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꽃의 전설
나무와 꽃에 얽힌 전설을 모아 보았다.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전설이 있으며, 나무와 꽃에 얽힌 전설의 이야기는 자연학습에 있어 흥미로운 소재거리가 될 것이다.
1. 가야리 회화나무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개실 마을에는 커다란 회화나무가 있다. 수령이 약 700여년이나 되는 이 고목의 굵기는 둘레가 약 5M 정도나 되는데 속은 썩어서 비었지만 표피는 아주 싱싱하며, 톱질 자국이나 낫질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게 자라고 있다. 이 나무를 심은 이는,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한 춘양 김씨의 조상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지만 이 나무를 괴롭히면 반드시 화를 입었다.
일제시대에 일본 순사가 이 나무를 베려고, 톱을 대다가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지만 그는 끝내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영목으로 생각했다. 해방 후에는 이웃 마을 돌뫼에 사는 황관덕씨가 젊은 시절에 낫자루를 하나 만들려고 이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졌는데, 앞니가 모두 부러지는 불행을 당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나무에 돌을 던졌다가 팔을 못쓰게 되기도 했다. 그 뒤부터는 어느 누구도 감히 이 나무를 괴롭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이 나무는 다른 나무와는 달리 상처없는 나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부인이나 고질병으로 장기간 고생하는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이 나무에 지성으로 정성을 다하면 효험이 있고, 소원성취 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나무는 개실 마을의 동신목은 아니지만 마을의 영목으로써 신주처럼 섬기고 있다. 지금도 춘양 김씨 후손들은 조상이 심은 나무로 여기고,이 회화나무에 절을 하며 아끼고 있다.
참고문헌 :《안동의 설화》(안동교육청,1992년)
검 토 : 안동시 와룡면 태동. 이해선
2. 국난을 알리는 은행나무
상주시 외남면 소상1리(좀실)에 있는 은행나무는 옛날부터 마을에서 섬겨 오는 고목으로 확실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500년 이상으로 전해온다.
옛 어른들의 말씀은 나라에 큰 재난이 날 때면(임진왜란,6.25동란) 큰 가지가 부러지고, 나무가 "윙윙" 소리를 내며 운다고 한다. 또 지금부터 100여년 전 마을 어느 노인께서 꿈꾸었는데 꿈속에서 은행나무가 "내 몸에 불이 붙었으니 꺼 달라"고 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노인은 이상히 여겨 은행나무로 달려가 보니 정말로 은행나무가 불에 타고 있었다. 급한 나머지 노인은 몽둥이로 불을 껐다고 한다. 지금도 불이 탄 흔적이 큰 상처로 남아 있다. 이제 너무 고목이 되어서 보호가 시급하나 노쇠하여 가는 것이 어찌할 수 없는 실정이다. 나무를 관리하기에 온 마을사람들이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부터 5년 전 나무둥치에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1년에 한번씩 베면 또다시 크고 해서 기이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매년 동제를 지낼 때는 정결하게 1주일 이상의 기도를 드리고, 상제 된 사람과는 말도 하지 않는다. 아들을 두지 못한 사람은 동제사 전 3일 기도를 드렸다가 제삿날 촛불을 가지고 가서 자기 집에서 정성을 드려 기도를 드리면 옥동자를 얻는다고 한다. 매년 음력 1월15일은 동리의 앞일과 풍년을 비는 동제를 지금까지 올리고 있다. 나무의 둘레는 5m 정도이며 높이는 20m이다. 나무 밑의 석축은 새마을사업으로 1974년에 한 것이며 동리사람 모두가 은행나무를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 우리상주의 명승고적
검 토 : 안산리 백진현
고 증 : 상주문화원 사무국장 박윤성
3. 귀목나무
고려말기 유명한 나옹대사가 전국을 떠돌다가 구미리를 지나치게 되었는데 산천 경관이 수려하여 쉬어가기로 하고, 집고 가던 귀목나무 지팡이를 마을에 꽂아놓은것이 살아나서 큰 나무로 자라났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은 마을 뒷산 약수터 옆에서 동네를 지켜 준다고 하여 매년 동제를 지내고 있으며 나무의 중심은 일제 강점기 때 미친 여자가 다람쥐를 잡으려고 불을 놓아 중심 부분은 타버리고 없어 아쉬움을 더해 주고 있으며 70년대 사방사업을 하며 비료와 복토를 주어 나무가 번성했으나 지금은 돌보는 이가 없어 세력이 약해지고 있어 주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참고문헌 :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
검 토 : 이안면 구미리 김진구
고 증 : 상주문화원 사무국장 박윤성
4. 너도밤나무
울릉도의 곳곳에는 야생 밤나무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서면에 너도밤나무의 군락이 펼쳐져 있다. 태하에서 남양으로 가는 태하재를 넘다 보면 왼편으로 너도밤나무의 군락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이 너도밤나무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이다.
이 마을에 어느날 산신령이 나타나서 마을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 산에 밤나무를 백그루 심어라. 그렇지 않으면 크나큰 재앙이 내리리라"고 엄명을 내렸다. 마을 사람들은 부랴부랴 산에 밤나무를 백그루 심고 정성껏 가꾸었다. 그러던 어느날 또다시 산신령이 나타나서 "밤나무 백그루를 심었느냐?" " 예, 어김없이 심었읍니다." "그럼 가서 세어보기로 하자" 하고 산으로 올라가 한그루 두그루 세어 나갔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분명히 백그루를 심고 가꾸었는데 아흔아홉그루 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산신령의 진노는 대단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애소에 못이겨 다시 한번 세어 보기로 하였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 아흔 여덟, 아흔 아홉......"
하는데 난데없이 옆에 서 있던 작은 나무가 느닷없이 "나도 밤나무" 하는것이 아닌가? 그러자 산신령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너도 밤나무냐?"
"예."
"틀림없이 밤나무렸다."
"예,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의 기지로써 마을 사람들은 위기를 모면하였다. 지금은 위기를 구한 너도밤나무만이 무성하게 자라 숲을 이루고 있다.
5. 당마을의 당나무
용성면 소재지 마을이 당리리이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당신에 대한 전설이 있다. 원래 이 마을의 지명은 이 마을에 한 장군의 신위를 모셨던 당이 있었다 하여 '당마을' 또는 '당말'이라 하였다는데 수년 전까지만 해도 약 300년은 좋게 넘어 보이는 느티나무가 이 지역의 수호신격으로 우뚝 서있었다.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은 옛 신라와 압독국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라는 설이 있으며 이 일대에는 각처의 무녀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굿판을 벌리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일이 있고 부터는 이 마을에 오일장이 번창하였고 장날이며 전국 각처의 장꾼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당나무는 용성지역의 송림리와 육동지역 등에 모셔진 한 장군의 사당과 연계하여 한 장군을 높이 추앙하면서 지역의 길흉화복을 위해 매년 음력 보름날에 동재를 올렸다고 한다. 이 당산나무와 관련된 전설로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올리는 당제를 게을리 하거나 성심이 부족 할 때면 반드시 마을에 큰 재앙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이로서 당리마을 주민들은 이를 두려워하며 해마다 정성을 다하여 당제를 올리었다는데, 최근 10여년전 노목이된 당산나무가 갑자기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가지가 부러지고 몸통이 스러졌었는데, 이 때 지역 주민들은 모두가 불안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으나 지역 주민들이 이곳을 다시 정비하여 그 자리에서 분생(分生)한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정성껏 보살피면서 길러 큰 재를 올렸다는 것이다.
제보자 : 용성 당리리.박경규/ 54세
필 자 : 김종국(향토사학가)
6. 당수나무 이야기
고령군 성산면 어곡 2리에 커다란 나무가 있어 여름이면 이곳에서 더위를 식히며 동리 일을 의논하는 회의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 나무를 당수나무라 하는데 이 나무의 내력은 이러하다. 아주 오래된 옛날 이 마을에 마음씨가 인자하고 인심 좋은 가난한 농부와 그와는 반대로 많은 재산과 하인을 거느린 고약한 부자가 살았다.
이상하게도 가난한 농부집에는 아주 잘 생긴 총각이 있었으며 고약한 부자 집에는 아주 예쁜 딸이 있었다. 농부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한이 되어 아들을 휼륭히 키워 자기처럼 가난하게 살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를 시켰다. 자기의 고생은 아랑곳 하지않고, 사랑하는 아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며 아들 잘 되기만을 바라고, 그것을 큰 낙으로 삼고 살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글읽는 소리가 어찌나 믿음직스럽든지 밖으로 나와 더위를 식히는데 논에서 우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혹시 아들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쫓아다니다 밤을 세운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날따라 보름달이 시원한 가을바람과 더불어 유난히도 밝게 비쳤다.
오늘도 총각은 글 읽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총각의 글읽는 소리가 멀리 부자집 귀여운 딸에게까지 들려왔다.“저렇게 낭낭하게 글을 읽는 도련님은 누구일까? 저렇게 글읽는 소리가 아름다우니 미남일 것이야.”
이렇게 생각하며 방문을 열고보니 둥근 보름달이 맑은 가을 하늘에 시원스레 떠 있었다. 처녀는 자신도 모르게 글읽는 소리를 따라 가난한 농부의 아들 글방 바로 앞에까지 다달았다. 한편 열심히 글을 읽든 총각은 인기척 소리에 문을 열고 보니 교교히 흐르는 달빛 속에 서 있는 처녀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선녀와 같은 모습이었다.
처녀 역시 생각한 대로 이 총각의 모습에 단번에 반하여 서로가 깊은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루지 못할 사랑을 알게된 양가의 부모들은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두 사람은 아무리 하여도 부모님들을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부모의 집을 떠나게 되었다.
막상 부모의 뜻을 순종치 않음이 큰 죄인 줄 알면서도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이 두사람은 마지막 부모앞에 엎드려 하직 인사를 고한 뒤 "아버지 어머니 저희들의 불효를 용서해 주십시요 저희들이 떠나면서 부모님이 보시는 앞에 나무를 심어 놓겠읍니다. 이 나무가 싱싱하게 잘 자라면 저희들도 금실좋게 잘 사는 줄 아시고, 만약에 이 나무가 말라죽으면 저희들도 죽은 줄 아십시요."이렇게 말한 후 두 사람은 떠났는데 양가의 부모는 자고 나면 나무를 쳐다보고, 무럭무럭 자라면 그들이 잘 사는 줄 알고, 시들면 걱정하며 살았다. 그리하여 정성껏 가꾸어 오랜 세월이 지나가니 오늘날의 마을 정자가 되었다.
참고문헌 : 우리지방의 민담·전설 및 지명유래
검 토 : 고령 문화원장 신용수
7. 두곡리 은행나무
은척면 두곡리의 한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이다. 옛날 강창봉이란 양반이 살았는데 손자 대에 이르러 손부인 허씨가 실명하게 되자 월선이라는 계집을 얻어 잔심부름을 시켰다. 월선이는 영리했고 열 대여섯이 되자 얼굴도 고와서 칭송이 자자했다. 그때 강참봉의 현손 한수가 월선을 연모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출타하자 월선이를 불러내어 그날 밤 빨래터로 나오라고 했다. 그날 밤 만난 두 사람은 한 쌍의 청춘남녀가 되었다. 그 후 한수를 이상히 여긴 아버지는 한수를 미행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인은 더 늦기 전에 포양 김씨댁 규수와 결혼시키자고 했다. 드디어 비극이 날, 한수의 정혼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한수조차 당일에야 알 정도였다. 월선은 한수의 행복을 빌고 홀몸이 아닌 자신과 태어날 자식의 운명을 생각했다.
며칠 뒤, 처음 둘이 만난 산기슭 소나무에 목맨 채 숨진 월선을 발견한 한수는 눈물을 흘리며 장례를 지냈다. 한수는 월선을 차츰 잊었고 아들까지 낳았다. 몇 해가 흘러 한수가 무덤에 가니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어 월선의 넋이구나 싶어 베어버리고 집에 오니 아들이 숨져 있었다. 이듬해 봄, 은행나무 밑둥에서 또 한 포기가 새로 나자 이번에도 베어버렸다. 그러자, 부인이 숨졌다.
점장이가 이는 월선의 넋이니 제사를 지내고 사후라도 월선과 부부가 된다고 하지 않으면 더한 일이 생긴다 했다. 대가 끊긴다는 말에 강씨 내외는 점장이 말대로 했다. 그 후, 두 그루의 은행나무 옆에 또 한 그루가 돋자 사람들은 월선과 죽은 뱃속의 아들과 한수 아내의 넋이라 믿었는데 세 그루는 자라면 서로 의좋게 엉켜 하나처럼 변해갔다.
지금은 450여년이 훨씬 지나는 동안에 고목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 무성함을 자랑하며 동민들은 흉년, 풍년을 점친다고 전해온다.
8. 말채나무와 마능지
청송군 안덕면의 소재지인 명당리에 말채나무와 마능지라는 곳이 있다. 무덤은 풍우로 인하여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그 유래를 지켜오는 400여년 묵은 말채나무(회나무) 한 그루가 아직도 살아남아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감당해 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임진왜란 당시 임모라는 휼륭한 장군이 있었는데 임장군이 말타기에는 타인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신기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또한 그의 애마는 예사 말과 달라서 천리를 단숨에 달려도 숨이 차거나 피로를 모르는 명마로서 한번 채찍을 가하면 전광 석화처럼 전장을 누볐으므로 멀리서 지켜보던 왜적들은 그 기세에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도 아끼고 사랑했던 자랑스런 준마는 어느 날 격전지에서 왜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게 되었다.
애마의 죽음을 너무나도 애석하게 여긴 장군은 말을 정성스럽게 안장하고, 그 무덤 가에 그 동안 말에게 휘두르던 채찍을 꽂아두었는데 놀랍게도 그 채찍이 살아서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 그 나무를 후세 사람들이 말채나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말이 죽은 위치는 현재 안덕지서의 앞뜰이라고 하며 , 장군의 거룩한 뜻과 그 애마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 당시 주민들과 합심하여 정성껏 무덤을 만들었으며, 그 무덤을 마능지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마능지와 말채나무를 아직까지 수호신처럼 섬기며 음력 정월대보름이 돌아오면 정성 들여 음식을 차려놓고, 마을의 행운과 오곡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일제 때 주재소를 마능지 자리에 짓기 위하여 말채나무를 베려고 하였으나, 도끼질을 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으므로 일경이 혼비백산하고, 그 후로부터는 소중히 관리하게 되었다 한다. 우리 후손들이 말채나무를 볼 때 그 유래를 단순히 전설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죽은 말채나무에서 잎이 피고, 꽃이 피었다 함은 우리 선구자들이 그 얼마나 애국 애족에 헌신하였는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청송군지
검 토 : 안덕면 명당리. 조용구
9. 버들이 마을 소나무
월항면 유월리 버들이와 칠곡군 약목면 영동의 금학리 사이에 있는 군경계의 장수나무 고개에 있는 노거수로 5m 상거(相距)로 상하로 두 나무가 서 있다. 높이 10m, 둘레는 위의 나무가 3m, 아래의 나무가 2m, 벋은 가지는 동서와 남북이 각 10m씩이다. 수령은 600∼700년 정도인 자연생 소나무로 추측된다.
위에 있는 나무를 수나무, 아랫쪽에 있는 나무를 암나무로 부르는데 이것은 위에 있는 나무 밑둥치의 지상 1자 되는 곳에 지름 1자 정도의 불룩한 혹이 나 있어 이를 배꼽이라하여 수나무라고 하게 되었으며 아랫쪽 나무도 역시 지상 1자 되는 곳에 지름 1자 정도의 움푹한 구멍이 나있어 암나무라고 한다.
이 나무는 고개마루에 있기 때문에 서낭당(城隍堂)의 당(堂)나무로 속칭 장수나무, 고개 이름을 장수나무 고개라 하며, 버들이 마을 주민들이 나무 주위에 돌을 쌓고 정성들여 보호하고 있다. 고개 넘어 금학동쪽에 장수샘(將帥)이 있는데 이 샘에 놋잔을 띄워서 물을 마셨으나 장수가 바위를 들어 샘을 막아 버려서 지금은 바위 밑에서 물이 흘러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일설에 전하는 말로는 중국의 장군이 우리 나라에 와서 지세를 살펴본 즉, 훌륭한 장군이 많아 나겠기에 겁을 집어먹고 장차를 위하여, 각처로 돌아다니며 지맥(地脈)을 끊어 인재(人材)의 출생을 막아벼렸는데, 여기 이 장수나무고개도 장차 큰 인물 훌륭한 장군이 나오겠기에 지맥을 끊었더니 그 끊은 자리에서 붉은 피가 솟아났으며 피가 솟던 자리에 이 장수나무 두 그루가 솟아났다고들 전한다.
10. 샛터마을 은행나무
선남면 용신리 샛터 마을 어귀에 서 있는 고목 은행나무에는 얄궂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고려 말기에 황부자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세 딸과 함께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껏 가꾸며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딸과 함께 은행나무는 무럭 무럭 자라면서 가을이면 탐스로운 열매를 맺어 주인에게 보답하였다.
그러던 어느해 겨울, 몹시 바람이 불고 진눈개비 내리던 날 저녁 우연히도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와 은행나무를 쫓고, 날아 가더니 며칠후 맏딸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신음하다가 죽었다. 맏딸을 잃은 황부자는 시름 속에 묻혀 1년을 보내던 어느날 저녁 불길한 예의 독수리가 또 날아와 은행나무를 쫓는 것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안가서 둘째 딸 곱실이가 앓아 누웠다. 백약을 다 써 보았으나 역시 곱실이도 잃고 말았다.
그런데 기이한 일은 곱실이 병든 날이 전에 죽은 맏딸 병든 날과 똑같이 동짇 날이었다. 딸 둘을 잃고 난 황부자는 거의 실신한 사람처럼 나날을 보내다가 괘씸한 독수리를 잡을 것을 생각하고 방을 써 붙였다. 독수리를 잡는 사람에게는 세째 딸과 혼인시킬 것은 물론 재산을 다 물려준다고 했다.
그러나 이와같은 방을 써 붙인지 여러날이 지나 동짇날이 가까워 와도 누구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더욱 근심을 하게 된 황부자는 동짇날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동짓날 오후 늦게 보기에도 추하게 생긴 더벅머리 총각이 황부자를 찾아 왔다. 독수리를 잡는다는 것이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도 잡는다는 말처럼 황부자는 우선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 대접을 후히 받은 총각은 활과 화살을 받았다. 그러나 무슨 궁리도 하지않고 비워 준 사랑방에서 세상 모르게 한잠을 자고 나서 태어나서 한 번도 쏘아 보지 않은 활이기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생각 끝에 황부자에게 부탁하기를 오늘밤은 날이 샐 무렵까지는 아무도 밖을 내다 보아서는 안된다고 일렀다. 이야기 인즉 "내 활은 신궁이라 다른 사람이 보면 안됩니다. 만약 보게 되면 딸은 죽게 됩니다."
자정쯤 되었을 때 총각은 마루 밑에 숨겨둔 삿갓을 쓰고는 있는 힘을 다해 높은 은행나무 꼭대가까지 올라갔다. 눈보라가 치며 매운 바람이 불어 총각의 손발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러나 꾹 참고 독수리 오기를 기다렸다. 조금 있으려니 과연 세차게 날개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독수리가 머리 바로 윗가지에 앉았다. 총각은 삿갓 꼭대기의 뚫어놓은 구멍으로 손을 뻗혀 독수리의 억센 다리를 죽을 힘을 다해 잡았다. 하마터면 나무에 떨어질 것만 같았으나 놓치않고 간신히 내려와 나무 밑에 놓아둔 화살로 눈을 궤어 죽인 후 그대로 놓아 두고 방으로 가서 잠을 잤다.
이튿날 날이 밝아 황부자가 밖을 내다 보니 큰 독수리가 눈에 화살을 맞아 꿰인 채 죽어 있었다. 반가움에 눈물을 흘리었다. 눈을 뚫은 명사수 총각과 딸을 혼인 시키고 재산을 다 물려주어 이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참고 문헌 : 영남의 전설
검 토 : 성주문화원장
11. 신기리 느티나무
청송군 파천면 송강초등학교에서 남동쪽으로 700m쯤 가면 속칭 새터라는 자연촌락이 있다.
이 마을 어귀에는 동네 길흉을 알리며, 300여년을 동민들과 고락을 함께한 느티나무가 있다.
219평의 널찍한 대지 위에 둘레 7.3m, 높이 15m의 이 느티나무는 안동 장(張)씨의 시조가 심었다고 한다. 한아름이 넘는 가지 12개가 사방으로 뻗어 그 자세가 늠름하여 마치 수호신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으며 마을사람들도 정성을 다하여 보호하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1968년 천연기념물 제1928호로 지정되었다.
