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권법들 중 하나로, 사마귀의 동작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무술이라 전해진다.[1]당랑포선식(螳螂捕蟬式)이라 하여, 사마귀가 매미를 잡는 자세가 당랑권을 대표하는 특징이다. 그 이외에 원후보(猿猴步)라 하여 원숭이의 보법을 딴 부분도 녹아있다. 이는 왕랑(王郞)[2] → 승소도인의 계보를 따라 전해진 당랑권의 대표적 특징이며, 모든 당랑권에 녹아 있다.
2. 상세[편집]
2.1. 당랑권의 특징[편집]
당랑권이라 함은, 중국어로 사마귀 (당랑螳螂은 중국어로 사마귀) 권법을 뜻한다. 그러나 단순히 사마귀의 동작을 흉내 내는 권법이 아니다. 각종 영화를 통해서 자못 과장된 곤충 사마귀의 몸짓과 형태로 어필한 데다, 이후 우슈[3] 때문에 이런 경향이 더 심해졌지만, 전통권에서는 결코 그런 형태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실전성이 대단한 권법으로 정평이 나 있다.
2.2. 유래(由來)[편집]
당랑권은 중국 북방, 산동성(山東省)에서 발생했다고 전해지며, 북파권법 중에서도 특히 실전성이 높은 18개 문파의 기술을 모아 만들어진 것으로, 북파권법의 집대성이라고 부를만하다고 한다. 구전(口傳)과 전설에 따르면, 그 18개 문파의 기술이란 다음과 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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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기술적 특징[편집]
단타(短打)를 위주로 한, 근접전을 주체로 하며, 당랑수(螳螂手)라는 사마귀의 손 모양을 모방한 손이 특징적이다. 공격 시에는 상대의 빈틈을 만들고(루: 漏), 그 빈틈을 쉴 새 없이 공격한다(보: 補). 방어 시에는 재빠른 보법, 원후보법(猿猴步法)으로 상대의 공격을 흘려 내거나, 태극권의 손놀림을 작고 빠르고 강하게 바꾼 듯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공격을 쳐내듯 휘감아내기도 한다.
원후보(猿猴步)는 원숭이가 발을 교차시키면서 걷는 모양을 기본으로 한다고 전해진다. 원후보를 바탕으로 하여, 끊임없이 상대의 측면, 배면(背面: 등 뒤)로 움직이며, 상대의 반응에 따라 상하좌우로 나뉘어 손과 발로 연속기를 구사하는 것을 기본 전법(戰法)으로 한다고 한다.
2.4. 분파[편집]
상술(上述)한 전법을 기반으로 하지만, 개별적 특색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기도 했었다. 주로 기관총 같은 연속 공격을 구사하여, 상대의 품속에 파고들어,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을 주체로 하면 경당랑(硬螳螂), 연속기를 사용, 상대에게 접근하여, 상대의 자세를 무너뜨리거나, 내던지는 것을 주체로 하는 파를 연당랑(軟螳螂拳). 그러나 이는 절대적인 분류는 아니고, 이견(異見)도 적지 않다.
경(硬)당랑은 칠성(七星), 매화(梅花), 비문(秘門)이 대표적이다. 기술이 세밀하고, 단타(短打)의 연속기를 그 특기로 하며, 연속 공격의 속도가 무척 빠르다. 연(軟)당랑에는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이 대표적이다. 전자(前者)에 비해 기술의 풍격이 부드러운 편이며,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데에 그 특기가 있다고 한다. 경당랑과 연당랑의 중간적인 형태로 팔보당랑권(八步螳螂拳)이 있는데, 형의권․통비권의 진덕선(陳德善), 팔괘장의 왕종경(王宗慶), 칠성당랑권의 강화룡(姜化龍)이 서로의 권법의 특징을 합쳐서 만든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이후 장권(長拳)당랑, 비문당랑(秘門螳螂), 광판당랑 등이 나왔다. 매화당랑(梅花螳螂)은 태극당랑(太極螳螂), 태극매화당랑(太極梅花螳螂) 등으로 다시 분파가 나왔다.
