 하는 건 나 자신의 마음 씀씀이인 거다. 『동의보감』에서도 기(氣)의 병은 결국 칠정(七情)으로 인해 생긴다고 하지 않는가. 내 뜻과는 상관없이 오가는 인연들, 내가 원하는 만큼 얻을 수 없는 명예나 재물에 온통 마음을 쓰고 있진 않은지, 가질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며 감정을 쏟고 있진 않은지. 그렇게 내 마음을 보고 또 보라고 『동의보감』은 말하고 있다. 아마 당시에도 이미 난 알고 있었을 거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생전 처음 호흡곤란을 느꼈던 그 날 나를 괴롭힌 건 다름 아닌 한 사람을 향해 쏟아내고 있던 나 자신의 감정이었음을. 나의 폐에 불을 붙인 건 다른 게 아니라 ‘화사’했던 봄날이 내게 남긴 화사(火邪)였음을 말이다.

기(氣)의 바다에 헤엄치다








마침 여기에 나처럼 한 가지에 '꽂힌' 사람을 위한 혈자리가 있다. 바로 단중혈(膻中穴)이다. 단중혈은 양쪽 젖꼭지 사이의 한가운데 우묵한 곳에 있다. 목 아래로 널따란 가슴뼈의 중심을 따라 더듬어 내려가다 보면 갈비뼈가 끝나는 곳보다 3~5cm쯤 위로 오목해지는 곳을 찾을 수 있다. 언뜻 보기엔 여느 혈이나 다름없지만, 사실 이곳은 우리 몸의 기(氣)가 모두 모였다가 다시 퍼져 나가는 광장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 '기의 바다(氣海)' 혹은 '황정(黃庭; 넓은 정원)'이라는 ‘메가급’ 별명을 가지고 있는 혈이기도 하다. 또한, 옛 도인들은 단중을 중단전(中丹田)이라 하여, 뇌의 상단전(上丹田), 배꼽 아래 하단전(下丹田)과 함께 수행의 중요한 기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만일 나의 경우와 같이 한 가지에 유독 감정을 쓴다거나 음식이나 날씨로 인해 폐가 화사(火邪)를 맞으면, 단중에 모인 기(氣)가 꽉 막혀서 더 이상 온몸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단중을 눌러보면 된다. 아프면 아플수록 기(氣)가 한 곳에 뭉쳐있다는 증거다. 그럴 때는 가운뎃손가락(단중이 속해있는 수궐음심포경에 해당하는 손가락이다)으로 단중을 꾹꾹 눌러 주거나, 엄지손가락을 옆으로 눕혀 그 주변을 넓게 쓸어주며 마사지해주면 효과를 볼 수 있다. 뜸을 뜨기도 하지만 침은 위치상의 위험 때문에 되도록 금하고 있다. 어쨌든 이렇게 단중을 자극하면 뭉쳐있던 기(氣)가 온몸으로 고루 퍼지고 경락이 잘 소통되며 호흡이 편안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놀라운 건 우리가 이미 이 원리를 삶에서 백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소 답답하거나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아이고, 속 터져~'하면서 주먹으로 쾅쾅 치게 되는 곳이 바로 단중이니까. 


(氣)와 관련된 병증은 단중 하나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막힌 기(氣)를 뻥(!) 뚫어주는 데 있어 단중의 힘은 강력하다. 그러나 단중을 꾹꾹 누르면서 보아야 할 것은 뭐니 뭐니해도 나 자신의 마음이다. 기(氣)가 한쪽에 뭉쳐있다는 건, 내 마음 역시 사람이든 돈이든 명예든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단중을 누르는 그 손가락이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곳부터 보아야 한다고. 그런 의미에서 단중에 모인 기(氣)는 내가 붙들고 있는 욕심에서 자유로워지는 딱 그만큼만 온몸으로 퍼져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비운 만큼 숨 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단중이 내게 주는 지혜다. 흐~읍호!  


젖꼭지가 저쪼아래 있는 사람은 단중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