화창한 어느 봄날 머리가 번쩍번쩍하는 대사 한 분이 이 느티나무 밑을 지나가다가 쉬어가게 되었다. 이때 마침 동네 노인들이 모여 앉아 장군, 멍군하며 한가로이 소일하고 있었는데 멀찌감치 앉아있던 이 노승이 누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허허, 큰 일이구나. 작년에는 괜찮더니 올해는 꼭대기만 돋았구나. 시주 인심이 나빠지기 전에 절 곳간에 양식준비를 해야겠구나. 쯧쯧...." 하며 고개를 내젓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겨진 노인 한 분이 대사를 돌아보며 이 나무에 무슨 사연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대사의 말인즉 '이 느티나무는 신기동 새터마을의 길흉을 알려주는 거룩한 나무인데 잎새에 따라 기후에 변동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는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해마다 봄에 잎이 피어날 무렵이 되면 노인들은 나뭇잎이 피는 과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잎이 아래윗 가지에 동시에 피어나게 되는 해는 알맞은 강우로 모내기가 순조로워서 그 해에는 풍년이 되고, 아래나 위쪽의 그 어느 한쪽 가지부터 잎이 피게 되면 그 해는 반드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모내기를 제대로 못할 뿐더러 흉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대사는 자연의 이치에 능통했던 것이리라. 지금도 이 마을 사람들은 새싹이 틀 무렵이면 이 나무를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있다고 하는데 올해는 아래 위쪽 새싹이 동시에 돋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 청송군지
검 토 : 파천면 신기리. 황문현
12. 영험 있는 잣나무
부계면 대율리에 9대째 글로써 이름 높은 홍인규라는 사람이 살았다. 어느 해 이 집안의 자제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떠난 후 풍수장이가 찾아와서 조부와 풍수지리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본래 이곳은 신령스러운 봉우리의 뒤에 위치하여 음기를 띠고 있어 나무를 심지 말아야 하는데, 나무를 심어 음기를 더하고 있으니 마당에 있는 잣나무를 베어야 합니다." 하며, 마당에 서 있는 오래 된 잣나무를 가리키며 말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과거 보러 간 손자의 조부는 손자를 생각하고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소?" 물으니 "나무의 윗부분을 잘라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둘러 오래된 잣나무 윗부분을 끊어 버렸다. 며칠 후, 과거 치르러 간 손자가 과거 시험은 보지 않고 집에 돌아왔다.
"도대체 어찌하여 과거는 치르지 않고, 돌아왔느냐?"물으니 과거보기 전날 꿈자리가 몹시 뒤숭숭하고, 이튿날 과거장에 들어가니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조부가 생각하니 잣나무를 벤 그 날과 같은 때이므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며 풍수장이가 영특스러운 점이 있구나 생각하였다. 이 후, 이 집안에서는 그 오래된 잣나무를 베지 않고, 그대로 두어 지금도 윗부분이 잘라진 채로 마당에 서 있다. 그리고 큰 벼슬은 아니했으나 이 집안은 9대째 글로써 유명하며 대를 이은 전통이 남다른 면을 갖고 있다.
참고문헌 : 군위향맥
13. 오유리의 등나무 전설
옛날 서라벌 점량부 현실 냇가에 한 농가가 있었다. 그 착한 부부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언니는 홍화요, 동생은 청화라 하였다. 청화는 그림자처럼 언니 홍화를 따라다니며 둘의 정이 극진했다. 자매가 각각 18세 16세가 되었을 때 무슨 일이나 비밀없이 서로의 일을 다 알고 있었지만 누구하고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연인에 대한 일만이 몰래 숨기고 있었다.
신라인들은 정월대보름 가을 한가위(8월 한가위)날을 맞이하면 갖가지 행사를 즐겼다. 남자들은 씨름, 활쏘기, 말달리기, 줄다리기 등 힘찬 경기를 하고 여자들은 그네뛰기, 술레돌기, 베짜기 등의 내기 놀이를 즐겼는데 이럴 때면 처녀 총각들이 서로 놀이도 구경하기고 하고 응원하기도 했다.
두 처녀는 지난해 추석날 말달리는 경기장으로 구경갔다가 믿음직스럽고 늘 미소를 머금은 젊은 낭도의 모습을 보고 같이 사모하게 되었다. 두 처녀의 마음속에 그 늠름한 낭도의 모습이 똑같이 사랑으로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화는 청화대로 홍화는 홍화대로 그 자매의 마음속을 모르는체 그 청년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삼국시대 말경 국경에는 싸움이 없는 날이 없었다. 북에는 고구려 서에는 백제가 침입해 오고 때로는 일본 해적들이 노략질하니 신라 청년들은 전투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드디어 큰 전쟁이 일어났다. 서라벌 청년들은 일제히 전장으로 나가는 길 양옆을 전송하는 일가 친척들과 이별을 서러워하는 애인들로 차 있었다.
혹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연인을 위하여 홍화와 청화는 꽃다발을 들고 나왔다. 두 자매의 언니도 아우도
"언니도 애인 있었소?"
"너도 애인이 있었니?" 물으면서 서로 자기의 애인 인줄을 몰랐다. 홍화와 청화가 기다리던 그 청년이 꿈에도 잊지 못하던 인상적인 미소를 띄우고 나타났다. 두 개의 꽃다발을 받아 말안장에 얹고 미소를 지우며 두 형제에게 답례하고 떠나갔다. 그러나 두 형제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이 기구한 운명을 어떻게 해치고 나갈까? 생각했다.
"언니! 이제부터 나는 그 사람을 잊을게 안심해요. 응?"
"잊어버린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냐. 내가 잊어버려야지. 너에게 불행한 아픔을 안긴데서야 어찌 언니라고 할 수 있겠느냐." 고 서로를 위로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청년이 전사했다는 슬픈 소식이 날아왔다. 청화와 홍화는 남의 눈을 피해 둘이서 언제나 같이 놀던 호숫가에서 하늘을 우러러 원망하며 울었다.
그리고 둘은 꼭 껴안은 채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괴롭고 아픈 사랑을 잊으려고 꽃같은 생명을 던져버렸던 것이다. 고운 두 생명이 어찌 덧없이 사라지랴. 두 영혼은 못가에 등나무로 태어났다. 그 등나무는 그루가 둘인데 줄기는 하나로 연결되어 많은 가지가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타고 뻗어 올라 하늘을 덮었다.
나라에서는 기념물 제78호로 지정하였고 홍화의 붉은 빛과 청화의 푸른빛이 섞인 보라빛으로 인간계에서 웃어보지 못한 웃음을 누리고 있다.
누구의 말에선가
"이 등꽃을 따서 말려 벼게속에 넣어두면 금실이 좋고 이별이 없다한다."
이 등나무는 경주시 현곡면 오유리에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건곤이룡지수목(乾坤二龍之樹木)이라 부른다.
자료출처: 신라의 얼(내고장 전통가꾸기), 월성군
14. 왕버들과 소나무
옛날 채씨 성을 가진 과년한 처녀가 백전마을에서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나라에서는 의병을 모집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처녀가 모시는 60이 넘은 아버지에게 출병 영장이 나와 기가 막혔다. 나라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국민이 도와야 함은 당연하나 문밖 출입도 겨우하는 노쇠한 아버지를 출정하라니 참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렇다고 딱한 사정을 의논할 사람도 없고, 수심에 잠겨 있던 중에 한 마을에 살고있는 젊은 일꾼이 처녀집에 찾아왔다. 그는 이웃에서 평소 채씨 처녀의 미모와 정숙한 마음가짐을 머슴살이의 신분답지 않게 오매불망 사모해 왔던 터라서 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해 보기로 했던 모양이다.
노인에게 정중한 인사를 하고는 찾아오게 된 뜻을 노인과 처녀가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머슴치고는 정말, 말에 조리가 있고, 언변이 출중하였다. 노인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옆에서 듣고 있던 처녀가 얼마나 감동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 너무나 감동한 처녀는 개선하여 돌아오면 이 총각과 백년 가약을 맺을 것을 아버지의 허락 받고 약속했다.
총각이 평소 처녀에 대해 어떤 지나친 생각을 품었던 간에 처녀의 생각은 이렇게 어려울 때 죽음의 전쟁터에 대신하는 것이, 그 얼마나 진실 되고, 고귀한 사랑의 마음이랴 싶었다. 십년이 가든, 이십년이 가든, 오직 한마음으로 총각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기로 굳게 결심했다.
출정하는 전날 밤, 두 사람은 앵두나무 우물가에서 남몰래 만나 총각이 어린 나무 한 그루를 처녀에게 보이며 이 나무를 우물가에 심어놓고 가겠으니 날 보듯 고이 길러 달라고 했다. 그녀는 약혼자가 떠난 뒤 매일 나무에 물을 주고, 정성으로 보살폈다.
처녀의 총각 기다리는 마음은 날마다 한결같았으나, 달이 가고, 해가 가고 산천 초목 다 바뀌는 3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고, 전쟁도 이미 끝났는데 기다리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딸이 너무나 안타까워 네 장래를 위해 마음을 고쳐 먹으라고 타일렀으나 처녀는 아버지의 생각과 달랐다.
그녀는 아버지를 위해 대신 죽어간 사람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굳은 신념을 가져, 그러한 일편단심은 그 누구도 흔들지 못했다. 그러나 처녀의 아버지는 또 다른 사람과 정혼하여 이 사실을 안 처녀는 약혼자가 심어놓은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슬픔에 젖어,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임은 가고 없어도, 그때 심어 놓고 간 왕버들은 잘도 자랐다.
드디어 내일로 혼인날이 다가오고, 최후의 그 순간까지 약혼자가 돌아오기만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단념하고, 야밤중에 아버지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불효한 이 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명주수건으로 약혼자가 심어놓고 떠난 왕버들 가지에다 목을 메고 자결하였다. 그녀가 죽은 얼마 후 버드나무 옆에 소나무 한 그루가 싹터 올라왔다. 동네 사람들은 그 소나무는 처녀의 일편단심 님만을 기다리던 그리움에 사무친 넋이라 하였다.
지금도 왕버들 옆에 노송 한 그루가 서 있으며, 이 왕버들은 천연기념물로, 소나무는 청송군 보호수 제1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 청송군지
검 토 : 파천면 관리. 심상호
15. 용계동의 은행나무 살린 처녀
원 용계에 처음에는 탁씨가 살았다 그래. 다래 몽두리(몽둥이)를 치고 깊은 산 속에 나무를 쳐내고 살 때에는 그러니까 은행나무 서 있는 곳이 집터였어. 그 집에 딸이 하나 있었는데, 건바골 들어가는 건너편에 등성에 묘가 있네. 그 은행나무 세운 처녀 묘가 있어 탁씨네가 현재 제사를 지내고 있거든. 어느 날에 처녀가 강가에 있는 하얗게 까놓은 은행나무가 물에 둥둥 떠서 내려오거든. 그래 처녀가 하도 이상해서 그 나무를 주워서 부뚜막에 요래 파고 묻어 놓고 자꾸 물을 주었다 이게라. 물을 자꾸 주고 정성을 들이니 은행나무가 살았어. 촉이 올랐는데 차차 키웠어.
그리고 용계에 권씨네도 들어오고 이씨네도 들어오고 하다가 탁씨네는 가세가 없어져 물러갈 정도가 됐는데, 한 날에 꿈에 마을 상노인에게 처자가 현몽을 하는데,"내가 저 건네 은행나무 살린 처년데 날 이 동네 성황으로 세워주면 이 동네를 편안하그러 해주겠다."고 요청하는게라. 상노인 한 사람뿐만 아니라, 동네 몇 사람에게 그랬든 모양이래. 그래서 용계 그 당 나무가 처녀 땅이 된게라. 밑에는 애기당이, 원 당이 옆에 있는데 당에는 고리짝에 치마하고 저고리하고 한 벌이 보쌈에 들어있어. 당 주위에는 돌담을 해놓고 언제든지 정월 열 나흗날 수리할 때, 정월 보름날 제사지내거든, 수리할 때 그 안에 들다보고 버들가지로 만든 고리가 있는가 없는가 들다보고 확인하고 수리하고 그랬지.
그 옛날에는 제사 지낼 때 어떻게 하는가 하면, 나락을 그 날 찧어서, 떡을 하거든. 가령 오늘 제삿날이면, 오늘 멍석에 널어놨다가 그대로 쪄 가지고 떡과 밥을 해서 제사를 지냈는데 무심코 새가 고걸 먹으면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그래요. 인제는(지금은) 청년들이 제사를 안 지낼라 카는게라. 귀찮거든. 정월 열 하룻날에 공사해서 3일 기도를 하는게라. 기일을 해 가지고 제사를 올리기 때문에 그래. 그러니 동네 청년들이 모두 귀찮다고 그만 둘라 캐.
자료출처 : 경북관광개발공사
16. 운곡서원 은행나무
운곡서원 앞에 있는 은행나무 죽림 권산해(竹林 權山海)의 후손인 권종락(權宗洛)이 단종때 절신인 죽림(竹林)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서울을 왕래할 때 순흥에 있는 큰 은행나무 가지를 꺾어다 심은 것으로 6월 염천에 한 달만에 갖고와 심었는데도 살아나 지금과 같은 거목이 되었다 한다.
본래 순흥부 객사 근처에도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단종 2년(1454) 원인 모르게 고사하였다. 향인들이 놀라 점괘를 뽑아 보았더니 "비수복생 흥천가복(比樹復生興川可復)" 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뜻을 몰랐더니 그 후 단종이 폐위되고, 육신사건(六臣事件)이 일어났으며 이 고을 부사인 이보흠(李甫欽)이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죽고, 순흥부는 폐하여 풍기군에 예속되었다.
그 후 숙종이 즉위(1675)하자, 이 은행나무가 200여년 만에 다시 소생하더니 이어 단종도 복위되고, 육신과 금성대군, 이보흠도 다 신원되었으며 순흥촌도 다시 회복되었다. 이에 이 고을 사람들이 이 은행나무 밑에 금성단를 설치하고, 단종 때 충신들을 제향하였다 한다.
권종락 역시 이 은행나무가 단종과 관련해 영험이 있다 하여 이 나무에서 빌고, 죽림공의 신원을 얻었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이 나무가지를 꺾어와 심었다하며 당시 성균관에서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진사 기(耆)가 압각수기(鴨脚樹記.은행나무 별명)를 지었다 한다.
전 승 자 : 강동면 마을주민 일동
검 토 자 : 향토사학자 김태중
17. 율현 느티나무
임진왜란 이후 한양에 살던 이한춘이라는 선비가 이곳에 들어와 마을을 개척할 때 집 뒤에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자라서 큰 그늘을 이루었다. 아이들은 언제나 이 나무그늘밑에 모여 놀았다. 수령이 오래되어 고목이 되어 버린 느티나무에는 크다란 구멍이 났고 어느 날 다람쥐 한 마리가 이 구멍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본 아이들이 다람쥐를 잡기 위해 나무 구멍 앞에 불을 놓고, 다람쥐가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느티나무 중심목에 불이 붙어 며칠을 탔다고 한다.
불이 꺼지고, 연기가 사라진 뒤 나무 꼭대기에는 다람쥐가 아닌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죽어 나뭇가지에 걸쳐 있었다고 하며, 중심목이 다 타버린 나무는 껍질만 덩그렇게 남아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잎을 피우지 못한 채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나무를 보살피고, 가꾸어 죽은 나뭇가지에서 다시 새순이 돋아났다고 한다.
이후부터 봄에 느티나무 잎이 무성하면 흉년이 들고, 잎이 적으면 풍년이 들어 사람들은 나무를 숭배하고, 떨어진 나뭇잎까지도 절대로 태우지 않는 등 소중히 다루고 있다.
참고문헌 : 구전전설
검 토 : 화서면 율림리. 이성복
고 증 : 상주문화원 사무국장 박윤성
18. 이팝니무 설화
이팝나무가 쌀밥과 인연을 맺은 이유는 어떤는 어떤 며느리의 한 서린 서러움과 죽음 때문이다.
옛날 경상도 땅에 어린 나이로 시집온 착한 며느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시시콜콜 트집을 잡으며 며느리를 못살게 굴었다. 한 번은 큰 제사가 있어 제사에 쓸 쌀밥을 짓게 되었다.
평소 잡곡밥만 짓던 며느리가 모처럼 쌀밥을 지으려니 혹 밥을 잘못 지어서 꾸중을 듣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뜸이 잘 들었는지 알아보려고 몇 개의 밥알을 떠서 먹어 보았다. 그 광경을 본 시어머니는 제사에 쓸 메밥을 며느리가 먼저 먹었다고 하며 온갖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자 억울함을 견디지 못한 며느리는 어느 날 뒷산으로 올라가 목을 매 죽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 며느리가 묻힌 무덤가에서 나무가 자라더니, 흰 꽃을 가득 피워 냈다. 쌀밥에 한이 맺힌 며느리가 죽어서는 나무가 되었다며 동네 사람들은 그 나무를 이팝나무라 불렀다.
19. 인지리 떡갈나무
이 떡갈나무는 현동면 인지리 속칭 손달이라는 마을앞에 위치하고 있다. 나무 둘레가 3m, 키는 20m이다. 누가 심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령이 300년이 된다고 한다.
옛날 이 마을에 조씨 성의 효자가 살고 있었다. 이 효자의 아버지가 불치의 병에 걸려서 백약이 무효였다. 그러나 조씨는 좌절하지 않고, 일편단심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좋다는 약은 다 구해 드리고, 노심초사 하다가 그것도 잘 안되니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이 떡갈나무 밑에다 정화수를 떠놓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시각이 되면 온 정성을 다 하여 천신께 기도를 드렸다.
100일째 되던 눈오는 날 밤, 기도를 다 드리고, 집에 돌아와서 자리에 누웠으나 근심이 태산 같았다. 백일을 기도했으나 아버지의 병환은 차도가 없으니 너무나 답답한 심경이었다. 이 생각 저생각 궁리를 하다가 잠이 들어 버렸는데 지성이면 감천인지,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길다란 흰 눈썹에 얼굴은 동안(童顔)이나 수염은 관운장같은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조씨에게 이르기를 이 마을 뒷산에 올라가면 산 중허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밑에 천년 묵은 동삼이 있으니 지체말고 가보라고 했다.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는 그 노인의 말이 너무나 생생하여 이는 신령님의 도움이라 깨닫고, 지체 않고 산에 올라갔다.
산중턱 바위 밑에는 과연 큰 산삼이 있었다. 이 겨울에 웬 산삼이냐, 그는 너무나 기쁘고, 감동하여 '심봤다!'를 외치고, 꺼질세라, 다칠세라, 정성 들여 캤다. 산삼을 다려 드린 후 그토록 중하던 아버지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 후, 효자는 현몽하던 그 날을 잊지 않고, 해마다 신령님께 제사 드렸다고 한다.
원래, 떡갈나무는 느티나무와 같은 거목이 드문데 이 마을의 떡갈나무는 보기 드물 정도로 거대하다.
그 후, 마을 사람들도 집안에 액운이 생기거나 소원이 있을 때에는 때를 가리지 않고, 나무에다 금줄을 드리고, 음식을 차려 제사를 드리며, 어린이들이 나무처럼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게 해달라고 돈을 나무에 바치고, 아이도 나무에다 파는 속신을 갖추기도 하니, 이 나무는 이 마을(인지리)의 재난과 행운을 가져다 주는 신목이라 하고 있다.
20. 정기 잃은 노가주나무
옛날에 평해 황씨(平海 黃氏)들이 지금의 미성 2리에 부석(浮石)라는 마을을 개척(開拓)하였다. 당시 우보면 모산리에서 돌이 날아와 이 곳 뒷산에 떨어졌다하여 이 곳을 부석(浮石)이라 칭하였다. 부석 뒷산에는 노가주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이 나무의 형태는 삿갓을 거꾸로 놓아둔 형상이며 이 나무가 왜 이런 형상을 하는지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을 정벌하러 온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우리나라 지기를 끊기 위해 산허리를 자르고, 땅에 말뚝을 박던 중 이 곳에 와 이 나무를 잘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나무의 모양은 삿갓을 엎은 모양이 되었고, 기를 빼앗긴 나무는 크기와 굵기가 잘린 그 당시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한다.
전 승 자 : 우보면 미성2리. 박호근(55세)
21. 조산단의 느티나무
영양읍에서 남쪽으로 1Km쯤 되는 지점에 사람의 힘으로 만든 산이 있다. 그 규모는 작으나 이를 조산단(造山壇)이라 부르며, 여기에 한 그루의 오래된 느티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풍수지리설을 믿어온 조상들은 읍민들의 재난을 막아주는 신목(神木)이라 했으며, 지금도 음력 정월 대보름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영양읍은 동쪽과 북쪽, 그리고 서쪽으로는 아담한 산맥이 둘러있어 좋은 형상을 이루고 있으나, 남쪽으로는 가까이 울타리가 될 만한 산이 없을 뿐만 아니라 거도형(擧刀形) 산이 두 곳으로, 필수골 입구 남쪽 칼등과 양평 남쪽 칼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화기(火氣)를 품은 산이 마주보고 있어 읍민들에게 액운을 가져 다 줄 형상이라 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재난을 예방하기 위한 노력으로, 삼백여년 전 인위적으로 산을 만들고, 그 주위에 소나무를 가꾸고, 단에는 느티나무를 심어 울타리로 삼았고, 화산인 향로봉의 화기는 매년 정월 대보름 날 산꼭대기에 소금을 묻어 해소시키고, 팔수곡 입구 남쪽 칼등의 액운은 길목에 도축장을 설치하여 방지하였다고 한다.
1940년대 조산단 부근에는 강변을 따라 늘어선 노송과 함께 느티나무가 좋은 울타리였으나 지금은 느티나무만 홀로 남아 거도산의 재난을 막아 주는 읍민의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다.
여름철 울창한 느티나무 그늘은 오가는 행인들과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22. 청복 느티나무
예천읍 청복1리 도리촌에 마을이 개척(1417년경)될 때부터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장정 3인의 팔둘레로 3아름이나 되고, 단오 때에는 그네를 매었으며 음력 7월 13일에는 풋굿놀이도 하며, 놀았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나무 중앙에 장정 1인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생겼는데, 주민들이 이 구멍에 음식을 넣어 제사를 지내면 나무에서 음식먹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나무에서 음식먹는 소리가 나면 1년 농사가 대풍이고, 마을에 아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나무라고 믿었다고 한다.