이는 어디까지나 세부적인 차이점을 억지로 분류했을 때의 특징일 뿐, 거의 모든 문파의 당랑권은 타상취하(打上取下), 성동격서(聲東擊西), 일기오타(一氣五打) 등의 원칙을 바탕으로, 탄경(彈勁)을 주로 이용한 쾌속의 연속공격으로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단숨에 승부를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도 전해진다.
3. 역사와 배경[편집]
3.1. 당랑권의 기원[편집]
한때 널리 퍼졌던 바에 따르면, 당랑권은 청대(淸代)(1644~1911) 초기, 산동성 묵현(墨縣)의 반청복명(反淸復明)[4]지사인 왕랑(王朗)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했다.
한때 한국에도 있었고, 이후 대만에서 무술을 전수했었던, 고(故) 장상삼(張詳三) 노사(老師)의 말을 인용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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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랑권의 수기(手技)와 보법(步法)에 대해서 장상삼 노사는 전하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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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왕랑은 나중에 원숭이의 발놀림을 연구하여, 자신의 권법에 덧붙였고, 다시 말의 발놀림을 연구하여, 거기에 더했다 한다. 그리고 자신이 정리한 권법을, 자신에게 영감(靈感)을 준 사마귀의 이름을 따, 당랑권(螳螂拳)이라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창시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그리고 이후 밝혀진 것이지만, 전승 과정에서 태사조(太師祖)의 이름이 잘못 전해지는 등의 오류가 있었다고도 한다.
3.2. 당랑권은 어떻게 알려졌나?[편집]
당랑권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중화민국 8년(1919), 상해정무체육회가 당랑권을 도입하기 위해, 산동에서 유명한 당랑권사 나광옥(羅光玉 : 1888~1944) 노사를 초빙한 이후부터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무술가들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당랑권이 실전의 비권(秘拳)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다.
나광옥(羅光玉)
3.2.1. 범욱동(范旭東)[편집]
중국권법의 옛 명인(名人)들의 일화가 카더라~ 수준을 넘지 못하는데, 나광옥의 스승인 범욱동(范旭東)은 실제 자료로 증명 가능한 전적(戰績)이 있다. 청나라 광서 1년(1875)에, 시베리아에서 열린 격투 시합에 출전해 러시아 선수 10명을 이기고 우승했다고 하는데, 진초화의 북파당랑파발달사고(北螳螂派發達史考)라는 논문에 소개된 자료에 따르면, 이때의 시합은 삼보나 레슬링처럼 잡고 꺾거나 던지는 기술이 허용되는 종합 격투기 시합이었다고 한다.
산동대한(山東大漢)[5]라는 말에 어울리게, 범욱동은 200파운드(약 90kg) 정도의 거구였다고 한다. 대식가(大食家)로도 유명했는데, 식량난이었던 시대라 가족은 범욱동을 키우는 데 고생이 많았다는 일화도 있다. 범욱동의 제자였던 나광옥 역시 큰 체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시합이 있었다는 것과, 승패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시합의 규모나 그 내용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시합 내용이 어떠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3.2.2. 대중에게 알리다 : 나광옥[편집]
무술가들 사이에서의 명성에 비해, 당랑권은 대중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나광옥의 제자인 마성금이 중화민국 18년(1929)에 개최된 실격권법대회(實擊拳法大會)[6]에 상해 대표로 출장해 우승하자, 그것을 상해신문 등이 기사화 했고, 당랑권이 일반인들에게도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유명세에 힘입어, 홍콩에 정무체육회 지부가 세워졌을 때, 나광옥은 교련(教練)[7]의 한 사람으로 초빙되었는데, 나광옥은 거의 문맹(文盲)이었다.[8] 그래서 오보상이라는, 홍콩 정무회의 태극권 교사가 나광옥의 말을 받아 적어 글로 남겼는데, 이때, ‘당랑권의 개조(開祖)는 왕랑(王郞)이다’라고 기록했다. 즉 처음에는 왕랑(王朗)이 아니라, 왕랑(王郞)이었던 것.