이 큰 느티나무는 계속 보존되다가 1920년 경에 불타버리고, 지금의 나무는 그 터에 생긴 제2세의 느티나무인데 마을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또한, 매년 정월 보름 전날밤 이 나무에서 동신제를 올려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전승자 : 예천읍 청복1리. 윤남노
고 증 : 예천군 향토문화연구원. 장병창
23. 풍흉을 점처주는 느티나무
의흥초등학교에서 남쪽으로 약 300m 쯤 되는 곳에 배일(현 읍내리)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입구에 둘레 약6m 높이 약19m나 되는 느티나무가 약30여평의 그늘을 만들어 주며 우뚝 서 있다.
이 나무는 1510년(중종 5년)경 밀양 박씨가 이곳에 5그루를 심었는데 모두가 똑같이 크게 자랐다. 일정시대 군함을 만드는 목재로 쓴다고 하면서 3그루를 베어가고, 지금은 2그루만 남아 있다. 옛날 이 나무 아래서 여러 노인들이 쉬고 있었는데 마침 허수룩한 승복을 입은 중이 지나다가 이 나무를 보고
"허허 그 나무 참 신기하구먼! 꼭대기에만 잎이 나고 아래의 생생한 가지엔 잎이 나지 않았네." 하며 중얼거렸다. 노인들이 이상하게 여겨
"여보시오 무엇이 어떻다는 말이오?" 하고 캐물으니" 이 나무를 보시오. 이 나무는 이 배일 마을의 재해(災害)를 막아 주고, 풍흉(豊凶)을 점쳐 주는 거룩한 나무요." 하고 떠나 버렸다.
해마다 날마다 동네사람들이 이 나무 아래에 모여 놀면서도 나뭇가지에 잎이 나는 줄도 모르고 지냈는데 스님(大師)의 말을 듣고, 유심히 살펴보니 과연 신기하게도 대사의 말이 어김없이 맞았다. 나뭇잎이 아래위 한꺼번에 움트는 해는 비가 많이 와서 모내기를 한꺼번에 하여 풍년이 되고, 아래위 어느 한쪽만 먼저 나게 되면 가뭄으로 흉년이 되었다.
그 후부터는 해마다 이 나무에 농사의 운명이라도 건 듯이 나뭇잎을 쳐다보며 한꺼번에 잎이 나기를 바란다. 지금도 해마다 정월 보름날에 모든 사람들이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언행을 조심하며 정성껏 이 나무에 동제를 지내는데 풍년이 들기를 빈다.
참고문헌 : 군위향맥
24. 향나무
청송군 소재지를 중심으로 해서 삼각형으로 세 곳에 향나무가 심어져 있으니, 여기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향나무가 심어진 위치를 보면 군소재지인 월막리를 중심으로 모두가 500 ~ 700m이내에 비슷하게 자리잡고 있으니 달기 약수탕으로 가는 도로변, 대구로 가는 금곡1리와 의성으로 가는 덕리 앞 속칭 밤밥들에 심어진 것이 그것이다.
이 세 곳의 향나무가 심어진 연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마 300여년 전에 심어졌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금곡1리가 조선 때에는 큰 마을로 형성돼 있었다고 한다. 그 마을에는 파평 윤씨가 집단으로 거주하였는데 윤씨의 세도로 인하여 원님들이 기를 펴지 못했다 한다.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은 분이 청송부사로 부임하였다. 그 원님은 전임 원으로부터 지방 실정을 자세히 들은바 있는지라, 어떻게 하면 금곡1리 윤씨들의 세력을 꺾을 수가 있을까 생각하던 어느 날, 뒷산에 올라가서 금곡리 지리를 자세히 살펴본 즉, 금곡리는 배가 항해하는 혈(穴)이라서 외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곳에서 힘을 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기 혼자만 풍수학 이치를 알고, 동, 남, 북 세 곳에다 향나무를 심었으니 이는 전진하는 뱃길을 꺾는 것으로써 원은 윤씨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소신껏 고을을 다스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달기약수탕 가는 도로 좌측에 있는 향나무에는 주인을 위해 죽은 충직한 소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약 200년 전 향나무 밑에 금잔디가 깔려서 농부들이 화목(火木)을 하러 가는 길에 이곳에 모여서 지게목발을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씨름판을 벌리기도 하는 곳이다.
어느 겨울철, 여느 때와 같이 농군들이 산에 올라가는 길에 향나무에다 소를 매고, 한판 씨름승부에 열중하던 중 앞산에서 갑자기 여산 대호 한 마리가 나타나서 산천이 떠나가도록 포효를 하며 세 사람을 바라보면서 금새 달려들 기세였다. 그들은 갑자기 닥친 수난에 떨고만 있다가 사태의 위급함을 직감하고, 그 중 한 사람이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자고로 옛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호식할 팔자는 웃저고리를 벗어서 호랑이 앞에 던져보면 안다고 하니, 무서워 말고 우리 옷을 한번 던져보자" 고 했다. 그래서 저고리를 벗어서 한 사람씩 차례로 호랑이를 향해 던졌더니 호랑이는 맨 마지막에 던진 사람의 것을 앞발로 끌어 당겼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동료 한 사람을 남겨 두고, 황급히 그곳을 피해 버렸다.
호랑이 앞에 홀로 남게 된 농군은 생각하기를 기왕 호랑이 밥이 될 바에야 죽을 용기를 내어 싸워나 보자고 결심을 하고는 황소 뒤에 은신하면서 소 고삐를 풀고, 질 매를 내리니, 소도 주인의 위기를 깨닫고, 뒷다리 사이에 매달리라는 시늉을 했다. 주인이 급히 소의 양다리 사이에 매달렸다. 소가 우렁찬 고함을 지르며 전투태세를 취하니 그 늠름한 자세는 정말로 믿음직스러웠다.
드디어 호공과 우공의 처절한 투쟁이 벌어지니 이는 주인을 보호하려는 의리 있는 황소와 식욕을 충족하려는 호랑이의 처절한 대결이었다. 얼마가 되었는지 주인이 정신이 들어서 자세히 사면을 보니 소뿔에 떠 받힌 대호는 피투성이가 되어 이미 사지를 뻗고 죽어 있었고, 황소 역시 상처투성이에 너무나 지쳐 있었다. 간신히 집에 몰고와서 온갖 정성으로 간호하였으나 사흘만에 죽고 말았다.
주인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다가 희생된 갸륵하고 고마운 황소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 는 명주 한 필을 싸서 소의 시신에 입히고, 사람과 다름없는 예식을 갖춘 후 양지 바른 산을 택해서 정성껏 묻어 주었다고 한다. 물론 호랑이 껍질은 팔아서 나랏님께 진상하여 칭찬을 받고, 뼈와 기름은 호고환(약)을 만들어 팔고, 오래오래 잘 살았다고 한다.
참고 문헌 : 청송군지 출전기재
검 토 : 청송읍 월막리. 윤승창
25. 흥해읍 회나무 전설
영일군 의창읍을 흥해읍이라고도 하는데 이 흥해읍의 제남헌과 우시장 골목 망천동 일대에는 옛날에 회나무가 무성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몇 그루 남아 있다.
그런데 흥해읍의 회나무는 옛부터 내려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니......
조선 초엽 당대에 유명한 풍수 이성지라는 사람이 영남지방의 동해안 산세와 지형을 답사하기 위하여 비학산에 올라서서 이 고을 즉 흥해읍의 지형을 살피고 나서, 「오래오래 영원히 번창할 터지만 나병이 많아 사람이 살 곳이 못된다」고 한탄 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흥해 군수는 마을유지들과 함께 풍수쟁이 이성지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나병을 막아 번창할 수 있을까 하고 물으니, 「흥해는 옛날 선사시대 큰 호수였는데 동쪽 낮은 쪽의 산맥을 끊어 호수의 물을 흐르게 하고 사람의 힘으로 평야를 만들어 한발이 심하지 않은 것은 좋으나 습기가 많고 바람이 많고 물이 많아 이것이 폐가 되어 앞으로는 나병을 막으려 하면 집집마다 한집도 빠짐없이 회나무를 심고 다른 곳에도 회나무를 많이 심으면 나병의 발생을 막을 수 있다고 하며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회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4∼5배의 수분을 빨아 올려 지하의 수분을 제거하며 위로는 해풍과 습한 바람을 막아 이 고을 나병을 막아줄 것이라 일러주었다 한다.」
이때부터 흥해 고을 군수는 이유 없이 집집마다 회나무를 심도록 했으며 공지나 언덕바지에도 회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하다.
이 때문에 흥해 고을은 다른 지방 보다 회나무가 월등하게 많았으며, 이 회나무를 심기 전에는 다른 지방보다 나병 환자가 월등하게 많았는데, 회나무를 심고 난 후부터는 회나무의 덕택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나병환자가 점점 적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26. 감나무 1
옛날 남부 지방의 깊은 산에 집채만한 호랑이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 그 호랑이는 낮에는 종일 낮잠만 자다가 저녁 때가 되면 부시시 일어나 산이 찌렁찌렁 울리도록 큰 울음소리를 내어 호기를 부리곤 했다.
하루는 잠에서 깨어난 호랑이가 먹을 것을 찾아 어슬렁어슬렁 산기슭을 타고 내려 갔다.
호랑이가 마을 어귀에 들어섰을 때 마침 외딴집이 한 채 있었다. 집안에서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랑이는 울타리 밑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집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펴 보았다.
희미한 불빛이 창문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방안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어머니의 그림자가 문에 어른거렸다. 그때 무슨 일인지 갑자기 아기가 요란스럽게 울었다. 어머니는 우는 아기를 달느라고 진땀을 흘리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호랑이는 자기가 온 것을 알고 아기가 겁에 질려 우는 것인 줄 알고 속으로 스스대었다.
아기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짜증을 내면서 말했다.
"얘가 왜 이럴까? 어디 배가 아프냐?"
어머니는 젖꼭지를 애기 입에 물리고 배를 쓰다듬어 주었지만 아기는 더 큰 소리로 울 뿐이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저것 봐! 귀신 할멈이 나온다."하며 달랬으나 아기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저기 곰 나오겠다." 하였으나 아기는 여전히 울기만 했다. 어머니는 참다 못하여 이번에는 손으로 창문을 두드리면서 "바깥에 어비야 온다. 어비야." 하면서 아기의 몸을 흔들어 댔지만 그래도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마침내 방문을 활짝 열었다 꽝 닫으면서 "저기 보아라 울타리 밑에 송아지만한 호랑이가 종발 같은 눈에 불을 켜고 앉아 있다. 우는 아이 잡아가려고 한다. 큰일났다! 어서 뚝 그쳐." 하면서 "이놈! 우리 아기 울지 않는다. 썩 물러가라!"고 큰 소리를 치며 호랑이를 쫓는 시늉을 하며 얼러댔으나 아기느 ㄴ더 크게 울 뿐이었다.
호랑이는 아기의 어머니가 자기가 온 것을 알고 그러는 줄로 생각했다. 호랑이는 귀를 바싹 기울였다.
어머니는 "허허, 참 큰일나겠다. 여기 곶감이 있다. 곶감, 곶감." 하면서 일어나더니 시렁에서 무엇인가를 내려서 아기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제서야 울던 아기는 울음을 뚝 그쳤다.
이 모습을 본 호랑이는 겁이 잔뜩 났다.
'이상하다. 저 아기가 귀신 할멈, 어비야도 무서워하지 않고 심지어는 산중의 왕인 나도 겁내지 않더니 곶감이라는 말에 겁을 덜컥 내고 울음을 그치니 도대체 그 곶감이란 놈이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모르겠다. 여기 잘못 얼씬대다가는 큰 변을 당하겠구나. 도망가서 몸을 안전하게 숨기고 이 집에는 다시 오지 않는 게 상책이겠다.'
호랑이는 이렇게 생각하고 부리나케 달아났다.
27. 개나리
옛날 인도에 새를 좋아하는 공주가 있었습니다.
공주는 예쁜 새란 새는 모두 사들여서 궁전 안은 마치 새의 천국 같았습니다.
공주는 새들과 함께 어울려 시간 보내는 것을 낙으로 삼았습니다.
공주가 새를 좋아하니까 신하들은 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예쁜 새를 구하느라 바빴습니다.
공주의 마음에 드는 새를 바친 사람은 출세하였습니다.
신하들은 백성을 보살피는 일은 안중에도 없고 '어떻게 하면 공주에게 예쁜 새를 구해다 바칠 수 있을까?'만 궁리했습니다. 신하들이 이 꼴이니 나라 살림이 잘 될 턱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가난에 찌들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쳇! 차라리 새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공주에게는 아주 아름다운 새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주가 갖고 있는 어떤 새도 이 새장에 어울릴 만큼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공주는 이 새장에 어울릴 만큼 아름다운 새를 갖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새를 갖게 된다면 공주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새를 다 날려 줄 생각이었습니다.
공주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소문은 곧 온 나라 안에 퍼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늙은이가 손에 예쁜새를 들고 공주를 찾아왔습니다.
늙은이는 그 새를 공주 앞에 내밀었습니다.
"공주님, 이 새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새입니다. 이 새가 마음에 드십니까?"
그 새를 보는 순간, 공주는 너무 기쁜 나머지 손뼉을 치면서 말했습니다.
"그래, 이런 새야. 내가 여태까지 찾던 새는 바로 이런 새라구."
공주는 늙은이로부터 새를 받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를 새장 안에 넣었습니다.
"자, 너희들은 이제 필요없어. 너희들 가고 싶은 데로 날아가거라!"
공주는 다른 새들을 모두 날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새의 색깔이 점점 변하고 울음 소리도 이상해졌습니다.
"아, 그래. 목욕을 시켜 보자. 그럼 다시 처음처럼 예뻐질 거야. 자, 목욕을 하자꾸나."
공주는 새의 몸을 물로 깨끗이 씻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목욕을 끝내고 보니 흉측한 까마귀가 아니겠습니까.
"어머나, 세상에. 까마귀라니, 이럴 수가!" 공주는 자신이 속은 것을 깨닫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늙은이는 까마귀의 몸에 예쁜 물감칠을 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너무 속이 상한 공주는 화병으로 드러누웠습니다.
공주는 병을 앓다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죽은 공주의 넋은 가지를 뻗어 금빛 장식이 달린 새장과 닮은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이 꽃이 바로 '개나리'입니다.
사람들은 까마귀 때문에 빼앗겨 버린 새장이 안타까워 공주가 긴 가지를 쭉 뻗어 내고는 새장의 모습을 한 금빛 꽃을 달고 있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길가, 언덕, 울타리에 쏟아질 듯이 다닥다닥 피었다가 언제 지는지 모르게 져버리는 '개나리'는 화려한 인도 공주를 닮은 것 같습니다.
28. 나팔꽃
옛날 중국에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화공이 예쁜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화공의 부인은 세상에 둘도 없는 미인이었습니다.
화공은 예쁜 부인을 사랑했고 부인도 남편을 사랑했습니다. 둘은 아주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화공이 사는 마을을 다스리는 원님은 마음씨가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화공의 부인이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원님은 그 소문을 듣고는 음흉한 생각을 품었습니다.
'옳지, 그렇다면 어디 한 번…!' 원님은 밤낮으로 부인을 잡아 올 방법만을 궁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부인을 잡아 들일 구실이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부인에게 엉터리 죄를 뒤집어 씌우기로 하고, 원님은 그 부인을 잡아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너무 예쁘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죄를 저지른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끌고 왔습니다.
원님이 부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과연 미인이었습니다.
원님의 입은 함지박만하게 벌어졌습니다.
"소문대로 과연 미인이로구나. 너는 오늘부터 나의 수청을 들도록 하여라."
절개가 곧았던 부인은 원님의 요구를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저는 이미 남편이 있는 유부녀이므로 아무리 원님이라 해도 수청을 들 수는 없습니다."
"오냐, 쉽게 승낙할 수는 없겠지. 좀더 생각해 보아도 좋다."
"아닙니다. 아무리 그러셔도 제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보라구. 그러면 앞으로 정말 호강하게 될 테니…."
한참을 달래고 위협하던 원님은 부인의 한결같은 대답에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습니다.
원님은 고함을 질렀습니다.
"저 계집을 우리 마을에서 제일 높은 성 꼭대기 방에 가두어라!"
부인은 조그만 창문 하나만 뚫려 있는 어두컴컴한 성 꼭대기 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억울하게 갇힌 부인은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한편 졸지에 아내를 뺏긴 화공은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아내가 감옥에 갇혀 지내는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화공은 결국 괴로움 때문에 미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미친 화공은 며칠 동안 방에 틀어박혀 온 힘을 다해 그림 한 장을 그렸습니다.
화공은 그 그림을 가지고 부인이 갇혀 있는 성으로 달려갔습니다.
화공은 그 그림을 성 밑에 파묻고 높은 성벽만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성 밑에서 죽은 것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내는 며칠동안 계속 똑같은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남편이 꿈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밤새 잘 지냈소? 나는 매일 밤 당신을 찾아 헤매는데 그 때마다 금세 아침이 되어 당신이 잠을 깨는 바람에 할 말을 못 하고 떠나게 되는구려. 하는 수 없이 또 내일까지 기다려야 할까 보아. "
부인은 이상히 여겨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둘러 보았습니다.
성벽을 타고 나팔처럼 생긴 꽃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죽은 남편이 꽃이 되어 아내를 찾아 올라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팔꽃은 지금도 한 곳으로 향한 그리움을 나타내려는 듯이 위로 감겨 올라가면서 핍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도 아내를 만날 수 없었던 죽은 남편처럼, 이른 아침에 잠깐 피었다가 금세 시들어 버리고 만났답니다
29. 달맞이꽃
옛날 그리스의 한 호숫가에 요정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요정들은 저마다 하늘의 별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밤이면 호숫가에 모여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저 쌍둥이 별자리는 원래 제우스의 아들인 카스포르와 폴룩스가 별이 된 것인데......"라며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별자리에 얽힌 전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먼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그렇게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 안타까워 못 견딜 정도로 별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다른 요정들과는 달리 달을 사랑하는 요정이 있었습니다.
별을 사랑하는 요정들이 별자리의 전설을 이야기하면서 한숨을 쉬고, 은하수를 보면서 노래를 할 때면, 그는 홀로 달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외톨이였습니다. 별을 사랑하는 요정들이 미웠고 별도 싫었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말았어요. "별들이 다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달님만이 밤 하늘을 독차지할 텐 데......"
별을 사랑하는 요정들은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아니, 너 그게 무슨 소리니?" “너 그게 참말이야?" "어서 그 말 취소하고 잘못했다고 사과해."
그러나 달을 사랑하는 요정은 들은 척도 안 했어요.
"흥! 별들이 다 뭐야?"
별을 사랑하는 요정들은 제우스에게 달려가서는 달을 사랑하는 요정의 행동을 낱낱이 고자질했습니다.
"무엇이라고? 그게 정말이냐?" 제우스는 불처럼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는 달을 사랑하는 요정을 달도 별도 없는 곳으로 추방해 버렸습니다.
쫓겨나는 것은 견딜 수 있었으나 달이 곁에 없다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는지 요정은 날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달을 그리워하고 기다렸습니다.
달의 신은 자기를 사랑하던 요정이 달도 별도 없는 곳으로 추방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요정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제우스 몰래 하였죠. "그런다고 내가 모를 줄 알고?" 제우스는 달의 신이 가는 곳마다 미리 구름과 비를 보내 달이 요정을 찾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한편, 달을 사랑하는 요정은 어느 호숫가에서 애타게 달을 기다리다 지쳐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달의 신이 요정을 찾았을 때는 싸늘한 시체로 변한 뒤였어요.
달의 신은 요정을 붙들고 슬피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양지 바른 언덕에 잘 묻어 주었습니다.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우스는 "내가 좀 지나쳤나?"라며 후회를 하였고 달을 사랑하다 죽은 요정의 넋을 꽃으로 변하게 하였습니다.
이 꽃은 다른 꽃들과는 달리 세상이 어둠 속에 잠기면 홀로 피었다가 아침이 되면 시들었습니다. 그리운 달을 기다리며…. 바로 이 꽃이 '달맞이꽃'입니다.
30. 동백꽃
일본 아오모리현 쓰가루에 있는 동백산의 전설인데, 옛날남국의 청년 한 사람이 두메 산골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마을의 어느 소녀 하나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장래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얼마 가지 않아서 슬픈 운명이 닥쳐온다. 이 청년이 그 고을을 멀리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달밝은 저녁, 가까이 있는 동산에 올라가서 눈물을 흘리며 가슴이 미어지는 이별의 슬픔을 나누었다.
소녀는 청년의 옷깃을 잡고 슬픔을 억누르면서 속삭였다.
"당신에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의 고향은 남쪽 나라 따뜻한 곳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 다음에 오실 때는 동백나무의 열매를 꼭 갖다 주세요. 그 나무의 열매 기름으로 나는 머리를 예쁘게 치장하여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청년이 소녀의 손을 꼭 잡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과히 어려운 일이 아니오. 많이 가져다가 당신에게 드리겠소. " 하고 굳은 약속을 남긴 청년은 무거운 발걸을 옮겼다. 그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면서 그곳을 떠나 바다 건너 멀리 남쪽 나라로 떠나 버렸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가을 바람이 일고 기러기가 날기 시작했다. 소녀는 혹시나 청년에게 소식이 있을까 하여 매일 문 앞에서 먼 바다 쪽만 바라볼 뿐이었다.
소녀는 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손을 꼽아 헤아려 보니 떠난 지 어는 새 만 1년이 지나 있었다. 봄날의 달빛은 헤어지던 그 날과 다름없이 미쳐오건만 한 번 떠나간 임은 소식조차 없는 것이었다. 소녀는 지나간 날들의 회포를 가슴 속에 보듬어 그 동산을 헤메면서 돌아오지 않는 청년을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가 죽은 줄도 모르고 청년은 그리움에 부푼 가슴을 안고 이 산골로 소녀를 찾아왔다. 그러나 청년의 부푼 가슴은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소녀의 죽음을 알 게 된 청년은 미친 듯이 소녀의 무덤 앞으로 달려가 땅을 치고 통곡을 했다. 그러나 한번 간 소녀는 대답이 없었다. 청년은 인생의 무상함을 절감하면서 소녀를 위해 갖고 온 동백나무 열매을 무덤 주위에 뿌리고 다시 멀리 떠나 버렸다.
그 이후 청년에 의하여 뿌려진 동백나무 열매는 싹이 트고 줄기가 나서 마침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동산 전체가 동백꽃으로 불타는 듯이 빨갛게 덮였다.
죽은 소녀의 넋이 한이 되서 그 한이라도 푸는 듯이 봄이면 동백꽃으로 동산을 붉게 물들인 것이었다.
31. 등나무 1
신라 시대 한 농가에 열 아홉 살과 열 일곱 살 된 두 처녀가 있었는데 바로 그 엽집에는 씩씩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이들 자매는 얼굴도 예쁘고 복스러웠을 뿐 아니라 마음씨도 착해서 마을 사람들의 칭찬과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 혼삿말이 자주 오갔다. 그러나 자매는 내노라 하는 신랑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두 자매는 마음 속으로 각기 옆집 청년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매끼리도 서로 비밀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옆집 청년이 싸움터로 떠나게 되었다. 청년이 떠나는 날 언니는 장독대에 숨어서 눈물을 흘렸다. 동생도 담 밑에서 흐느껴 울다가 언니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자매는 한 남자를 둘이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남달리 다정한 자매였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양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청년이 싸움터에서 전사하였다는 통보가 왔다.
청년의 전사 소식을 들은 두 자매는 용림의 연못가로 달려가 얼싸안고 울었다. 그리고는 꼭 껴안은 채 물 속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 후 연못가에는 두 그루의 등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죽은 줄로 알았던 옆집 청년이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왔다. 청년은 자기 때문에 세상을 등진 자매의 애닯은 이야기를 들었다.
"나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니, 아! 내가 몹쓸 짓을 했구나. 앞으로 그 정도로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청년은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연못 속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후 연못가에는 한 그루의 팽나무가 자라났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청년의 화신이라고 했다.
봄이면 두 그루의 등나무가 탐스러운 꽃을 터뜨려 그윽한 향기를 풍기며 팽나무를 힘껏 껴안은 듯이 감고 올라갔다.
이 전설에 의하여 사랑이 식으 사람들이 이곳에 오면 다시 가까워진다는 이야기가 나온 듯하다.
32. 등나무 2
신라 시대 오류리라는 마을에, 아름다운 두 낭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친자매나 다름없이 사이가 좋고 다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총각을 둘이서 같이 사랑하게 되었는데, 서로 그 사실을 모르다가 총각이 전쟁터로 나갈 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총각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두 처녀는 연못에 몸을 던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자리에는 두 그루의 '등나무'가 자라났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죽은 줄만 알았던 총각이 살아서 돌아와 그 사실을 알고 총각도 그 연못에 몸을 던졌는데 총각이 죽은 자리에서는 '팽나무'가 자라났습니다.
두 그루의 등나무는 팽나무를 감고 올라가며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33. 매화 1
옛날 중국 산동 지방에 '용래'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약혼한지 3일만에 그만 약혼녀가 몹쓸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용래는 너무나도 슬퍼 매일 약혼녀 무덤에서 울었습니다.
그의 약혼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에 하늘도 감동을 하였는지 그의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나무가 한 그루 돋아 났습니다.
용래는 그 나무를 집으로 가져와서 마당에 심고 약혼녀의 넋이라 생각하고 일생 그 나무를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늙어 죽어서는 한 마리 새가 되어 나무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훗날 약혼녀 무덤에서 핀 나무를 '매화나무'라 하였고, 매화나무 곁을 떠나지 않고 늘 곁에 있었던 새를 '휘파람새'라 하였습니다.
34. 매화2
옛날 일본 대바 지방의 어느 부자 상인이 전국의 명산 대찰을 순례하기로 했다. 부자 상인은 순례 조중에 마쓰시마에 사는 한 사람을 만나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전국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석별의 정을 나누게 되었다. 오랫동안 자정하게 지냈던 그들은 헤어지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서로 형제같이 지낼 것을 다짐하고 그 증표로 대바의 상인은 자기의 딸을 마쓰시마 사람의 아들에게로 시집 보내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마쓰시마 사람이 집에 돌아와 보니 애통하게도 아들은 병들어 죽고 없었다.
날마다 눈물로 지내고 있던 어느 날 아들과 딸의 혼인을 약속하고 헤어졌던 대바 사람의 딸이 찾아왔다. 당황한 마쓰시마 사람은 자초지종을 모두 말해 준 뒤 찾아온 그 소녀에게 되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듣고난 소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성의 인연입니다. 이제 소년느 다른 데에 마음 두지 않고 가신 낭군을 그리며 정성껏 부모님을 섬기겠습니다."
소녀는 그날부터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시부모마저 세상을 떠나 어느 곳으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쓸쓸한 세월을 조내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ㄴ 머리를 삭발하고 중이 되어 연니(連尼)라 이름을 짓고, 죽은 낭군이 살아 있을 때 심었던 한 그루의 매화나무 곁에 암자를 짓고 죽은 낭군의 혼을 위로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봄날 연니는 화사하게 꽃이 피는 매화를 보며 슬픔을 가누지 못하여 탄식했다.
"심은 꽃의 주인은 이미 가고 없는데 꽃만이 향기를 품고 피었구나. 그것을 보자 슬퍼서 견딜 길이 없네. 이제는 피지 않아도 좋으려니."
그러자 다음해 봄에는 웬일인지 매화나무에 꽃이 피지 않았다. 그러나 꽃이 피지 않으니 연니는 그것도 슬펐다. 그래서 그녀는 또 울며 탄식했다.
"꽃을 피우라. 이제는 낭군님으로 여겨 바라볼 터이니, 매화나무 있는 동안은."
그러고 나니 다음해 봄부터 다시 꽃이 피었다 한다.
35. 목련
아주 먼 옛날 옥황상제에게 귀여운 공주가 있었다. 그 공주의 얼굴은 백옥같이 희고 아름다웠으며 마음씨도 비단결같이 고왔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공주를 사모하고 있었는데, 공주는 오직 저 북쪽 바다의 무섭고 사나운 신을 사모할 뿐이었다.
임금은 그런 공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어여쁜 공주는 아무도 몰래 왕궁을 빠져 나가서 북쪽 바다의 신을 찾아갔다.
그런데 신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먼 곳까지 찾아온 공주는 실망을 한 나머지 검푸른 바닷물 속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바다 신은 공주를 가엾게 여겨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그러고는 죽은 공주의 명복을 빌어 주는 뜻에서 자기 아내에게 극약을 먹여 죽게 한 후 공주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어 주었다.
멀리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은 너무나 슬프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가엾은 두 사람의 무덤에 목련꽃이 피어나게 했다.
이 때 공주의 무덤에서는 백목련이 피어나고 신의 아내 무덤에서는 자목련이 피어났다 한다.
이때 공주의 무덤가에 핀 목련꽃은 모두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간 공주의 넋이 꽃으로 피어났다 하여 공주의 꽃, 북향화라고도 부른다.
36. 무궁화
옛날 북부 지방에 있는 어느 한 산간 마을에 글 잘 쓰고 노래를 잘하는 아주 예쁘게 생긴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여자의 재주를 칭송했고 귀여워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남편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습니다. 여자는 남편을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언제나 지극 정성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남편을 돌보았습니다.
제아무리 돈많고 권세있는 사람들이 여자를 유혹하여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마을을 다스리던 성주가 그녀의 재주와 미모에 반해 그녀를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남편을 돌볼 뿐이었습니다.
애를 태우던 성주는 마침내 부하를 보내 강제로 그녀를 잡아들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성주의 말을 듣지 않았다. 성주는 화가 나서 단숨에 칼로 그녀의 목을 잘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죽은 뒤 성주는 그녀의 절개에 감탄하여 그녀의 시체를 남편이 살고 있는 집안 뜰 앞에 묻어 주었습니다. 그 후 그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는데 이 꽃나무는 자라고 자라서 집을 온통 둘러쌌습니다. 마치 장님인 남편을 감싸 주려는 듯이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꽃을 울타리 꽃이라고 불렀습니다.
37. 복사나무
중국 한무제(B.C.140-87)는 복숭아를 무척 좋아하여 뒤뜰에 복숭아나무를 많이 심어 봄이면 아름다운 꽃을 즐기고 여름이면 그 열매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는 때가 되어도 복숭아가 열리지 않았다. 무제는 은근히 마음 아파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마리의 파랑새가 날아와 무제 앞에 날개를 접고 앉는 게 아닌가! 무제는 이상하게 여겨 신하인 동방삭을 불러 그 이유를 물었다. 동방삭은 무제에게 공손히 아뢰었다.
"그것은 장차 서왕모(선녀)가 복숭아를 가지고 오실 징조입니다."
동방삭의 말대로 얼마 후 서왕모가 잘 익은 복숭아를 27개를 가지고 와서 무제에게 바쳤다. 그 때 동방삭은 서왕모의 얼굴을 보더니 얼른 병풍 뒤로 숨었다.
무제는 그 복숭아의 맛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며 뒤뜰에 심겠다고 했다. 그러자 서오아모는 이를 극구 말리면서 말했다.
"이것은 하늘의 복숭아로 땅에다 심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 개를 먹으면 천 년을 더 살 수 있습니다."
서왕모가 가져온 복숭아는 30개였다. 그런데 그 중 세 개를 동방삭이 훔쳐먹고 병풍 뒤에 숨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방삭은 삼천 년을 살았다고 한다.
38. 사위질빵
옛날부터 사위는 항상 장인이나 장모의 사람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옛날 우리 풍습에 가을철이면 사위는 처가의 가을 곡식을 거두는 일을 항상 도와 주는게 상례였다.
다른 농부들과 같이 사위도 들에서 볏짐을 져서 집으로 들여와야 했다. 그런데 장인 장모는 자기 사위를 아끼는 마음에서 사위에게는 짐을 조금 지게 하였다. 이와 같이 사위만 짐을 적게 지게 하니까 같이 일하던 농부들이 이를 가리켜 약한 사위질빵덩굴로 질빵을 해 짐을 져도 끊어지지 않겠다고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이렇듯 사위질빵이라는 이름은 이 덩굴이 길 게 벋어 나가기는 하지만 연약한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39. 갈대(24효와 갈대)
옛날 중국에 민자건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릴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고 있었다. 계모는 아이 둘을 낳았는데, 자기 소생만 귀여워하고 건은 천대하였다. 겨울에 자기 소생은 따뜻한 솜옷을 입히면서, 건의 옷에는 갈대이삭을 넣은 옷을 입혔다.
그러나 마음 착한 건은 아무 불평없이 참고 견디었다. 어느날,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대노해 계모를 쫓아 보내려고 했다. 여느 아이 같으면 아버지의 처사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좋아하련만, 건은 오히려 아버지에게 애걸복걸 하여 어머니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렸다. 이때, 계모는 크게 감동하여 그로부터는 자기 소생과 다름 없이 건을 사랑하였다 한다. 건은 24효(孝)의 한 사람에 꼽히는 사람이 되었다.
24효라 함은 원나라 사람 곽거업(郭居業)이 선정한 고금의 효성이 뛰어난 스물 네 사람을 가리킨다.
40. 과꽃(과부의 정절을 지켜준 꽃)
백두산 밑에 어린 아들과 함께 사는 추금이라는 한 과보가 있었다. 그 집 뜰에는 하얀 꽃이 가득심어져 있어 여름만 되면 꽃향기가 집안에 가득찼다. 그 꽃은 죽은 남편이 정성들여 가꾸던 것이라 꽃이 필 때면 남편 생각이 더욱 간걸했다. 요즘 들어 재혼하라고 졸라대는 매파의 말에 젊은 부인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뜰에 핀 하얀 꽃들이 하나 둘씩 분홍색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꽃밭에 나가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죽은 남편이 미솔르 짓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부인! 내가 다시 돌아왔소.”
부인은 오랜만에 남편의 따뜻한 품에 안겼고, 아들과 함께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극심한 가뭄으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여보! 만주땅에는 넓은 들이 있고 강이 있다고 하니 우리 거기 가서 농사를 지읍시다.“
남편의 뜻에 따라 부인은 이삿짐을 싸게 되었다. 이때 부인은 그렇게도 사랑하던 꽃 중에서 흰 꽃과 분홍 꽃 한 그루씩을 캐어 들고 나 섰다.
만주땅으로 건너온 지 어언 10여 년이 지났다.
이제 아들도 어엿한 장정이 되어 곧 결혼을 시킬 참이었다. 그런 어느날, 나무를 하러 갔다 아들이 독사에 물려 죽고 말았다. 두 부부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보, 여기 살고 있으면 아들 생각이 더욱 날테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남편의 뜻에 따라 아들을 뜨락 꽃밭에 묻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옛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들은 이미 늙어 다시 자식을 낳지는 못했다. 그러나 두 부부는 나이가 들면서 금슬이 더욱 좋아졌다.
어느날 부인은 나무하러 가는 남편을 따라 나섰다. 산에 올라와 이곳 저곳을 살피던 부인은 절벽위에 피어 있는 예쁜 꽃 한 송이를 발견하였다.
그것을 본 남편은 부인을 위해 지게를 내려놓고 꽃을 따려고, 절벽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발을 잘못 딛은 남편은 그만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부인은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부인은 아들이 부르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다.
모두가 전날 그대로였다. 꿈을 꾸었던 것이다. 부인은 더욱 허전했다. 뜰에 핀 꽃을 들여다보니 밤 사이에 하얀 꽃이 분홍색으로 많이 변해 있었다.
그후 부인은 몸가짐을 더욱 조심하여 아들과 함깨 열심히 살았다. 훌륭하게 성장한 아들은 무과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떠났다.
그때 만주 지방 오랑캐들이 추금부인을 납치해 갔다.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아름다웠기 때문에 두목은 그녀를 아내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부인은 끝까지 거절하였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두목이 사는 집은 그 옛날 꿈 속에서 남편과 함께 살던 바로 그집이었다. 두목은 완강히 거절하는 추금부인을 방에 가두고는 매일 찾아와 열쇠를 주며 아내가 되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부인은 열쇠를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한편 무과에 급제한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오랑캐에게 납치된 뒤였다. 아들은 병사 몇을 데리고 어머니를 구출하기 위하여 오랑캐 땅인 만주로 숨어들어 마침내 어머니가 갇혀 있는 곳을 찾아내고, 밤에 급습하여 어머니를 구출해 냈다.
“이 집은 너의 아버지께서 끝까지 나를 지켜 주신 집이다.”
부인은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아들에게 들려주고 뜰에 나가 보았다. 뜰로 나간 부인은 깜짝 놀랐다. 지난날 꿈에 아들을 묻었던 곳과 열쇠를 내던져 버렸던 곳에 보랏빛 꽃이 피어 있었던 것이다. 부인은 그 꽃을 캐어 품에 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았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만주땅에도 피는 이 꽃은 과부를 지켜 준 꽃이라고 해서 과꽃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41. 국화(800세를 누린 국자동)
옛날 중국의 주목이라는 사람이 인도에 가서 법화의 비분을 전수하여, 이것을 자동이란 사람에게 전하였다. 그러한 즉 자동은 언제까지 늙지 않고 홍안 손년과 같아서 800세까지 장생하여 위 문제 때에 이름을 팽조라 고치고, 문제에게 이 비법을 전하였다. 문제 역시 이 비법을 받아서 장생하였다 한다. 이 비법이라는 것은 국화로 담은 술이다.
-중양절과 국화주
옛날 중국에 장방이라는 현자가 있었는데, 어느날 항경이라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금년 9월 9일에 너의 집에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을 빨리 전하고 집안 사람 각자가 주머니를 만들어 그 안에 산수유를 넣어서 팔에 걸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국화술을 마시면 화를 면할 것이다.”하였다. 항경은 이 말에 따라 그날은 집을 비우고 뒷산에 올랐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의 동물들이 죽어있었다. 장방은 이 소문을 듣고 “그 동물들은 사람 대신 죽었다. 국화술이 아니었다면 너희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9월 9일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 국화술을 마시고 부인들이 산수유 주머니를 차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42. 꽈리(수줍어 붉어진 소녀의 넋)
어느 가난한 집안에 꽈리라는 마음씨 착한 딸이 있었다. 꽈리는 아무에게서도 배우지 않았지만 노래를 매우 잘 불렀다. 꽈리의 노랫소리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구슬이 구르는 것 같다고 칭찬하였다.
그런데, 이 마을 제일의 세도가에게 꽈리와 나이가 같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꽈리만큼 노래를 못 부르는 그녀는 꽈리를 몹시 미워하였다. 게다가 어머니마저도 매우 심술궂은 사람어서 꽈리네를 못살게 굴었다. 그래서 꽈리는 되도록 그 세도가집 가까이 가지 않았으며, 노래를 부르더라도 그 딸이 듣지 않는 곳에서 불렀다.
어느날 꽈리는 나물을 캐면서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꽈리의 노래는 바람을 타고 온 산골짜기에 아름답게 메아리쳤다.
마침 그곳을 시찰 중이던 고을 원님이 그 노랫소리를 듣고 멈추어섰다.
원님은 하인을 시켜 노래부르는 사람을 데려오도록 하였다. 이윽고 원님 앞에 온 꽈리는 너무 수줍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집이 어디냐고 물어도 대답을 못했다. 원님은 다시 한번 꽈리의 노래를 칭찬하며 돌아갔다.
이 소문은 곧 온 말을에 퍼졌다. 이 소문을 들은 세도가 딸과 어머니느 질투로 온몸을 떨며 어쩔줄 몰랐다.
어느날 그 세도가의 집에서 큰 잔치가 열렸다. 원님도 초대받아 잔치에 참석했다.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도 그 잔치에 초대받아 왔지만 꽈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꽈리도 가고 싶었지만 세도가의 딸이 무슨 심술을 부릴지 몰라 가지 않았다.
잔치가 절정에 이를 무렵 원님이 입을 열었다.
“이 고을에 노래를 매우 잘 부르는 소녀가 있던데, 그 노래를 듣고 싶구나.”
세도가는 즉시 꽈리를 불러 오도록 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세도가의 딸과 어머니는 화들짝 놀랐다.
그 어머니는 꽈리가 수줍음을 잘 타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불량배들을 모아 꽈리가 노래를 못부르게 방해를 놓도록 했다. 이윽과 꽈리가 잔치집에 와서 원님 앞에 서게 되었다. 꽈리는 부끄러웠지만 차마 부르지 않을 수 없어 숙였던 고개를 들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때 꽈리의 앞에 있던 청년이 꽈리를 놀렸다.
이 소리를 들은 순가 꽈리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수줍음을 잘 타는 꽈리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잔치집에서 달아나듯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집에 돌아온 꽈리는 너무 부끄러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드디어 몸쳐 누워버렸다. 의원이 몇차례 다녀갔으나 뚜렷한 병명도 모른 채 결국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듬해 봄, 꽈리의 무덤에 처음 보는 꽃이 피더니 여름에는 빠알간 열매가 열렸다. 엷은 너울속에서 가만히 밖을 내다보는 열매, 더구나 빠알간 색깔은 꽈리의 수줍음을 타는 듯한 그 꽃을 꽈리라고 불렀다.
43. 나팔꽃(아내 잃은 화공의 넋)
옛날 중국에 그림을 잘 그리는 화공이 있었다. 이 화공의 아내는 얼굴이 매우 아름다워서 사방에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런데 그 고을 원님은 마음씨가 아주 나쁜 사람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원님은 화공의 아내에게 억울한 죄명을 덮어씌워 급기야 옥에 가두어 버렸다. 화공은 억울한 마음으로 밤낮 아내의 일만을 걱정하다가 그만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날 마침내 화공은 남몰래 그림을 한 장 그려 그 그림을 아내가 갇힌 옥 밑에 파묻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날부터 옥에 갇힌 아내는 밤마다 남편의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남편은 말없이 애처로와 하는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고는 사라지곤 하였다. 아내는 이상히 생각하다가 어느날 아침에 창밖을 유심히 내다보니 거기에는 한 줄기 덩굴꽃이 피어 있었다. 아내는 곧 원한 맺혀 죽은 남편의 넋이 이 꽃으로 태어난 것임을 알아차리고 발을 굴러 통고하였다 한다.
44. 느티나무(옥황상제가 준 선물)
어느날, 옥황상제께서 인간 세상을 가만히 내려다 보고 계셨다. 지상에서 착한 백성들이 열심히 일하고 이웃을 도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무척 흐뭇하였다. 그러다가 옥황상제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추었다. 뜨거운 여름인데 아이들이 뙤약볕 아래서 쉬고 있다.
옥황상제는 그 아이들이 쉴 수 있는 나무를 선물하고 싶어 신선들을 불렀다. 그래서 한 신선은 동쪽으로 한 신선은 서쪽으로 나무를 심어 나갔다. 오랜 세월이 지내가 두 신선은 다시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나무 한 그루가 남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 그 남은 한 구루의 나무를 심었다. 이때 그 마을에 사는 한 아이가 그 광경을 보고 비웃었다.