3.2.3. 개조(開祖) 전설을 바로 잡고 당랑권을 널리 퍼뜨리다 : 황한훈(黃漢勛)[편집]
홍콩 정무체육회의 나광옥의 문하생 중 황한훈(黃漢勛)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황한훈은 불과 18세의 나이에 마카오에 당랑 국술관을 개설했을 정도의 실력이었다고 한다. 나광옥의 신뢰도 두터워 1935년, 19세 때 한구 정무회의 교련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전쟁을 피해 다시 홍콩에 돌아왔는데, 이때쯤에는 황한훈도 표준어인 북경어를 할 수 있게 되어, 스승인 나광옥과 직접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9] 이때 황한훈은 스승인 나광옥에게 질문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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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황한훈은, 당시 나광옥의 구술(口述)을 오보상이 받아 적을 때, 나광옥이 ‘왕(王)씨 성을 가진 남자’라는 의미로 ‘젊은이, 사나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랑(郞)’을 붙여, ‘왕랑(王郞)’이라고 말한 것을, 오보상은 이를 발음이 똑같은 ‘왕랑(王朗)’으로 잘못 적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황한훈은 당랑권 서적을 저술할 때, 왕랑(王朗)이라고 된 예전의 표기를, 왕랑(王郞: 왕씨 성을 가진 남자)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1946년 당랑권술천비(螳螂拳術闡秘)를 내며, 다시 당랑권술사(螳螂拳術史)를 정리할 때, 개조(開祖)를 왕랑(王郞)으로 고쳐 썼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왕랑(王郞)이라는 말을, 왕랑(王朗)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황한훈은 홍콩을 거점으로 하여, 당랑권 관련 서적을 30권 넘게 저술하여, 당랑권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때 당랑권 수련자들 중 황한훈의 서적을 참고하지 않은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고도 한다.
당랑권은 1900년대 초까지는 발상지인 산동성 외 다른 곳에서는 전승되지 않았으나, 정무체조학교의 설립과 더불어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정무체조학교는 후에 중앙정무체육회로 이름을 바꾸어, 홍콩, 광주, 하문 등의 중국 남부 각지에까지 지부를 설립해, 당랑권을 동남아시아 주변에 전파하였다.
그러다 1948년, 중국에 정변이 일어나,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이동할 때 많은 당랑권사들이 대만으로 이주했다. 그리하여 대만에서 당랑권이 널리 퍼졌는데, 칠성, 매화파의 이곤산(李崑山), 왕송정(王松亭), 비문파의 장덕규(張德奎), 육합파의 장상삼(張詳三), 유운초(劉雲樵), 소욱창(蘇昱彰), 대사철(戴士哲), 주고산(周高山) 등이 당랑권을 퍼뜨렸다. 그리고 산동성이나 대만을 중심으로 한 중국 남부에서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같은 동남아시아에까지 널리 퍼졌다.
그 실용성을 인정받은 당랑권은, 화교(華僑)의 진출과 함께 한국, 미국, 일본을 시작으로 하여 세계 각국에 퍼졌다.
3.3. 실제의 기원 등에 대한 기록과 논란[편집]
설화상 기원은 약 1400년 전 당나라 시절 유래가 확인되는데 발원지는 현재 중국 산동성 연태지구이다. 왕랑(王朗)이냐, 왕랑(王郞)이냐에 대해서도 아직 논란이 있다고도 하는데, 관심 있는 위키러들은 바이두에서 당랑권 논단을 찾아보도록 하자.
역사적 사료로 정확히 남아있는 당랑권의 기록은 명나라말기 무관고시에 대해 기록된 자료인데, 여기에 산동성 래양현 출신의 무사 2인의 무술이 당랑권이라고 게시되어 있다. 또한 이런 기록은 청나라대의 사료들에도 발견된다.