아이는 점점 자라서 어른이 되고, 세월이 흘러 어느덧 수염이 하얗게 센 할아버지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햇볕이 쬐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느티나무 밑으로 그늘을 찾아왔다. 할아버지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 느티나무를 사랑하고 보호했다.
45. 능금(이솝이야기의 능금)
어느날, 힘의 신인 헤라클레스가 좁은 들길을 걸어가다가 능금 한 개를 밟았다. 능금이 깨질 줄알았는 데 놀랍게도 두 배로 커졌다. 헤라클레스는 재미가 나서 다시 한 번 밟아 문지르니 능금이 또 다시 두 배로 커졌다. 신은 그만 화가 나서 이번에는 지팡이로 힘껏 두들겨 패니 능금은 점점 커질 뿐 아니라 나중에는 길을 아주 막아 버렸다. 이때 장사하는 신인 「미네르바가」 나타나서, “이 능금은 싸움의 능금이오. 섣불리 손을 대면 점점 커질 뿐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고 충고하였다.
이 이야기는 쓸데없는 짜증을 부리지 말라는 교훈을 능금에 비유한 것이다.
46. 도라지(오빠를 기다리다 숨진 소녀의 넋)
옛날, 한 마을에 도라지라는 소녀가 먼 친척 오빠와 같이 살고 있었다. 오빠가 공부하러 먼저 중국으로 떠나게 되자, 소녀는 잘 아는 절의 스님에게 맡겨졌다. 오빠는 집을 떠날 때 소녀에게 열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10년후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돌아온다던 오빠는 돌아 오지 않았다. 떠도는 소문에는 오빠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졌다고 했고, 중국에서 결혼을 하여 그곳에 살고 있다고도 했다. 소녀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일생을 혼자 지내기로 결심하고는 절을 떠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소녀는 할머니가 되었다. 어느날, 머리가 파뿌리처럼 하얗게 센 도라지는 문득 옛날의 바다가 보고 싶어져서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바다를 향해 “오빠가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바다를 보고 있는데 등뒤에서 “도라지야.” 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다가 그 자리에서 숨이 지고, 그대로 한 송이 꽃으로 변했다고 한다.
47. 동자꽃(가련한 동자의 화신)
옛날 어떤 노스님이 설악산의 조그만 암자에 어린 동자를 남겨 놓고 겨울 준비를 위해 하산하였다. 그런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도저히 절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어린 동자는 이제나 저제나 하고 절벽의 언덕에 앉아 스님을 기다렸다. 그 다음 해 봄에야 눈이 녹아서 스님이 절에 당도하니 동자는 스님이 오는 길목 언덕에 앉은 채 얼어 죽어 있었다. 가엾은 동자를 그곳에 묻었더니, 다음 해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다. 꼭 산 아래를 향하여 피는 이 꽃을 사람들은 동자꽃이라고 불렀다.
48. 등(참등꽃과 소녀)
먼 옛날 일본 어느 마을에 아름다운 소녀가 살고 있었다. 마을의 청년들이 모두 사랑을 고백하였으나 이 소녀는 누구에게도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마을에 어떤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형이 아우에게, “나는 그 소녀를 사랑하고 있으나 그소녀는 좀처럼 응하지 않는다. 너는 그 소녀를 얻을 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우는 “그야 쉬운 일이지.”하고 말하였다. 형은 “네 가 그 소녀를 얻을 수 있다면 나는 상하의를 버리고 큰독에 술을 가득 채워서 푸짐한 음식으로 너를 맞이하겠다.”고 말하였다.
다음날, 아우는 은근히 걱정이 되어 어머니에게 사정을 말하고, “나는 어떻게 하더라도 그소녀를 얻고자 한다.”고 어머니의 도움을 구하였다. 어머니는 아들을 측은히 여겨 도와주기로 하였다. 하룻밤 사이에 참등나무 껍질을 벗겨서 베를 짜서 상하의를 만들어 상자에 넣고 화살을 들려 그 소녀 집에 보냈다. 아우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몰래 그 화살을 소녀의 뒷간 곁에 두고 왔다. 그러한 즉 놀랍게도 이 화살은 모두 아름다운 참등꽃으로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는 이 아름다운 꽃을 보고 방으로 가지고 갔다. 아우는 눈치체지 못하게 소녀의 뒤를 따라서 그 방에 들어가 소녀의 마음을 돌려 드디어 결혼을 하였다.
아우가 이 사실을 곧 형에게 알리니, 형은 아우를 시기해서 처음의 언약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우는 이 일을 어머니에게 말하니, 어머니는 노발대발 화가 나서 형을 강물에 집어 던졌다. 형은 이때 처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울면서 맹세를 하기에 어머니는 아들을 건져 주고 용서하여 주었다 한다.
-팽나무와 두 그루의 등나무
경상 북도 월성군 견곡면 오류리에 있는 네 그루의 등나무는 각각 두 그루씩 가까이 서 있으며 팽나무에 엉켜서 있다. 옛날 신라 때에는 이곳을 용림(龍林)이라고 했고, 숲이 우거지고 등나무가 서 있는 곳에는 깊은 연못이 있었다.
이곳은 임금께서 신하를 거느리고 사냥을 즐기시던 곳이라고 한다. 이 등나무를 용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글쭈글한 줄기의 형태에서 유래 되었거나 용림에서 자라는 등나무라는 뜻인 듯하며, 꽃을 말려서 신혼 금침에 넣어 주면 부부의 애정이 좋아진다 하고, 또 사이가 벌어진 부부가 이 나무 잎을 삶은 물을 마시면 그들의 애정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해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것은 다음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신라 어느 때인가 이 마을의 한 농가에 19세와 17세 되는 예븐 두 딸이 있었는데, 옆집에는 씩씩한 아들이 있었다. 자매는 얼굴이 예쁠 뿐아니라 마음씨 또한 착해서 온 마을의 부러움이었다. 그런데 자매가 똑같이 옆집의 한 청년을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속의 비밀은 그 어느 누구도 몰랐다. 그러나 어느날 옆집의 청년이 싸움터로 떠날 때 그녀들은 비로소 같은 남자를 둘이서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남달리 다정한 자매이었으므로 그들은 서로 양보하기로 각각 결심하였으나, 뜻하지 않았던 전사의 통보를 받은 그들은 연못에 가서 얼싸안고 울다가 지쳐서 물에 몸을 던졌다.
그후 이 연못가에는 두 그루의 등나무가 자라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때 죽은 줄만 알았던 옆집 청년은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와서 세상을 등진 자매의 애달픈 소식을 듣고 자신도 이 연못에 몸을 던져 죽으니, 이는 팽나무가 되었다 한다. 봄이면 두 그루의 등나무는 탐스러운 꽃송이를 터뜨려서 그윽한 향기를 던지며 팽나무를 한층더 힘차게 얼싸안는 듯이 보인다 한다.
49. 맨드라미(죽은 넋이 방패되어)
엄청난 힘을 가진 장군이 있었는데 이름을 무룡이라고 했다. 장군은 항상 바른말을 하는 충신이었다. 그러므로 왕을 둘러싸고 있는 간신들에게는 장군의 존재는 눈의 가시였다. 그래서 간신들은 왕을 충동질하여 무룡 장군을 싸움터에만 있게 하였다. 그러나 장군은 조금도 왕을 원망하지 않고 오직 왕을 위하여 열심히 적을 무찔렀다. 싸움터에서 만 10여 년 간을 보낸 무룡 장군은 적장의 항복을 받고서야 겨우 고향에 돌아올 수가 있었다. 왕은 무룡장군의 개선을 환영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왕은 또다시 간신들의 농간에 놀아나게 되었다.
“전하! 이러시면 안됩니다. 나라 일을 걱정하셔야지요. 지금 이 시간에도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노는데 빠져 버린 왕은 무룡장군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장군은 차라리 전쟁터가 편하다고 생각하였다.
“전하! 그 동안 오래 쉬었으니 이제 전쟁터로 나갈까 합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간신들은 무룡 장군을 제거하려면 이때가 기회다 생가하며 왕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전하! 무룡 장군은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군사를 모으려고 전쟁터로 나간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왕은 진노하여 무룡장군을 불렀다. 왕의 부름을 받은 무룡 장군이 들어서자 이삼십명의 무사들이 무룡 장군을 둘러쌌다. 넓은 들이라면 무룡 장군에게 이런 무사들쯤이야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무룡 장군은 도저히 힘을 쓸 수가 없어 깊은 상처를 입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간신들 중 우두머리가 왕 앞에 나서며 말했다.
“전하! 전하께서 그렇게 믿으시던 무룡 장군도 겨우 삼십 명의 군사를 당하지 못하고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람을 장군이라고 믿으시는 당신은 눈먼 장님입니다. 우리는 이 순간부터 당신을 왕의 자리에서 쫓아 내겠습니다.”
그제야 왕은 간신들에게 속은 줄 알았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왕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상처를 입고 쓰러졌던 무룡 장군이 마지막 힘을 내어 일어섰다. 그리도 땅에 떨어진 칼을 주어 들고 소리쳤다.
“전하! 어서 제 뒤로 피하십시오.”
무룡 장군은 계속해서 큰 소리로 외쳤다. “군사들은 들어라. 나는 무룡이다. 비록 일부 간신들이 왕을 몰아내려고 하였으나, 이곳 방에는 내가 있고, 밖에는 너희들이 있으니 걱정이 없다. 내가 이곳의 일을 처리하겠으니 너희들은 그곳에서 나쁜 무리들을 잡에 가두거라.”
그러면서 무룡 장군은 간신들을 한사람씩 처치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한 명의 간신을 잡은 무룡장군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무룡의 충성심을 왕은 알게 되었지만 쓰러진 무룡 장군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왕은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루어 주었다. 얼마 후 무룡 장군이 묻힌 무덤에선 한 송이 꽃이 피어났다. 왕과 나라를 지킨 방패처럼 생긴 이 꽃을 사람들은 맨드라미라고 불렀다.
50. 며느리밥풀꽃(밥알을 물고 죽은 착한 며느리)
학대에 시달리던 며느리가 밥을 짓다가 뜸이 들었나 하고 솥뚜껑을 열고 밥알을 조금 입에 넣었다. 안방에서 숨어서 보던 시어머니가 어른도 잡수시기 전에 네년이 먹느냐고 몽둥이질을 해서 끝내 착한 며느리는 입에 밥알을 문 채 쓰러져 죽고 말았다.
이를 불쌍히 여긴 말을 사람들이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이듬해 무덤에 이름모를 꽃이 피었는데, 꽃 모양이 꽃 입에 밥알을 물고 있는 것같았다. 그래서 이때부터 며느리밥풀꽃이라고 불렀다.
51. 무화과나무(예수님과 무화과)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예루살렘까지 왔으나, 주머니 속에는 돈이 한푼도 없어서 열두 제자와 함께 굶지 않으면 안될 곤경에 빠져 있었다. 때마침 눈앞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무화과나무가 보이기에 혹시 열매가 있나 살펴보았으나 열매는 하나도 없었다. 사실은 그때는 아직 철이 일러서 열매가 맺지 않았다. 그러나 몹시 시장하던 터이라 짜증이 나기도 해서 예수께서는 “이제부터는 영원히 사람들이 너로부터는 열매를 얻지 못하리라.” 하면서 저주하셨다.
다음날 예수가 제자와 같이 그 무화과나무 앞을 지나면서 보니 어찌된 일인지 그 나무는 밑에서부터 말라들고 있었다. 이를 본 제자는, “예수님 보셔요. 당신이 저주하시더니 나무가 저렇게 말라들고 있습니다.” 하였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말을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 무화과나무로써 그 실증을 보여주셨던 것이라 한다.
52. 민들레(땅에 떨어진 별)
먼 옛날에 어떤 임금이 있었다. 그 임금은 별의 운명을 받고 세상에 태어났다. 그 임금은 무슨 일에 있어서 꼭 한 번만의 명령으로 성공할 수 있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래서 임금은 자기를 그렇게 운명지워 준 별에게 항상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임금은 자기의 운명의 별을 향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인 명령을 내렸다.
“별아, 나의 불만의 별아, 하늘에서 떨어져 땅위의 꽃이 되거라. 그러면 나는 너를 밟아 주리라.” 그러자 별은 임금의 명령대로 땅에 떨어져 노란 금빛 꽃이 되었다. 임금은 풀 위로 양들을 데리고 다니는 양치기로 변하여 꽃을 밟고 다니게 되었다. 이 노란 금빛 꽃이 민들레라한다.
53. 백합(처녀 사월이의 화사한 웃음)
옛날 어느 마을에 신앙심이 두터운 사월이라는 예쁜 소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사월이가 여느 때처럼 마른 풀을 모아 다발로 묶고 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원님이 아름다운 사월이의 모습을 보고 말을 걸어왔다.
“여봐라, 처녀는 어디에 사는 누고인고?” “예, 저는 저기 보이는 집에 사는 사월이라고 하옵니다.” “그래. 나하고 같이 갈 수 없겠느냐? 너의 소원은 뭐든지 다 들어주마.“
“고맙습니다만 저에게는 가장 소중한 어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어머니에게 말 한 마디도 없이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 참 기특하구나. 그렇다면 속히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오너라.” 사월이는 집으로 뛰어가서 어머니께 원님의 말을 전했다. 그런데 원님은 아주 나쁜 사람이었다. 예쁜 처녀는 모조리 데려다가 자기의 노리갯감으로 삼았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월아, 큰일났구나. 어서 이곳을 피하자.” 마침내 모녀는 정든 집을 뒤로 한 채 도망쳐 나왔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며칠을 두고 숨어 다니던 모녀는 절을 찾아가서 스님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고 숨겨 줄 것을 부탁했다. 스님은 두 모녀를 구석진 방에 숨겨 주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사월이를 기다리던 원님은 뒤늦게 사월이가 도망간 사실을 알고는 화가 나서 부하들에게 사월이를 잡아오라는 명령하였다. 포졸들은 사월이 모녀를 찾아다녔다. 마침내 포졸들은 사월이가 숨어 있는 곳을 찾아냈다. 포졸들은 모녀를 붙잡아 원님에게 데리고 갔다. 원님 앞에서 선 사월이는 그 동안의 두려움을 잊은 듯 방긋 웃으며 원님을 바라보았다. 원님이 웃으면서 손을 잡으려는 순간 갑자기 사월이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그 자리에 한송이 백합꽃이 활짝 피어나있었다. 그 꽃은 사월이의 그 웃음이었다. 놀란 원님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 꽃을 소중하게 키우며 살았으니, 이 꽃이 바로 사월이처럼 예쁘게 깨끗한 백합꽃이다.
54. 벚꽃(벚나무와 왕벚나무)
한꺼번에 활짝 피었다가 불과 5~6일 만에 한꺼번에 지는 것이 이 꽃의 특색이다. 그러므로 예부터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백한 성격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국화로 삼았다.
일본사람들은 소메이요시노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도쿄 소메이에 있는 꽃집에서 이 나무의 묘목이 퍼져나간 때문이다. 처음에는 벚꽃 명소인 요시노를 따서 요시노라고 하였다가, 1872년 소메이요시노라 이름짓고 도쿄가 이 꽃의 본고장이라고 했다.
-서행법사와 왕벚나무
일본의 스님이고 가인으로 유명한 서행법사는 벚꽃을 무척 좋아했다. 마치 몇해 동안이나 벼르던 요시노의 벚꽃 구경에 나섰다.
그러나, 도중 어느 두메산골 가난한 집에 부모가 병들어 누웠으나, 약 한 첩 쓰지 못하고 효심 많은 어린 자녀들이 울부짖고만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서행은 그곳에 찾아가서 어린아이들을 위로하고 벚꽃 구경할 여비를 몽땅 털어 주고 훌쩍 자기의 암자로 되돌아 왔다. 마을 사람들이 의아해서 물으니 스님은 자초지종을 말하고, 벚꽃 구경은 다음에 갈 기회가 있을 것이나 남의 어려움은 지금 바로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것 아닌가?“ 하였다. 스님의 자비로운 보살행에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일다.
55. 복숭아(동방삭이 훔쳐먹은 하늘 복숭아)
옛날 중국 한무제는 복숭아를 무척 좋아하여 뒤뜰에 많은 복숭아나무를 심어서 봄이면 그꽃을 사랑하고 여름이면 그 열매를 즐겨 먹었다. 그러던 어느 해, 때가 되어도 복숭아가 열리지 않아 한무제가 은근히 마음 아파하고 있는데 한 마리의 파랑새가 날아와서 한무제 앞에 앉아 쉬는 것이었다. 한무제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신하 동방삭을 불러 그 이유를 물었다. 이때 동방삭은 한무제에게 “그것은 장차 서왕모가 복숭아를 가지고 오실 징조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후 과연 서왕모는 잘 익은 복숭아 27개를 가지고 와서 한무제에게 드렸다. 서왕모의 얼굴을 보자 동방삭은 병풍 뒤로 숨었다. 한무제는 그 복숭아를 맛보고는 퍽 기뻐하며, “참 맛좋구나. 이씨를 뒤뜰에 심겠다.”하니, 서왕모는 말리면서, “이것은 하늘의 복숭아로서 땅에다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한 개를 먹으면 천년을 더 살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서왕모는 복숭아 30개를 가지고 왔는데, 그 중 3개를 신하 동방삭이가 훔쳐 먹었다. 그래서 동방삭은 복숭아 3개를 먹고 삼천 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무릉도원 이야기
옛날 중국 태원 연중에 무릉 사람이 고기를 잡으려고 계류를 따라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니 골짜기는 넓어지고 복숭아밭 즉 도원경이 나타났다. 이 도원경에는 풍속이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진 나라 때 난리를 피해서 이곳에 들어왔다고 하면서 고국 사람이 왔다며 반가워 하고 융숭한 대접을 하여 주었다. 무릉 사람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푯말을 세우고 오다가 이 나라의 태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하니 태자도 마음이 끌려 푯말이 가리키는 대로 찾아가기는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세상을 떠난 별천지의 선경을 도원경이라하고 속세를 떠난 꿈, 안락한 꿈을 도원몽이라함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천태산의 복숭아
후한 때에 유신, 완조 두사람이 있었다. 영평 연간에 두 사람은 같은 천태산에 올라가게 되었다. 약초를 캐면서 산중을 헤매기를 근 30여일 급기야는 식량이 다 떨어져서 굶주려 쓰러지려는 순간 앞을 보니 커다란 복숭아 나무에 복숭아가 탐스럽게 익어 매달려 있었다. 두 사람은 기뻐하면서 이것을 따먹고 다소 허기를 채우고는 물을 마시려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흐르는 물에 참깨가 떠내려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보고 있다고 참깨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이곳의 상류 골짜기에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라고 힘을 얻어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서 사방 천지가 활짝 트이고 으리으리한 누각이 서 있고, 그 안에서 꽃과 같이 아름다운 두 여자가 나타나서 두 사람을 불렀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삽시간에 많은 미인들이 모두 복숭아꽃을 가지고 와서 두 여자를 위해 좋은 신랑이 생겼다고 입을 모아 축하를 하였다. 처음에 두 사람은 당황하였으나 이내 마음이 끌려서 이 여인들의 청을 받아들여 결혼하여 의좋게 살았다. 그러나 고향 생각이 너무도 간절하여 두 사람은 어느날 그만 석별의 인사를 나누고 옛날 살던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막상 고향에 돌아와 보니 아는 사람들은 다 세상을 떠났고 이미 7대가 지나고 있었으니, 그 동안 이렇게 긴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내려왔던 천태산에 올라가서 그전의 그 계류를 거슬러 올라갔으나 끝내 복숭아밭도, 미인의 모습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는 분에 넘치는 짓은 하지 말고 남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56. 봉선화(임금님과 봉선화)
고려 충선왕은 몽고에서 보내온 공주보다 조비를 더 사랑했다. 고려를 지배하던 몽고의 미움을 받아 드디어 왕위를 내놓게 되고, 다시 몽고의 수도로 붙들려 가서 살게 되었다. 왕은 항상 고국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어느날 왕은 한 소녀가 자기를 위해 가야금을 타고 있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소녀의 손가락에 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다음날 왕은 꿈이 하도 이상해서 궁궐 안에 있는 궁녀들을 모두 조사하여 보았다. 한 소녀가 손가락을 모두 흰 헝겊으로 동여매고 있었다. 왕이 그 소녀의 신분을 알아보니, 그 소녀는 고려에서 온 소녀인데 봉선화 물을 들이기 위해 손가락을 동여맨 것이라 하였다. 왕은 남의 나라에 와 있으면서도 자기 나라 풍습을 지키는 것이 기특하여 그 소녀에게 말을 건네 보았다. 소녀는, 자기 아버지는 충선왕파라는 이유로 면직을 당하고 자기는 급기야 여기까지 끌려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와 계시는 충선왕을 위하여 준비한 가야금 가락을 들려 드리겠다고 하였다. 그 가락은 왕께서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시라는 노래였다.
왕은 크게 감명하여 이로부터 다시 고국에 돌아갈 뜻을 품고 원나라 무종이 왕위에 오를 때 크게 도와주어 그 공으로 고려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한다. 왕은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자, 그 갸륵한 소녀를 불러오고자 하였으나 소녀는 이미 죽은 후였다. 그래서 왕은 소녀의 정을 기르는 뜻에서 궁궐에 많은 봉선화를 심게 하였다 한다.
57. 부들(토끼와 부들)
옛날 어느 외딴섬에 살고 있던 토끼가 육지에 가고 싶으나 갈 길이 없어서 이 궁리 저궁리 한 던 끝에 하루는 잔꾀를 내어 악어를 불러서 의논하였다.
토끼: “악어야, 너의 악어 무리는 얼마되지 않지? 우리 토끼 무리는 굉장히 많다구.”
악어: “야 토끼야, 거짓말하지 마라. 이곳에 토끼라면 너밖에 또 누가 있느냐?”
토끼: “흥, 무어라구! 이 섬 바위틈이나 나무 그늘에는 우리 동족이 수없이 살고 있단 말이야. 내말이 믿어지지 않거든 우리 한번 모여서 그 수를 헤아려 보기로 할까?”
악어: “좋아. 그런데 그 수를 누가 어떻게 헤아리지?”
토끼: “그야 쉬운 일이지. 너의 악어 무리를 모두 불러 모아서 이 섬에서 저쪽 땅까지 일려로 나란히 떠 있게 하면 내가 그 수를 헤아리고, 다음엔 우리 종족이 모일 때 네가 헤어리면 될 것 아닌가!”
이렇게 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자 악어는 그 부근에 있는 악어들을 불러 모아 토끼가 하라는 대로 일렬로 물위에 떠서 마치 섬과 육지 사이에 부교를 만들다시피 하여 기다렸다. 그러자 토끼는 하나 둘 셋 하면서 악어 등을 깡충깡충 뛰어 건너 가지가 가고 싶어 하던 육지로 건너가고 말았다. 그것도 모르고 악어는 토끼가 무리를 모아오리라하고 기다렸다. 뒤늦게 토끼에게 속은 것을 안 악어는 화가나서 토끼를 찾아가 배신당한 앙갚음으로 토끼의 몸털을 모두 물어뜯어 빨간 알몸을 만들어 버렸다. 토끼는 겁도 나고 아프기도 하여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마침 이곳을 지나던 신이 토끼의 처량한 몰골을 보고 그 사연을 물었다. 토끼는 전후 사정을 말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신은 그행위는 괘씸하나 너무나 정상이 가련하여, “이 산넘어 양지바른 곳에 가면 부드러운 풀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 풀을 모아 깔고 누워 있으면 너의 몸의 상처는 가셔질 것이니 그리하여라.” 하고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토끼는 신의 지시대로 그 곳을 찾아가 마른 풀을 모아 그 속에서 며칠을 지내니 상처도 아물고 털도 나게 되어 전과 같은 몸이 되었다. 이때 토끼가 며칠을 깔고 지냈던 풀이 물가에 흔히 많이 나는 부들이었다 한다.
58. 붓꽃(무지개의 사자)
옛날하고도 아주 먼 옛날에 여러 가지 꽃들이 들판에 모여서 무지개의 축제를 열었다 한다. 꽃들은 저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려고 예쁜 옷으로 차려입고 모였다. 그 중에 푸른옷을 거창하게 차려입고 나온 소년이 있었다. 하늘빛 화관이나 보석 장식들은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아름다웠다. 여기 모인 모든 꽃들은 이 소년에게 마음이 사로잡혔으나, 누구 하나 그것이 무슨 이름의 꽃인지 알지 못했다. 때마침 거기에 한 꽃이 나타서, “여러분, 보십시오. 저 소년의 옷은 하늘에 걸린 무지개같이 아름답군요.” 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슬비가 갑자기 멎고 아름다아운 무지개다리가 이 산에서 저 산에 걸려 먼들판을 꿈과 같이 물들였다. 소년은 이 무지개빛에 물들어 한결 더 아름다웠다. 다른 많은 꽃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저 소년을 무지개의 사자라 부릅시다.”
서양에서는 지금도 붓꽃을 무지개의 사자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다 한다.
-아이리스 부인
중세 이탈리아의 수도 프로렌스에 아이리스 부인이라는 미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명문 귀족 출신이요, 마음씨 착하고 고귀한 성품으로 프로랜스 사교계에서 여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직 소녀 시절에 양친의 뜻에 따라 로마의 왕자와 결혼을 하였으나, 이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결혼이 아니어서 남편과는 서먹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결혼 생활 10년째에 남편인 왕자가 병사하자 부인은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부인의 아름다움은 소녀 시절보다 더욱 빛나서 뭇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고 그 중에는 결혼을 신청해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누구에게도 응하지 않고 푸른 하늘만 동경하여 몸도 늘 하늘빛 옷으로 단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인이 언덕 위를 쓸쓸하게 산책하고 있는데 젊은 화가 한 사람이 부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부인은 이 화가와 친해져서 그의 화실에도 드나들게 되었다. 이때 화가는 열심히 결혼하기를 청하였으나 부인은 좀처럼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부인은 화가의 열정에 감동해서 “정 그러시다면 조건 하나를 붙여서 받아드리겠어요.”하고 말하였다. 그 조건이라는 것은, 나비가 날아와서 앉을 정도의 꼭 살아 있는 것 같은 꽃을 그리는 것이었다. 화가는 그로부터 딴 사람같이 되어 정열을 기울여서 그림을 그려 며칠 만에 꽃 그림을 완성하였다. 부인은 그 그림을 보고 크게 만족했으나 일부러 “그런데 이 그림에는 향기가 없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 순간 어디선지 흰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서 이 그림의 꽃에 살포시 앉더니 키스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이겼구나!”하고 화가는 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부인도 그만 눈을 반짝이면서 화가의 품에 안겼다 한다. 아이리스는 이 부인과 화가 사이에 처음 있었던 키스의 향기를 간직해서 지금도 향기롭게 풍기고 있다 한다.
59. 석류(안석류화)
중국 한나라 때 장건이라는 사람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안석국에 들러서 석류나무의 아름다운 꽃을 보고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때 사람들은 안석국에서 가져왔다고 하여 이 꽃을 안석류화라고 불렀고, 오늘날에는 석류라고 불린다.
-부처님과 석류
아주 먼 옛날, 마귀할멈이 어린아이들을 자꾸만 잡아먹기에 부처님은 이것을 막기 위해서 마귀할멈의 딸 하나를 감추어 버렸다. 그러자 마귀할멈은 울며 불며 야단이었다. 부처님은 이것을 보고 마귀할멈에게, “수많은 너의 아이 중에서 한 아이가 없어졌다고 해서 그렇게도 야단인가?” 하였다. 그 말에 마귀할멈은 벌컥 화를 내면서, “부처님은 자비하다고 알고 있는데 그 무슨 무자비한 말씀입니까?” 하였다. 이때 부처님은 숨겨 두었던 마귀할멈의 딸을 내주면서, “할멈아 네 아이를 데리고 가거라. 네 새끼는 그리도 아끼면서 남의 소중한 자식은 마구 잡아 먹느냐? 이제부터는 아이를 잡아먹지 말고 이것을 먹도록 하여라.” 하고 타이르며 석류 하나를 주었다. 마귀할멈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삼세 동자의 안목
율곡 선생이 세 살 때의 일이다. 외조모 이씨 부인이 석류를 가르키면서,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 하고 물으니 율곡은 서슴지 않고 답하기를 홍(紅)피(皮)낭(囊)리(裏)쇄(碎)홍(紅)옥(玉)이라 하였다. 즉, 빨갛게 익어 터진 석류의 모양이 붉은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다가 붉은 구슬을 빻아서 놓은 것과 같이 보인다 라는 뜻이다. 율곡은 세 살 때 벌써 천재의 기미를 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60. 소나무(정이품이 된 소나무)
어느날, 바쁜 정사에서 잠시 벗어난 세조대왕은 속리산을 찾았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마침내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왕을 모신 행차는 소나기를 피하기로 했다. 그러나, 연(왕이 타는 가마)을 멘 병사들이 허리를 한껏 낮추었지만 연의 윗부분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연이 걸려 있으니 임금이 직접 연 밖으로 나와 걷거나 연이 흠뻑 비를 맞아야 했다. 신하들은 행여 왕이 비를 맞을까 봐 걱정이었다. 왕은 이 사실을 알아치라고 말했다.
“어허! 이 나무에 연이 걸리는구나.”
왕이 소나무를 바라보고 말하자 신기롭게도 나뭇가지가 하늘로 번쩍 들리더니 연이 소나무 밑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되었다. 왕과 신하들이 비 한방울 맞지 않을 만큼 소나무는 웅장하게 날개를 펴고 있었다. 이윽고 한여름의 장대같은 소낙비는 지나갔다. 왕은 자기의 말 한마디에 연이 걸리지 않도록 가지를 쳐든 이 우람한 소나무에게 정이품에 해당하는 대우를 하도록 지시했다. 정이품 소나무는 제 벼슬을 지키기라도 하듯이 지금도 고고하게 버티고 서 있다.
61. 수국(백 낙청의 시)
당나라 시인 백낙청이 아직 군수로 있을 때였다. 어느날 홀연히 관내의 초현사에 들렸더니 주지가 백낙청을 보고, “선생님 이 절 안에 이름도 모르는 아름다운 꽃이 있는데 보시렵니까?” 하고는 지금 한창 보기좋게 피어 있는 꽃을 보여주었다. 백낙청은 한동안 그 꽃을 바라보고 있다가 시 한 수를 지어 주지에게 보여 주었다.
어느 해인가 이것을 선단상에 심어
조만간 옮겨 심어 범가에 이른것은
인간 세상에 있다 하나 사람들이 몰라보니
그대에 주기를 자양화라 이름짓네.
하는 의미의 시이다. 이로부터 이 꽃을 자양화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62. 수련(물의 요정이 된 셋째딸)
옛날 그리스의 어느 곳에 수정의 세 자매가 있었다. 이 소녀들은 모두 꽃과 같이 아름다웠다. 나이가 차서 혼기가 가까워 졌기에 어느날 어머니 여신이 세 딸을 불러놓고 앞으로의 희망을 물었다. 그랬더니 큰딸은 물의 신이 되겠다 하고, 둘째는 물을 떠나지 않고 신의 규율에 따르겠다고 하고, 마지막으로 막내는 오직 신과 어버이가 명하는 대로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생각한 끝에 큰딸은 외해의 수신, 둘째는 내해의 신, 막내는 파도가 치지 않는 샘물의 여신으로 만들었다.
샘물의 여신이 된 막내는 여름이 되면 아름답게 치장을 하고서 수련꽃으로 피어난다고 한다. 이로부터 이 꽃을 “워터 님프(물의 요정)”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연인의 화원
옛날 머나먼 어느 나라에 큰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 언덕에는 아름답고 넓은 화원이 있고, 그 주위에는 훌륭한 산책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 화원은 연인의 화원이라고도 불리고, 많은 연인들의 이곳에 모여들어 아름다운 꽃을 꺾어서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달아주고 하였다.
그런데 이 꽃밭의 한구석에는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하는 곳이 있고, 거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여 있었다. 그곳은 높고 험한 바위 절벽이고, 그 절벽 밑에는 바다같은 큰 강이 흐르고 있어서 다만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그 꽃을 꺾지는 못하였다.
어느날 어떤 연인 한 쌍이 놀러 왔다. 여자가 남자를 보고 장난삼아 말했다.
“정말 아름답군요. 저 꽃 하나만 꺾어 주지 않겠어요.”
그러자 남자는 놀라면서 “당치도 않은 소리. 저곳에는 나는 새가 갈까 사람은 가지 못하오.” 하였다. 다시 여자는, “당신은 참 용기가 없군요.” 하면서 빈정거렸다. 그 말에 남자는 화가 나서, “용기가 없다구! 그렇다면 내가 가서 꺽어 오지.” 하고는 절벽 위로 기어 올라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자는 그런 말을 한 것을 후회하고 놀라면서, “나는 꽃도 필요없어요. 농담으로 한 말이니 제발 빨리 돌아오세요.” 하고 외쳤다. 그러자 남자는 아랑곳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남자는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막 꽃이 손 끝에 닿을락말락한 곳에서 남자는 그만 발을 헛디디고 천길 만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여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다.
그로부터 아무도 이 암벽 가까이에 가지 않았으나 아름다운 꽃은 철이 지나면 이 강물에 떨어져서 그 중 하나는 흰 수련으로 화했다고 한다. 그리고 물위에 지금도 흰 그림자를 빛고 있는 것은 애처러운 사랑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63. 수선화(여사화)
옛날 중국의 장리교라는 곳에 요모라고하는 문필에 뛰어난 여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동짓달 추운 밤에 요모는 별이 땅에 떨어져서 한 무더기 수선화로 피어나는 꿈을 꾸었다. 어찌나 아름답고 향기가 좋은지 꽃을 따서 먹기도 하였다.
이 꿈을 꾼 얼마 후 요모는 딸을 낳았다. 이 아이는 매우 예프고 어머니를 닮아 글재주가 뛰어났다. 어머니는 꿈을 따라 아기의 이름을 관성여사라고 지었다. 이 사실이 전해져서 수선화를 여사화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능파선
옛날 중국에 미인 견씨가 살았다. 이 미인에게 유나라 왕 조조의 아들 조식이 은근히 욕심을 품고 있었는데, 조식의 형인 문제도 또한 남 몰래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드디어 문제가 먼저 그녀를 궁중에 불러들여서 결혼했다. 조식은 안타까운 사연을 말할 수도 없어 매일매일 가슴을 태우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견씨는 우연히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문제는 아우 조식의 심중을 짐작하고 견씨가 쓰던 베개를 기념으로 주었다. 조식은 이 베개를 매일 밤 품에 안고 잤는데, 어느날 꿈에 견씨의 영혼을 만났다. 견씨는, “나는 본시 낭군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나이다. 이 베개는 내가 집에서 쓰던 것을 시집올 때 가져온 것, 이제 낭군께 드리나니 나를 본 듯 쓰셔요.”하고는 홀홀히 사라졌다. 시인이기도 한 조식은 얼른 이것을 수선화에 견주어, “능파 아장아장 걸어오다.”하는 유명한 시를 지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수선화를 능파선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나르시스와 노랑수선화
옛날 서양의 어느 나라에 나르시스라는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과 누이동생은 쌍둥이로서, 남매는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매우 사이 좋게 지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병을 얻어 누이동생이 세상을 떠나자, 청년은 누이동생의 죽음을 슬퍼하고 날마다 정처없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누이동생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어느날 우연히 연못가를 거닐고 있는데, 그 물 속에 뜻밖에도 누이동생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닌가. 청년은 반가와서 “아! 너는․․․” 하면서 손을 넣으니 순간 누이동생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이상하게 여겨서 손을 빼니 다시 누이동생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기의 얼굴이 물에 비친 것이 었으며 누이동생을 너무나도 그리워하는 나머지 누이동생의 얼굴로 잘못본 것이다. 그후 청년은 날마다 이 연못가에 와서 물속을 들여다보았는데, 신도 이를 가엾게 여겨서 언제까지나 누이동생의 그림자를 볼 수 있게 나르시스를 물가에 피는 한포기의 꽃으로 피어나게 하였다. 이것이 물가에 수심을 머금고 피어 있는 노랑수선화의 조상이라고도 한다.
-나팔수선화
옛날 나르시스라고 하는 왕자가 있었다. 이 왕자는 금발에 백옥 같은 살결을 가졌으며, 그 훤칠한 모습은 매우 늠름해서 보는 사람마다 감탄했다. 잘생긴 외모에다 왕자라는 고귀한 지위를 갖추었으니 누구보다도 행복할 것이언만, 신은 완전한 것을 인간에게 주지않는 것인가, 나르시스는 불행하게도 우둔하였다. 그는 날이면 날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울이나 맑은 물에 자기의 얼굴을 비쳐보고는 혼자 만족하고 있었다.
어느날 왕자는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사냥을 하러 나섰다. 그 숲에는 맑은 샘이 있었다. 샘을 본 왕자는 그 물가에 앉아서 물위에 비치는 자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기의 모습에 홀딱 반해 버린 왕자는 신하들에게, “나는 해가 질 때까지 여기 있을 터이니 너희들은 마음내키는 대로 사냥을 하여 오라.” 하고 명령하였다. 신하들도 왕자의 자만과 그 어리석음을 마음속으로 비웃고 탄식하면서 명령대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저녁놀이 질 무렵에 신하들이 사냥을 마치고 샘가에 돌아와 보니, 왕자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다만 왕자가 앉아 있던 자리에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다. 신하들은 더욱더 놀랐다. 꽃이 왕자의 목소리를 내어 신하들에게 “놀라지 마라. 나는 수선화로 변한 것이다. 나는 나의 어리석음을 신께 벌받아 이렇게 된 것이다. 돌아가서 아버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시오.” 하고 말했다. 이 전설로서 서양의 꽃말은 「자존」 이라는 의미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64. 쑥부쟁이(값진 희생과 지순한 사랑)
옛날 한 마을에 가난한 대장장이가 있었는데, 그는 11남매나 되는 아들딸들 때문에 열심히 일했지만 먹고 살기가 힘이 들었다. 대장장이의 큰딸은 동생들이 쑥나물을 좋아해 항상 산에 올라가 쑥나물을 캐왔다. “쑥 캐러 다니는 불쟁이네 딸”이라 해서 사람들은 그녀를 쑥부쟁이라고 불렀다.
어느날 쑥부쟁이는 산에 올라갔다가 상처를 입고 쫓기는 노루 한 마리를 숨겨주고 치료까지 해주었다. 노루는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쑥부쟁이가 산중턱에 내려왔을 때 조금 전 노루를 쫓던 사냥꾼이 멧돼지를 잡는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칡덩굴로 사냥꾼을 구해 주었다. 사냥꾼은 서울의 박재상의 아들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뒤 가을에 다시 찾아오겠다며 떠났다. 쑥부쟁이는 청년의 씩씩함에 호감을 갖고 다음 가을에 그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열심히 일하면서 어서 가을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가을이 돌아왔다. 쑥부쟁이는 청년과 만났던 산으로 매일같이 올라갔지만 청년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렇게 가을이 몇 번 지나가고, 쑥부쟁이의 그리움은 더해만 갔다. 그러는 사이 동생은 둘이나 더 늘고, 어머니는 병을 얻어 근심이 말이 아니었다.
어느날, 산에 올라간 쑥부쟁이는 골짜기에 흐르는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떠놓고 산신령께 기도를 드렸다. 이때, 몇 년 전에 구해 준 노루가 나타나서 노란 구슬이 세 개 담긴 보랏빛 주머니 하나늘 주며 말했다.
“구슬을 입에 물고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쑥부쟁이는 우선 구슬 한 개를 입에 물고 소원을 말하였다.
“우리 어머니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어머니의 병이 완쾌되었다. 다시 가을이 오자 쑥부쟁이는 청년을 그리워하며 구슬을 입에 물고 소원을 빌었다. 청년은 나타났지만, 이미 결혼을 해서 자식 둘이나 되었다. 청년은 쑥부쟁이와 함께 살자고 했지만, 쑥부쟁이는 속으로 다짐을 했다. 저 청년은 착한 아내와 귀여운 아들이 있으니 그를 다시 돌려보내 주어야 한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구슬로 가슴 아픈 소원을 말해 버렸다.
그녀는 그 청년을 하루도 잊지 않은 채, 세월이 가도 결혼도 하지 않고 동생들을 보살피며 산에 올라가 나물을 캐고 살았다. 그런 어느날, 발을 헛디딘 그녀는 그만 아래로 굴러떨어져 죽고 말았다. 쑥부쟁이가 죽은 뒤로 그 산등성이에는 더욱 많은 나물들이 무성하게 자라, 사람들은 쑥부쟁이가 죽어서도 동생들의 주린 배를 채워 준다고 믿었다. 보랏빛 꽃잎과 노란 꽃술은 쑥부쟁이가 지니고 다녔던 주머니 속의 구슬같이 생겼으며, 목을 길게 뺀 것은 아직도 옛 사랑에 대한 기다림처럼 보인다.
65. 엉겅퀴(소녀의 원혼)
영국의 어느 시골에 젖소를 기르는 한 소녀가 있었다. 어느날 소녀는 쇠젖을 항아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도회지에 팔려고 나갔다. 소녀는, 오늘은 젖을 판 돈으로 스웨터와 양말, 아버지 어머니께 드릴 선물도 사야겠다고 이 궁리 저 궁리하면서 길을 걷다가 그만 길가에 있는 엉겅퀴 가시에 다리를 몹시 찔려 깜짝 놀라 뛰는 바람에 쇠젖을 모두 쏟고 항아리마저 깨뜨려 버렸다. 소녀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그만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후 소녀의 혼은 젖소로 변해서 길가에 있는 엉겅퀴를 모두 뜯어먹었다. 그런데 엉겅퀴 중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잎에 흰 무늬가 있는 풀이 한 포기 있었다. 이상해서 뜯어먹지 아니하고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노라니 꽃봉오리에서 소녀가 미소를 띄고 있었다. 이로부터 이풀은 젖엉겅퀴라 불리어지고, 소녀의 원을 위로해 주는 꽃이라는 동화를 간직하게 되었다 한다.