왕랑(王郞), 즉 왕씨 성을 가진 남자가 과연 누구였을까, 에 대해, 일본의 중국무술연구가 카사오 쿄오지(笠尾恭二)는 청나라 건륭 황제 때, 산동 농민반란군의 수령이었던 왕륜(王倫)이 아닐까 하고 추측한 바 있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힘이 세며 권용(拳勇)을 했다’라고 하는데, 권용이란 권법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왕륜이 양손에 도(刀)를 들고 질주(疾走)하는, 모습은 나는 듯해, 마치 원숭이 같았다’라고 하는데, 이는 당랑권과 통하는 점이 있다. 이하 카사오 쿄오지의 설을 인용,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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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보권(崩步拳)의 시연(試演: 시범 표연)[10]
4. 당랑권의 기술[편집]
4.1. 당랑수(螳螂手)[편집]
많은 사람들이 당랑권! 하면 바로 떠올리는 특징이다. 문파에 따라, 전수자에 따라 세부적인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당랑수(螳螂手)의 한 예
당랑수는 당랑권의 핵심이라고 하면서, 눈이나 기타 급소를 점혈(點穴)하는 데에 쓰이고,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여, 걷어내는 데에도 주로 사용된다는 주장이 있는데, 물론 투로(套路)[11]에서도 당랑포선(螳螂捕蟬)이나, 낭심을 향한 공격, 눈을 향한 공격 등의 형태로 가끔은 등장하지만, 실제 전통 당랑권에서는 글쎄, 어떨까? 싶다.
일본의 몇몇 자료에 의하면, 당랑수의 모양은 관절을 제압하는 금나법(擒拏法)을 보조하는 데도 알맞다고 하기도 한다. 당랑수 3개의 손가락과 손목 안쪽 부분으로 상대의 부위를 끼우듯이 잡을 때, 손가락 끝으로 점혈을 동시에 하면 상대는 관절을 제압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급소를 찔리는 통증도 맛보게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실제 당랑권 수련자들 대다수는 이런 주장에 그냥 웃지요.
버추어 파이터의 리온 라파엘이 당랑권 사용자로 등장하고, 칠성당랑을 모티브로 했으나 격투게임을 위해 과장왜곡되었다. 당랑수(螳螂手)의 손모양을 격투 내내 풀지 않고 계속 유지했던 버전도 있다. 실제 당랑권에서는 투로 연무의 한두 동작 정도 외에는 당랑수를 잡는 경우가 별로 없다고 한다. 실제 칠성당랑의 기법과 혼동하지 말자.
4.2. 원후보(猿猴步)[편집]
당랑권은 중국무술로서는 매우 특이한 보법을 갖고 있다. 검도나 펜싱의 보법과 유사하다는 의견도 있다. 상대와의 간격을 조정할 때 매우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한 예를 들면, 오른발이 앞으로 나와 있는 자세에서 왼발을 오른발에 갖다 붙인다는 느낌으로 전진시킨다. 왼발이 오른발 옆에 올 때쯤이면, 이미 오른발은 튕기듯 앞으로 전진한다. 왼발과 오른발이 닿거나 하면 안 된다. 크게 크게 이동하는 것보다는, 좁은 보폭으로 여러 번,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숙달시키는 것이 좋다고도 한다. 이소룡이 저서에 남긴 셔플 스텝(shuffle step)과 그 맥락은 거의 똑같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숙달되면, 자신의 자세를 바꾸지 않고, 상대를 쫓아가면서 기관총 같은 연속 공격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원후보를 밟으면서 전진하는 순간, 전진하는 힘과 함께, 다리의 힘을 위로 보내는 요령이 있는데, 이 요령을 습득하면, 짧은 가속거리지만, 그 위력이 만만치 않은 기술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右) 등산식(登山式)에서 연속 공격을 할 때, 초보자는 제자리에서 하지만, 숙련자는 원후보를 밟기 때문에, 우측 등산식의 좌, 우측 다리가 바뀌지 않은 채로, 전진하면서 공격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렇듯 원후보는 이동시에 체중이 실리는 다리의 위치가 안정되기 때문에, 자세가 무너지지 않으며, 왼쪽과 오른쪽 다리가 교차될 때, 흔히 생기는 낭심의 노출도 막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등산식(登山式)의 한 예(자세는 당랑 타강권(躱剛拳)을 하는 도중이다)
4.3. 추퇴(揪腿), 소퇴(掃腿)[편집]
당랑권의 발차기는 ‘차기 위한’ 것도 많지만, 중심을 무너뜨리는 기술이 특징이라고 전해진다. 당랑권의 특징인 추퇴(揪腿)는 거의 모든 중국무술문파에서 차용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는데, 공방(攻防)에서 아주 유용한 기술이며, 수많은 손기술과 조합되어 다양하게 응용된다고 한다.
옥환식(玉環式)이라 하여, 좌반식(坐盤式)에서 자세의 높이를 높인 듯한 자세에서, 그 기본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상대의 체중이 실리는 앞발을, 마치 갈고리로 걸듯이 후리는데, 발기술만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은 손기술과 조합하여 사용한다고 전해진다.
성질 급하신 분은 03:09부터 보고, 해설(? 장난?)부터 보고픈 분은 02:40부터 보자
추퇴는 응용 변화가 많고 그 실전 활용도가 매우 높다고 한다. 당랑권의 간판 기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당랑권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한다.
소퇴(掃腿)법은 몸을 낮추면서 상대의 다리를 차는 발차기의 총칭(總稱)으로, 예비 동작이 큰 대신에 당연히 위력이 크다. 앞으로 쓸어 돌리면 전소퇴(前提腿), 뒤로 돌며 쓸어 돌리면 후소퇴(後掃腿). 한국의 합기도(合氣道)나 특공무술 등에도 도입되어 있다.
칠성식(七星式)이라는 자세가 투로(套路)에 자주 나오는데, 옛날 무술서적 등에서 소개한 용법, ‘상대의 다리를 걸어서 중심을 흔드는 것’이라는 해설은 그 근본부터 왜곡되어 있다고도 한다. 단순히 다리를 거는 동작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있는데, 도서 등에서는 빠져 있다는 것.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5. 기타[편집]
스트리트 파이터의 겐의 상류가 영어로는 당랑권으로 번역되어 있다.
국내에선 권아와 버파 덕분에 팔극권에 밀린 마이너한 권법이란 이미지가 있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팔극권보다는 당랑권, 영춘권, 태극권의 수련자가 정말 많다. 한국에서도 처음 쿵후가 들어올 때, 소림권, 당랑권, 팔괘장 위주였었다. 한때 한국 쿵후계를 들썩였던? 서림 무술총서의 책 중에서도 앞에 당랑이라는 말만 안 붙어있을 뿐, 내용을 보면 당랑권의 한 투로나 한 계파의 교본인 경우가 많았다. 거의 다른 무술 다 합쳐서 1, 당랑권 관련 1 해서 1:1 수준으로 보일 정도.
여담으로 우해(于海) 노사가 소림사 시리즈(이연걸 출연)에서 당랑권을 사용하며 등장하여 많은 대중들이 기억하는데, 이 사람은 칠성당랑권의 권사(拳師)이시며 영화에서 칠성당랑권을 기본으로 한 자신의 당랑권을 내었으며, 우슈 대회에서는 우해 노사가 만든 투로를 바탕으로 쓰고 있다. # 중국 국가에서 당랑권 정규투로 고급편을 담당할 정도이니 그의 공력은 대단하다고 하겠다.
한국에 당랑권이 전해지게 된 것은 화교들에 의해서인데, 임풍장, 강경방, 이덕강 등이 대표적이다. 이중 태극매화 당랑권의 임풍장의 제자가 홍문탁이고, 홍문탁에게 당랑권을 배운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 MC 임성훈과 가수 겸 배우 전영록이다.
타 문파에서 당랑권을 지칭할 때는 흔히 '날카로운 권법이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당랑권의 실전성과 강력함을 인정하지만, 당랑권의 특질이 날카롭기에 그것을 익히는 당랑권사들도 성격이 날카로운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당랑권사들의 인성을 깎아내리는 표현은 아니고(...) 특질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당랑권사가 저렇지는 않다.
대한민국에는 당랑권을 주제로 쓰여진 시가 있고, 그 시 제목으로 출간된 시집이 있다. #
당랑권은 사실은 한민족의 무술이었으며 호박도라고 해야 한다는 소리를 하는 인간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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