66. 연꽃(연꽃의 만다라)
옛날 일본의 어느 귀족의 딸이 선림사라는 절에 들어가서 비구니가 되었다. 그때 소녀는, “나는 비구니가 되어 아미타불을 친견하지 않고서는 결코 문밖을 나서지 않겠다.” 하고 서원을 세웠다. 그리고 약 한 달이 지나서 한 비구니가 어디서 찾아왔다. 그 비구니는 보기에 어딘가 기품이 있고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비구니는 그 소녀를 보고, “나는 그대에게 정토의 아미타불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100다발의 연줄기를 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소녀는 즉시 아버지께 말하고, 아버지는 다시 임금님께 아뢰어서 연줄기를 모아 그 소녀에게 보내 주었다. 소녀가 기뻐하면서 비구니에게 갖다 바치니 비구니는 손수 하나하나 연줄기를 꺾고 그 속에서 올실을 뽑아냈다. 그리고 새로 샘을 파고, 그 물에 연줄기의 올실을 씻으니 찬란한 오색광채가 나는 아름다운 실이 되었다. 그러고 5~6일이 지나니 또 한 사람의 비구니가 찾아와서, 먼저 왔던 비구니가 실을 만든 것을 보고 서북쪽에 베틀을 차리고 비단을 짜기 시작하였다.
얼마 안 가서 비단이 짜여졌는데, 그 비단에는 그락 정토의 모양이 모두 짜여져 있어서 소녀는 놀라고 기뻤다. 그러고 옆을 보니 비단을 짜던 비구니는 어디론가 사리지고 없었다. 이때 첫째번 비구니가 나타나서 소녀를 보고, “나는 그대의 지성에 감동해서 여기에 왔노라. 그대는 이것으로 오래오래 삼도의 고를 떠날 수 있을 것이오. 부처님을 잘 섬기시오.”하고 말했다. 소녀는 놀라서 “고맙습니다. 도대체 큰 스님은 어디서 오셨으며, 또 나중의 스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간곡히 물었다. 그러자 비구니는, “나는 서방의 교주, 그리고 나중의 비구니는 관음대사입니다.” 하고는 유유히 서천으로 날아갔다 한다. 속담에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무슨 일이나 성심 성의를 고 일심으로 정진하면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교훈이 되겠다.
-소녀의 화신
옛날 아리비아에 푸른 물이 솟아나오는 우물을 가진 마음씨 착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이 우물은 차고 또한 맛이 좋아서 이곳을 지나가는 길손들은 누구나 한번은 이 물을 마시고 가게 마련이었다.
그런던 어느날, 남루한 차림을 한 젊은이가 지나가다가 물 한 그릇을 청하였다. 소녀는 서슴없이 물을 떠다 젊은이에게 주었다. 이 거지 차림의 젊은이는 사실은 아리비아의 왕자로서, 민정을 시찰하기 위하여 일부러 초라한 행색을 하고 각 지방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젊은이는 고마워서 품속에 간직하였던 향수병을 꺼내어 물그릇에 향수를 한 방울 떨어뜨려 주고 떠났다. 이로부터 이 물그릇에서는 늘 아름다운 향기가 풍기고, 이 그릇으로 물을 마시면 향기로운 물을 마실 수 있었다.
그후 왕자가 왕비를 구하러 각 지방을 돌아다니느 길에 이 우물터에 오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이 지방 장관은 소녀를 쫓아보내고 자기 딸을 우물가에 앉혀 놓았다. 그로부터 우물가에는 욕심쟁이 장관 딸이 지키고 있어서 길 가는 사람들이 물 한 모금 얻어마시는 데 많은 돈을 내어야만 했다.
이 무렵, 하루는 거지 꼴을 한 왕자가 나타나서 물을 청하니 욕심쟁이 딸은, “너같은 거지가 이 우물을 마시다니 될 말인가.” 하면서 비웃었다. 왕자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얼마 후 정장을 한 왕자가 일행을 거느리고 다시 우물가에 와서 물을 청하였다. 욕심쟁이 딸은 물그릇에 입을 대다가, “그릇도 다르고 향기도 없는걸.” 하면서 옛날의 물그릇으로 물을 떠오라고 하였다. 장관은 당황하여 우물 임자인 소녀가 어느 연못가에 있는 것을 찾아내어 물그릇만 빼앗고 소녀는 연못 속에 빠뜨려 죽였다. 장관은 딸은 이번에는 옛날 소녀가 가졌던 물그릇으로 물을 떠서 왕자에게 바쳤다. 왕자는 만족해 하면서, “과연 이 그릇이 틀림없군. 이 그릇의 주인을 이리로 불러 오너라.” 하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장관의 부하가, 소녀는 이미 연못에 빠져 죽었다고 알렸다. 왕자가 깜짝 놀라 연못으로 달려가니, 연못에는 전에 없던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 있었다. 소녀가 죽어서 연꽃으로 변한 것이다.
67. 옥잠화(선녀의 비녀)
옛날 중국땅에 피리를 아주 잘 부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예전에는 잘 살았지만 불행한 일을 당하여 집도 돈도 없고, 가족도 하나 없이 오직 피리만 불며 지냈다.
하루는 그가 외딴 정자에 앉아 구슬프게 피리를 불고 있는데, 갑자기 달빛이 대낮처럼 밝아지면서 어디서인지 향기가 풍겨 오더니 어느 사이에 그의 곁에 한 선녀가 서 있었다. 그는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라 피리 부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 그러자 선녀는, “피리를 불어주셔요. 저는 당신에게 피리 부는 것을 배우러 온 달나라의 선녀입니다. 이 밤이 새기 전에 당신이 알고 있는 가락을 모두 들려주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하면서 재촉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고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곡조를 하나하나 멋지게 불어 나갔다. 그와 선녀는 밤이 깊어 가는 것도 모르고 서로가 피리 소리에 심취하여 있었다. 이윽고 그가 피리를 멈추었을 때는 이미 달이 서산에 기울어져 있었고 먼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선녀는 깜짝 놀라, “아름다운 곡조를 드려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제는 떠나야 하겠습니다.”하고 떠날 차비를 하였다. 그는 이대로 헤어지기가 너무나 서운하여, “선녀님 떠나신다니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오늘의 기념으로 무엇이든지 하나를 남겨두고 가시면, 저는 그것으로 위안을 얻을까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선녀는 두말없이 머리에 꽂고 있던 옥비녀를 뽑아 사나이의 손에 쥐어 주고는 하늘로 훌쩍 올라가 버렸다. 선녀가 비녀를 주고 가면서 땅에 떨어뜨리면 안 된다고 하였지만, 그는 엉겁결에 그만 비녀를 정자 아래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선녀가 사란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비녀를 주으려고 정자 밑으로 내려갔으나 웬일인지 그 옥비녀는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는 연보라빛 꽃 한송이가 피어 있었다. 이 꽃이 바로 옥잠화이다. 이 꽃이 막 필무렵 봉오리를 자세히 보면 꼭 옥비녀같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68. 은방울꽃(용사에 핏자국에 핀 꽃)
옛날 그리스에 레오나르드라는 용감한 청년이 있었다. 어느날 산길을 걷다가 잘못하여 낮에도 아주 컴컴한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청년은 거기서 화룡과 부딪쳤다. 그 눈은 대접같이 크고 번득거리고 혓바닥은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이 용감한 청년도 이런 모습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나, “네까짓 놈에게 질까보냐.” 하고 꼬박 사흘밤 사흘낮을 싸워서 드디어 화룡을 퇴치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몸에도 깊은 상처를 입고, 그 상처에서 빨간 피가 흘러떨어졌다. 그리고 이 떨러진 핏자국에서 어느 사이에 이름도 모르는 아름다운 하얀꽃이 피어났다. 바로 이것이 은방울꽃이다.
꽃말은 장쾌․쾌락이고, 또 서양에 서는 이 꽃이 행복의 복귀를 의미하기도 한다. 가톨릭교도 사이에서 성모의 눈물이라고 애칭되고 있는 것도 이 꽃이 청정한 데서 생긴 말이라 한다.
69. 은행나무(전설에 얽힌 노거수)
은행나무는 재생력이 강하고 화재에도 잘 견디는 성질이 있어서 도처에 노거수가 있고, 따라서 이 나무에 얽힌 사연이나 전설도 많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옛날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자 그 자리에서 피가 쏟아지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끝내는 나무를 베지 못했다 한다. 그리고 정미의병 때에는 일본 군대가 절을 불태워버렸으나 이 나무만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 또 나라에 큰 변이 있을 때마다 소리가 난다고 한다. 고 종이 승하하셨을 때는 큰 가지 한 개가 부러졌고, 8․15, 6․25, 4․19, 5․16 때에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고 한다.
강원도 영워군 영월면에 있는 은행나무는, 이 부락민들은 이 나무 속에 영사가 살고 있기 때문에 개미가 얼씬도 못하고 닭이나 개도 이 나무 가까이에 접근하지 않는다고 하고 어아이들도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고 한다. 자식을 얻기 위해 부인들이 치성을 드리는 신목으로 되어 있다.
충남 금산군 추부면의 은행나무는, 이 나무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고, 잎을 삶아서 먹으면 노인들의 해소병이 없어진다고 한다. 옛날 어떤 사람이 무더운 여름밤에 이 나무 밑에는 개를 데리고 잤는데 호랑이가 도망쳤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은행나무는 그 가지를 삶아서 해소병의 약으로 쓴다 한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에 있는 은행나무 속에는 귀 달린 뱀이 살고 있어 이 나무를 자르는 사람은 이 뱀의 해를 받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경북 선산군 옥성면에 있는 은행나무는 당산목으로 동제를 지내고 있으며, 옛날에는 새들도 가지에 않지 않았다고 하며, 밋밋한 가지를 탐내어 잘라 갔던 사람들이 며칠 지나면 다시 이 나무를 찾아와서 제사를 드리는 예가 흔했다고 한다.
이들의 전설이나 관습은 누가 만들어낸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귀중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 덕분에 이 나무들이 피해를 면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을 향유할 수있었음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70. 인삼(효자와 산삼)
아주 먼 옛날 어느 두메산골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마음씨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총각이 있었다. 이 총각은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산에 가서 땔감을 모아 오고, 밤이면 틈틈이 글을 읽기도 하면서 늙은 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그는 늘 이웃 사람들로부터 어질고 착실한 총각이라고 칭찬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나 가난한 살림이라 병석에 누워 계시는 어머님께 충분한 약을 쓰지 못하는 것을 항상 죄송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뒷산에 올라가서 땔감을 모으고 있는데 새끼 사슴 한 마리가 후닥닥 튀어 나오더니 겁에 질린 눈초리로 총각 곁을 맴돌면서 무언가 애원하는 듯하였다. 총각이 유심히 새끼 사슴을 살펴보니, 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어 유혈이 낭자하고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보기에 딱하고 가련해서 우선 급한 대로 저고리의 안깃을 찟어서 솜으로 피를 닦아내고 헝겊으로 상처를 동여매주고는 땔감으로 긁어모은 가랑잎 속에 뉘어주었다. 그러는 순간에 한 포수가 헐레벌떡 다가오더니, “총각, 지금 이곳에 뛰어온 사슴을 보지 못하였소?” 하면서 다그쳤다. 총각은 천연덕스럽게 “네, 봤지요. 피를 흘리고 쩔뚝거리면서 바로 저 건너 숲속으로 달아났으니 지그 곧 쫓아가면 잡을 거요.” 하고 시치미를 뗐다. 포수는 총각이 가리키는 숲속으로 사슴을 쫓아 달리기 시작하였다. 총각은 잘못하다 애처로운 사슴이 생명을 잃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재빨리 사슴을 지게에 얹고 땔감으로 덮어 숨겨 가지고 집으로 데려와서는, 헛간에 내려놓고 물을 먹이고 먹이를 주며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사슴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먹이도 잘 먹지 않더니 차츰 사람을 따르게 되고 먹이도 잘 먹게 되었다. 하루 이틀 지나는 사이에 상처도 아물고, 뜰로 뛰어나오기도 하고 재롱을 부리기도 하였다. 병석의 어머니도 사슴을 무척 귀여워하고 한가족같이 지내게 되었다. 이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가오자 새끼사슴도 이제는 의젓한 큰 사슴으로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날 밤 어머니의 꿈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더니, “나는 이 뒷산을 지키고 있는 산신령이다. 너희 모자의 정성이 갸륵해서 너희들에게 복을 점지하고자 하니 내일 그 사슴을 뒷산에 풀어 주어라. 그러고는 사슴을 따라 어느 바위 밑에 가면 산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어머니는 하도 신기하여 옆에서 자고 있는 아들을 깨워 꿈 이야기를 하였다. 아들은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나서, “사실은 저도 산짐승은 산에서 살아야지 인가에서 기를 것이 아니라 여기고, 이제는 산으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입니다. 내일 산에 데려가 풀어 주지요.” 하였다.
다음날, 총각은 한 겨울 동안 같이 지냈던 정을 아쉬워하면서 사슴을 데리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사슴도 이별을 슬퍼하듯이 총각의 옷깃을 물고는 어디론가로 곧장 끌고 갔다. 이윽고 어느 산모퉁이를 지나고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 큰 바위 앞에 이르더니 발을 멈추고 주둥이로 바위틈의 마른풀을 헤치고 쿵쿵거렸다. 총각이 알아채고 자세히 살펴보니 이게 웬일인가, 거기에는 꿈에도 구하려고 애쓰던 삼삼이 굵직한 뿌리를 반쯤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총각은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어쩔줄 몰라하다가 지난밤 어머니의 꿈 이야기를 생각하고 산삼을 곱게 캐어내어 품에 안았다.
이 때 사슴은 몇 번이고 머리를 끄덕이고 뒤를 돌아 보고 석별의 정을 아쉬워하면서 숲속으로 사라졌다. 총각은 감사한 마음으로 집에 와서는 정성을 다하여 정갈하게 산삼을 다려 어머니께 올렸다. 어머니는 산삼을 잡수신 덕분으로 병세가 날로 좋아져서 봄기운과 더불어 완전히 건강한 몸이 되고 총각은 더욱 희망을 가지고 농사 일과 글공부에 열심했다. 하늘은 무심치 않고 사슴의 생명을 구해준 이 총각의 지성에 감동하여 복을 내려주신 것이라 하겠다. 이 옛이야기는 옛날부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전설이다.
71. 자귀나무(다시 찾은 남편의 사랑)
어느 마을에 황소같이 힘이 센 두고라는 이름의 청년이 살고 있었다. 가난한 두고의 집은 차츰 생활의 여유를 가졌다. 주위에서는 결혼을 하라고 했지만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두고는 언덕을 넘다가 꽃들이 만발한 집 한 채를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그 집 뜰로 들어섰다. 꽃구경에 한참 정신이 팔려 있을때 부엌문을 열고 한 처녀가 나왔다. 두 사람은 시선이 마주쳤다. 사랑을 느낀 두고는 언덕을 넘으면서 꽃 한 송이를 따서 처녀에게 주며 아내가 되어 달라고 말했다.
소씨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두고는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어느날 읍내로 장을 보러간 두고는 그만 어느 과부의 유혹에 빠져 며칠씩 집을 비우게 되었다. 두고의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백일기도를 했다. 백일째 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말했다.
“언덕 위에 피어 있는 꽃을 꺾어다 방안에 꽂아 두어라.” 다음날 아침 두고의 아내는 산신령의 말대로 꽃을 꺾어다 방안에 두었다. 밤늦게 돌아온 두고는 그 꽃을 보고 추억에 사로잡혔다. 두고는 가기가 아내를 얻기 위해서 꺾어 바쳤던 그 꽃임을 알았다. 두고는 그제야 아내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가를 깨달았다. 그 꽃으로 안해 잃었던 남편의 사랑을 다시 찾은 것이다. 사람들은 이 꽃을 야합수(野合樹),또는 합혼수(合婚樹)라고 지어 불렀다.
72. 자두나무(동방삭의 재치)
옛날 중국에 동방삭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 사람이 복숭아 세 개를 먹고 무려 3천년을 살았다는 전설의 인물이다.
하루는 동방삭이가 한 제자를 데리고 먼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목이 말라 제자를 시켜 길가 자두나무 곁에 있는 집에 가서 물을 얻어오도록 하였다. 제자는 그 집에까지 가기는 하였지만 집주인의 이름을 몰라서 무엇이라고 불러야 좋을지 망설이다 그냥 되돌아왔다. 동방삭은 그 집 주인의 이름이 이박이라고 가글쳐 주며 다시 물을 얻어오라고 하였다. 제자는 하는 수없이 그 집 대문 앞에 가서 주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주인이 나와 동방삭 일행을 반가이 맞아 들였다. 그리고 그 주인은 어떻게 나를 알고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동방삭은 서슴지 않고, 때까치들이 자두나무 아래로 날아와 앉은 것을 보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이는 때까치의 다른 이름은 박로(博勞)인것에서 박(博)자를 따고 자두나무 이(李)자를 따서 이박인줄 알았다고 하니, 동방삭의 재치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73. 작약(제국공주의 향수)
고려 충렬왕의 왕후는 원나라의 제국공주였다. 제국공주는 어느날 수련궁 향락의 뜰을 거닐다가 함박꽃이 뜰에 가득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시녀에게 꽃 한 가지를 꺾어오게 하여 그 꽃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고향이 그리워서였을 것이다. 공주는 그로부터 병석에 눕더니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다.
-파에온 공주의 넋
옛날 파에온이라는 공주는 왕자를 먼나라 싸움터에 보내고는 혼자 살았다. 공주는 이제나 저제나 왕자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다가 늙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눈먼 악사 한 사람이 대문앞에서 노래를 부르기에 귀기울여 들으니, 왕자는 고국과 자기를 기다리는 공주를 그리워하다가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왕자는 죽어서 모란꽃이 되어 이국땅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공주의 슬픔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공주는 악사의 노래속에 나오는 머나먼 이국땅을 찾아가서 모란꽃으로 변한 왕자 곁에서 떠나지 않게 해달라는 공주의 갸륵한 정성은 받아들여져서 공주는 함박꽃으로 변하여 왕자의 화신인 모란꽃과 나란히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한다. 모란꽃, 함박꽃의 학명에 paeonia라는 속명을 붙인 것은 이런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74. 장미(화형자에 피어난 꽃)
서양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다. 옛날 제이라아라는 유태의 아름다운 소녀가 하무엘이라는 건달 청년의 구애를 받아 주지 않았더니, 하무엘은 앙심을 품고 소녀를 마녀라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소녀는 관에 불려가 화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때 신이 억울하게 죽게된 이 소녀를 가엾게 여겨 타오르는 불길을 잡아 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이 화형틀의 기둥에서 싹이 트고 잎이 나서 붉은 꽃과 흰꽃이 피어 무죄한 소녀는 구출되어 이 꽃 밑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이 꽃이야말로 인류가 에던 동산을 쫓겨난 후로 처음핀 꽃이고, 붉은 것은 불이 붙은 나무토막에서, 흰 것은 아직 불타지 않은 것에서 피어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장미가 언제부터 재배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구구하나 기원전 2000년대에 있었다고 하는 바빌론의 궁전에서도 장미가 재배되었다고 하고, 또, 1923년 독일의 에바렌스 교수가 그리스에서 발굴한 벽화 가운데에도 장미꽃이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장미의 재배 역사는 오래 되었으나 원예식물로 재배하게 된 것은 1500년경이고, 영국과 프랑스가 품종 개량에 힘써서 오늘의 장미의 기초를 만들었다. 영국은 장미를 국화로 삼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장미
옛날 비너스에게 아토니스라는 애인이 있었다. 무슨 일로 이 아토니스가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비너스는 놀라고 당황해서 이를 구하려고 하다가 잘못하여 장미의 가시를 밟았다. 빨간 장미는 그 피가 떨어진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야기로는 아토니스의 죽음을 슬퍼하여 흘린 눈물이 흰장미에 떨어지자 흰 꽃이 빨갛게 변했다고도 한다. 꽃말이 「불타는 연심」인 것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장미
옛날 큐피드가 그 어머니인 사람의 여신 비너스의 사랑 이야기를 알고, 이것이 세상에 알려질 것을 꺼려서 입밖에 내지 못하도록 침묵의 신 헤포그라테스에게 부탁하였다. 신은 이것을 승낙하였으므로 사랑의 신 큐피드는 그 사례로 장미꽃을 선사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로마 사람들은 말조심이라는 징표로 연회석의 천정에는 꼭 장미를 조각하게 하고, 16세기 중엽에는 로마 교회에서도 그 참회실에 이 꽃을 걸게 되었다고 한다.
-장미 전쟁과 원한
서양사에서 이야기거리를 남기고 있는 장미 전쟁은 1455년에서 1485년에 이르는 30년 간 영국의 명문 요크가와 랭커스터가 사이에 일어난 왕위 계승의 싸움인데, 요크가는 백장미, 랭커스터가는 홍장미를 가문으로 하고 서로 싸운 것이다. 이 전쟁은 매우 칠열해서 1461년 3월 29일 타운트 촌에서 의 싸움에서는 3만 6천명이나 전사하였다 한다.
그리고 그 시체를 묻는 묘지에 기념으로 장미를 심었는데, 꽃이 피니 백과 홍이 꽃잎에 섞여 나서 전쟁의 원한이 꽃에까지 스며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75. 제비꽃(그리스 신화)
옛날 해의 신 아폴로가 이아라는 아름다운 소녀와 양치기 소년 아찌스의 사랑을 질투하여 이아를 꽃으로 만들어 버렸다. 바로 이것이 제비꽃이라고 한다.
다른 얘기에는, 주피터 신이 은근히 미녀인 이아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주피터의 아내가 화가 나서 이아를 암소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가여운 생각이 들어 암소가 뜯어먹을 풀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것이 제비꽃이라 한다. 제비꽃을 그리스말로는 이오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삼색제비꽃의 유래
아주 먼 옛날 선녀가 봄바람을 타고 하계에 내려와 어느 넓은 들판을 이러저리 헤매다가 잡초 사이에 한 포기의 제비꽃이 피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선녀는 이 제비꽃을 보고,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가졌으면서 이런 쓸쓸한 잡초지에 자라고 있는 것은 가엾다 하면서 꽃 곁에 다가서서 키스를 보냈다. 이로부터 이 꽃에 선녀의 모습이 비치어 사람의 얼굴 모습과 닮아졌다고 한다. 이 전설로서 서양 사람들은 이 꽃을 사랑의 신성을 말하는 소녀들에게 견준다. 또 꽃이 아래를 향해 피어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는 것같이도 보여서 꽃말은 「사고」, 「나를 생각해 주세요」등이다.
76. 진달래(선녀와 나뭇꾼의 사랑)
하늘나라 꽃밭을 가꾸는 선녀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예쁜 꽃을 심고 싶은 마음에서 산으로 살며시 내려왔다가 그만 벼랑에 떨어져 피투성이가 되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나무꾼이 선녀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다 정성스럽게 치료를 해주었다. 선녀는 온갖 정성을 다해 자신을 간호해 주는 나무꾼이 좋아져서 결혼을 했다. 선녀는 나무꾼의 아내가 되어도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가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괴로웠다. 선녀는 예쁜 딸까지 낳고, 아기의 이름을 달래라고 지었다.
어느날, 예쁜 꽃이 온 산자락에 빨갛게 피어나던 날 선녀는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렸다. 슬픈 세월이 흘러 선녀를 그리워하던 나무꾼은 늙고 병들고, 달래는 어느새 어여쁜 처녀가 되었다. 그런 어느해 봄, 심술 사나운 사또가 고을 원님으로 부임해 왔다. 사또는 달래를 데려다 둘째부인이 되어 줄 것을 명령하였다. 달래가 거절하자 마침내 사또는 달래가 말을 듣지 않았다는 죄로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다음날 다시 묻는 사또의 질문에 달래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화가 난 사또는 달래를 끌어내 여러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목을 쳤다. 달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쫓아와서 울부짖다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소르라치게 놀랐다. 달래의 시체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파란 하늘에서 빨간 꽃송이가 함박눈처럼 쏟아져 내려 달래를 부르며 울부짖다, 죽은 나무꾼의 시체 위에 쌓여 꽃무덤을 만들었다. 그후 나무꾼의 무덤에서는 해마다 빨간 꽃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달래의 이름과 나무꾼의 성을 따서 이 꽃을 진달래라 불렀다.
77. 차나무(보도와 바꾼 한종발의 차)
유비가 소년 시절에 강남 지방을 여행했는데, 그 때 여관에서 차 장수가 좋은 차를 팔고 있었다. 유비는 자기 어머니가 차를 지극히 좋아하시는 것이 문득 생각나서 어떻게 해서든지 차를 구해서 어머니께 갖다드려야겠다고 마음먹고 그 값을 물으니 엄청나게 비싸서 자기의 재력으로는 도저히 엄두를 못낼 형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유비는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린다는 일념에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보도를 허리에서 풀어 주고 사정사정하여 한 종발의 차와 바꾸었다.
이윽고 여행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오니 홀로 계신 어머니는 아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여행 중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뻐하였다. 이때 유소년이 어머니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명차를 구해 왔다고 말하니, 어머니는 차항아리를 어루만지며 크게 기뻐하고, 이런 명차는 물이 좋아야 제 맛을 낼 수 있으니 낼일 강 건너 좋은 샘물을 길어 와서 다려 마시자고 하면서 소중히 간수했다. 유소년은 어머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여행에서 얻은 피로가 말끔히 가셔지는 듯했다.
이튿날 새벽, 유비는 하인을 시켜 나귀 등에 물동이를 싣고 강 건너 마을 샘터에 가서 물을 길러 오게 하는 한편 숫불을 피워 물 끓일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어머니가 차항아리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아들에게, “얘야, 내가 노자도 넉넉히 주지 못했는데 어떻게 이런 값진 차를 구해 왔느냐?” 하면서 의아한 얼굴로 다그쳤다. 유소년이 숨길 수 없어서 자초 지종을 말하니 어머니는 정색을 하면서, 얘야, 너의 성의는 고맙다만 그 칼은 우리집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보가 아니냐. 그리고 너의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 너는 그 칼로써 검술을 익혀서 대성하라고 신신당부한 유언이 있었거늘 네 어찌하여 그 유언을 저버리고 그러한 경솔한 짓을 하였느냐?“ 하면서 꾸짖고 ”나는 이차를 마시지 않을 것이니 이 길로 바로 강남에 가서 상인에게 사정을 하고 칼을 돌려받아 오너라.“하였다.
유소년은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곧 강남으로 가서 간신히 상인을 찾아 보도를 되돌려 받았다고 한다. 그러한 장한 어머니가 있었기에 유소년이 후일에 한무제로 대성하게 된 것이다.
78. 채송화(꽃이 된 보석들)
보석을 유난히 좋아하는 여왕이 있었다. 모든 세금을 보석으로 바치라는 명령에 백성들의 한숨과 원망 소리는 높아만 갔다. 어느날, 여왕의 소문을 들은 한 노인이 동쪽 나라에서 찾아왔다. 그 노인은 큰 상자 열두 개 속에 보석을 가득 채워서 코끼리 등에 싣고 와서 여왕을 만나 보석을 보여 주었다. 여왕은 그 오색 찬란한 빛에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 였다. 여왕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그 보석을 주겠소?” “예, 여왕마마! 이 상자 속에 든 보석 한 개와 사람 한 명씩 바꾸어 주십시오.”
여왕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상자 안의 보석은 여왕의 백성들을 다 바꿀 정도로 많았다. 마지막 한 개의 보석이 남았다. 노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 보석은 제가 가지고 가겠습니다. 이제 여왕님께는 제 보석과 바꿀 사람도 없으니 말입니다.” 여왕은 어떻게 해서든지 마지막 한 개마저 갖고 싶었다. 여왕은 물었다.
“무슨 좋은 생각이 있으신지요?” “그렇습니다. 이 한 개의 보석과 여왕님고 바꾸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사람이 필요하니까 좋고, 여왕님은 보석을 좋아하니까 서로 손해가 가지 않겠지요?” 노인의 말에 여왕은 얼른 승낙해 버렸다. 여왕은 이 한 개 남은 보석을 받아들이자마자 그 보석은 폭발해 여왕은 놀라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커다란 보석이 폭발하며서 흘러나온 작은 보석들이 이리저리 굴러가더니 제각기 제 빛깔대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석처럼 피어난 꽃을 사람들은 채송화라고 불렀다.
79. 철쭉꽃(수로 부인과 철쭉)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가 꽃과 같이 아름다운 예쁜 수로라고 하는 부인이 살고 있었다. 그 부인은 꽃을 유난히 사랑했다.
어느해, 수로 부인의 남편이 원님이 되어 그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험한 길을 며칠이나 걸어야 하는 아주 먼 곳이었다.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아주 높은 절벽 아래에서 쉬게 되었다. 때는 오월이라 그 벼랑에는 철쭉꽃이 만발해 있었다. 수로 부인은 그 꽃을 가져가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높은 곳에 피어 있어서 꺾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한 노인이 소를 끌고 가다가 수로 부인을 보았다. 노인은 수로 부인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물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저 벼랑 위의 꽃이 너무도 아름다워 한 송이 꺾어 가고 싶은데 꺾을 수가 없군요.”
그 말에 노인은 벼랑 위로 올라가 철쭉꽃 한 송이를 꺾어가지고 내려왔다. 노인은 그 꽃을 부인에게 바치고 헌화가를 읊었다.
삼국유사에 씌어진 이 이야기는 꽃 이야기중 가장 오래 된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80. 청미레덩굴(이승에서 다시 만난 부부)
착하고 일 잘하는 복동이라는 머슴이 있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일가친척도 없는 그는, 부지런하고 기운이 세어서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복동이는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는 날이면 유난히 무서워했다. 순간적으로 치는 번개 속에서 칼로 내려치는 험상궂은 사나이, 그리고 울부짖는 여인의 모습을 보곤 했다. 복동이의 괴로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느 해 봄, 복동이는 주인의 심부름으로 이웃고을에 갔다가 단오놀이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난히 눈에 띠는 처녀가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은 똑같이 놀랐다. 그녀는 복동이의 환상 속에 나타났던 바로 그 연인 이었다. 처녀는 이웃 마을에서 제일 부자인 갑부의 무남독녀였다. 그런데 순녀도 복동이와 똑같은 환상을 보아온 터였다.
“어쩌면 우리는 전생의 업보를 지니고 태어난 것 같으오.”
순녀는 자기 아버지가 무엇인가 알고 있을 것 같아 복동이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복동이를 보는 순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이 마당에 너희들에게 무엇을 숨기겠느냐!”
그것은 벌써 20여 년이 지난 세월이었다. 순녀의 아버지는 장사를 하느라 강원도 산골을 돌아다니다 길을 잃었다. 인가를 찾던 그는 외딴집 하나를 발견하였다. 호롱불이 켜 있는 방에서는 두 남녀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호기심에 봉창을 뚫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두 남녀가 빨간 열매를 입에 물고 다정스럽게 속삭이고 있었다. 뛰어들어간 그는 칼로 남자를 베었다. 그리고 여인을 덮쳤다. 그러나 반항하는 여인의 뜻대로 하지 못하자 여인마저 죽이고 말았다. 갑자기 번개가 치고 천둥 소리가 온 산야를 울렸다. 그는 그 집에 불을 질러버리고는 고향으로 돌아와 장가를 들어 순녀를 낳았다. 그로부터 2년후 아내는 원인 모를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런데 순녀는 크면서 그 여인을 뚜렷이 닮아갔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린 벌이로구나. 순녀는 내 딸이 아니라 원수를 갚고자 태어난 그 여인이로구나.’ 이렇게 괴루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내던 차에 칼로 베어 버린 사내의 모습을 한 복동이가 나타난 것이다.
“내 이제 다한 목숨이니 어서 나를 죽여 주게나. 그리고 두 사람이 못 이룬 사랑을 이루게나!”
두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순녀의 아버지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말았다.
양지바른 곳에 아버지를 묻은 순녀는 복동이와 함께 길을 떠났다. 전생에 자기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었다. 아버지가 알려 주었던 곳을 찾았지만 수십년이 지나서인지 집이라고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양지쪽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였다. 앞에 널려 있는 꽃나무에 열린 빨간 열매에 눈길이 멈추었다. 딱딱했지만 매끄럽고 여간 빨갛지 않았다. 복동이가 열매를 따서 순녀에게 말했다.
“내가 맛있는 열매를 줄 터이니 눈을 감고 입을 벌려 봐!”
눈을 감고 빨간 입술을 살포시 여는 순간 복동이는 순녀의 그 모습에 더없는 사랑을 느껴 열매 대신 자기의 입술을 가져 갔다. 사람들은 사랑을 전해 주는 이 빨간 열매를 명감나무라고 불렀다.
81. 체꽃(소녀의 넋이 꽃이 되어)
옛날 알프스산 속에 피차라고 부르는 요정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마음씨 착한 소녀였으나 그 행동거지는 남자와 같이 쾌활하고 늘 산 속을 뛰어 다니면서 약초를 캐다 모으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때 유행하고 있는 전염병에 잘 듣는 약초를 발견하여 기뻐하고 있었다.
어느날 피차가 약초를 뜯어 냇물에 씻고 있는데 한 양치기 소년이 다가와서 자기의 병을 고쳐 달라고 애원하였다. 피차는 이 소년을 불쌍히 여겨서 자기가 발견한 약초를 주고 손바닥으로 소년의 가슴을 쓰다듬어 주니 병은 단번에 나았다. 소년은 대단히 기뻐하였다. 물론 피차도 기뻤다. 소녀는 이 소년을 처음 본 순간부터 어쩐지 마음이 설레고 남모르는 사랑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마음을 소년에게 하소연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피차는 어느 마을을 지나가다가 자기가 사랑하고 잇는 소년에게 이미 애인이 있다는 사시을 알았다. 피차의 괴로움과 슬픔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소녀는 집에 돌아와서 울면서 지내다가 그만 병들어 죽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은 소녀를 불쌍히 여겨 소녀가 생전에 산야의 꽃과 약초를 따고 다니던 것을 생각해서 한 송이 아름다운 꽃으로 태어나게 하였다. 이것이 체꽃이다.
체꽃의 줄기는 양치기의 지팡이와 닮았다 한다.
82. 치자나무(천사가 준 선물)
옛날 영국에 가데니아라고 하는 아름답고 순결한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깨끗한 흰빛 일색으로 칠해지기를 바랄 만큼 흰빛깔을 좋아하고, 그것은 또한 영원한 순결에 대한 정열이기도 했다.
어느 겨울밤 소녀가 눈이 하얗게 내린 광경을 상상하고 있는데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서 내다보니, 창밖에는 흰꽃을 한아름 안고 있는 천사가 서 있었다. 천사는 “나는 순결의 천사입니다.” 하더니 다시, “나는 천사의 사명으로 이 세상의 순결한 처녀를 찾고 있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참으로 순결한다고 생각하고 나는 이 지상에 내려왔습니다.” 하고는, 기념으로 한 개의 종자를 꺼내어 소녀에게 주었다. 이 종자야말로 천사의 정원에만 있고 지상에는 없었다.
소녀는 꿈같은 마음으로 이 종자를 흰 화분에 심어 정성껏 길렀다. 얼마 안 가서 싹이 나오기에 이것을 땅에 옮겨 심고 잘 자라길 빌었다. 일년이 지나자 나무는 크고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이 꽃은 정말 가데니아의 순결의 영혼인가 싶을 만틈 아름다웠다. 소녀는 말할 수 없는 행복에 젖어서 이 꽃을 바라보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천사가 다시 나타나서, “가데니아, 그대가 키운 꽃은 이제부터 지상에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오. 그리고 도 그대가 바라는 순결에 어울리는 사람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가데니아는 놀라서, 나의 남편이 될 만한 순결한 사람이 정말 어딘가에 있을까요? 어떤 사교 모임에가 보아도 순결한 남자라곤 없습니다.“ 하니 천사는 약간 부끄러워 얼궁를 붉히고,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오.“ 하더니 놀랍게도 천사는 아름다운 청년으로 변하였다. 가데니아도 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랐으나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흰 꽃과 향기 속에서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꽃이 가데니아꽃이라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꽃 모양이 술잔 같다 해서 치(巵:술잔)자에 목자를 붙인 치자(梔子)로 쓰고 있다. 한방약에서는 자(子), 실(實), 인(仁)이 붙은 것은 나무 열매를 가리키는 것이다.
83. 칡(산삼과 칡덩굴)
수도암은 경북 금릉군 증산면 수도리 수도산 100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이절은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다. 대적광전, 약광전, 선방, 요사, 나한전 등 5동의 건물과 보물 제 296호 약사여뢔좌상, 보물 제297호 3층석탑, 보물 제 307호 비로자나불을 간직하고 있는 전국 유수의 기도 도량으로 손꼽히는 절이다. 이 비로자나불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고, 조각의 수법의 불국사 석굴암 부처와 닮은 우수 작품이고 키는 석굴암 부처보다 약 80cm 낮기는 하나 석굴암 부처에 버금간다고 한다.
절 창건 당시 이 부처를 경남 거창군 가북면에서 조성하여 높고 어떻게 운반할 것인가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홀연히 노승 한 분이 나타나서 부처를 등에 업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윽고 절 어귀에 다다랐는데, 그만 칡덩굴에 발이 걸려서 노승은 넘어지게 되었다. 노승은 화가 나서 산신을 불러서, “앞으로는 이 산에 칡이 못자라게 하라.” 하고 호통을 쳤다. 그로부터 이 산에는 칡이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칡은 어디서나 자라는 식물이나, 이 산에서는 절을 중심으로 약 300m 주위의 지역에서는 칡은 볼 수 없고 능선을 넘으면 칡이 자라고 있는 이상한 현상을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84. 할미꽃(불쌍한 할머니의 넋)
아주 먼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한 할머니가 두 손녀를 키우며 살았다. 큰손녀는 얼굴은 예뻤으나 마음씨가 나빴고, 둘째손녀는 마음씨가 아주 고왔으나 얼굴이 못생겼다. 둘은 자라서 큰손녀는 가까운 이웃 마을 부자집으로 시집가게 되었고, 둘째손녀는 산너머 아주 먼 마을의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둘째손녀는 먼 데로 시집 가면서도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할머니를 꼭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큰손녀는 자기의 체면도 있고 하여 자기가 할머니를 모시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철석같은 약속을 하고서도 큰 손녀는 할머니를 모시지 않았다. 급기야 할머니는 둘째손녀가 시집가고 나서는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렇건만 큰손녀는 할머니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리하여 할머니 굶주리고 서러운 나머지 둘째손녀를 찾아 산너머 먼 마을로 길을 떠났다.
할머니는 산고개를 올라가다가 그만 기진맥진한여 둘째손녀가 살고 있는 집을 저 멀리 바라보며 쓰러지고 말았다. 굶주린 할머니가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둘째손녀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러나 싸늘한 할머니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땅을 치고 발을 구르며 슬퍼한다고 해서 한번 가신 할머니가 다시 살아 돌아올 리는 없었다. 둘째손녀는 자기 시집의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할머니를 고이고이 장사지내 드렸다. 그 다음 해부터 봄이 되면 마음씨 나쁜 큰손녀에게 구박받아 길에서 세상 떠난 할머니의 넋이 꽃으로 되어 양지바른 무덤가에 피어났는데, 이 꽃이 할미꽃이다.
85. 해당화(양귀비의 잠)
양귀비는 당나라의 미인으로 현종(713~756)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어느날 현종이 심향정에 나아가서 평소에 지극히 사랑하는 양귀비를 불렀다. 이때 마침 양귀비는 술에 취해 방에 누워 있던 중이라 왕의 부르심에 깜짝 놀라 일어나가니는 했으나 발이 휘청거려서 좀처럼 걷지를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시녀의 부축을 받고 왕앞으로 나갔다. 이때 현종이 물끄러미 바라보니, 두 볼은 붉게 달아 있고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카락 한두 올이 앞이마에 나부끼는 모습은 말 할 수 없이 예쁘기만 하였다. 왕은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양귀비에게 “너는 아직 취해 있느냐?” 하고 물으니 양귀비는 “해당화의 잠이 아직 깨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얼굴이 붉게 된 자신을 해당화에 비유해서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이때부터 중국에서는 해당화를 수화라고 부르기도 했다. 꽃말은 원망, 온화 이다.
-두보와 해당화
중국에서는 해당화가 옛날부터 사랑받는 꽃이고 시, 그림의 소재가 많이 되어 왔으나 유명한 시인 두보만은 평생동안 단 한 번도 이 꽃을 소재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자기 어머니의 이름이 해당부인이라서 아무리 꽃이라고 하지만 자기 어머니 이름을 부르기가 송구해서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효심에 감탄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해당화는 바닷가에 피는 해당화가 아니고 산에 있는 아그배를 말한다.
86. 해바라기(해님을 동경하다 죽은 형제)
옛날 어느 곳에 형제가 살고 있었다. 이 형제는 해님에 대한 동경과 사랑으로 가득했다. 형제는 어떻게 해서든 해님을 만나려고 했다. 형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동생에게 해님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형은 동생이 미워졌다. 형은 밤중에 자는 동생을 그만 찔러 죽이고 해님에게로 갔다. 해님은 악한 인간은 하늘에 올 수 없다며 형을 밀어 아래로 떨어뜨렸다. 해님에게 밀려 떨어진 형은 그 자리에서 큰 풀이 돋아나더니 노란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노란 꽃은 해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해가 떠 있는 쪽만 바라보며 피었다가 지곤 하였다.
87. 호박(다시 찾은 황금 범종)
옛날 인도에 황금 범종을 만들다가 완성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스님이 한 분 있었다. 스님은 부처님 앞에 다시 한번 인간 세계에 나아가 황금 범종을 완성하고 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스님의 뜻을 갸륵하게 여긴 부처님은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스님이 만들던 범종이 땅에 묻혀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자기가 살던 절터는 찾았지만 모든 것이 흔적조차 없었다. 문득 노란 꽃이 눈에 띄었는데, 그 꽃은 꽃잎과 꽃술까지 스님이 만들려던 범종과 똑같았다. 스님은 그 밑을 파보니 범종이 묻혀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드디어 스님은 황금의 범종을 완성하였다. 종을 칠 때마다 그 노란 꽃에는 신기하게도 황금의 열매가 하나씩 맺히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덕을 의미한 호박꽃이었다.
88. 황매화(황낭자의 지략)
조그만 어촌에 황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무남독녀 외딸이 행복하게 자라고 있었다. 황낭자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심어 준 청년이 있었지만 황부자는 그가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바닷가에서 만난 청년과 낭자는 황낭자의 거울을 반으로 나누어 가진 뒤 후일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이때 황낭자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한 도깨비가 황부자집을 망하게 만든 후 돈많은 사람으로 둔갑해 황낭자를 외딴섬에 있는 도깨비굴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황낭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섬 주위에 온통 가시나무를 심었다. 황낭자는 갖은 위기를 모면하고 장래를 약속한 청년이 와주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청년이 수소문 끝에 황낭자를 찾았으나 구출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황낭자가 자기와 나누어 가진 거울을 맞추어 대적하라고 알려주었다. 청년은 낭자로부터 거울 반쪽을 받아 자기 것 과 마춘 뒤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가 거울에 햇빛을 반사시켰다. 도깨비는 밝은 빛을 보자 얼굴을 감싸면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도깨비가 죽자 가시투성이었던 나무는 가시도 없어져 버리고 줄기도 부르럽게 변해 버렸으니, 그 가시나무가 곧 황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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