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의권 (形 意 拳)
형의권의 기원
형의권의 유래에 대하여서는 달마대사의 창권설과 남송 악비장군의 창권설 및 산서의 민간무술가 희제가(姬際可)의 창권설 세가지가 있는데 그중 희제가의 창권설이 근거가 충분하며 가장 유력하다.
문자 기재에 의하면 창권자 희제가(姬際可)는 자가 룡봉(龍峰)[륭봉(隆鳳)설도 있음]으로서 당시 이름난 권법가였다고 한다. 시초에는 권법을 의권(意拳)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는데 훗날 권법이 유명해져 배움을 청하는 자가 많았고 몇대 이후에 하남의 마학례(馬學禮)와 산서의 대룡방(戴龍邦)이 진수를 얻고 가장 유명하였으며 권법이 점차 하남 마파(馬派)와 산서 대씨(戴氏)의 남북 2대 유파를 형성하였고 후세인들은 전해진 심의육합권(心意六合拳)을 제가(際可拳)권이라고 불렀다.
형의권의 시조
현재의 형의권은 산서 대씨(戴氏)심의육합권에서 기원하였고 시조는 대씨심의권 승전자 대룡방(戴龍邦)의 제자 이노농(李老農)이다.
이노농[李老農]의 본명은 이락능(李洛能)이고 하북 심주(深州)사람. 상인으로서 어려서부터 무예를 즐겼다. 우연하게 산서 태곡(太谷)현에 장사를 갔는데 대씨가정에 유능한 권법이 비밀전수된다는 소문을 듣고 하던 일을 마다하고 대씨집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몇달후의 어느날 행운스럽게 대룡방선생에게서 심의권의 기본권법 오행권의 벽권(劈拳)을 전수받았는데 남다른 의력과 꾸준함으로 대룡방선생의 눈에 들어 웬간해서는 외성인에 전수하지 않던 대씨의 가전(家傳) 심의육합권을 남김없이 전수받았다.
훗날 이노농선생의 형의권 조예는 이미 한계를 넘었는데 발경하여 상대를 날려버린 후 땅에 닿기도 전에 상하지 않도록 받아안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노농은 수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후세의 대다수 형의권의 고수와 달인은 모두 이노농의 문인이였다. 그 진수를 터득한 자는 8명의 제자로서 특히 유명했던 종사는 하북의 "반보붕권(半步崩拳)" 곽운심(郭雲深)과 류기란(劉奇蘭) 그리고 산서의 차식형의(車式形意) 시조 차의재(車毅齋)와 송식형의(宋式形意) 시조 송세영(宋世榮) 등 이다. 이노농으로 하여 하북에 형의권이 전해졌고 또 산서에 새로운 유파의 형의권이 나타났다. 동일한 기원을 근거로 하여 습관적으로 이노농이후의 하북, 산서의 형의권과 대씨권을 모두 형의권으로 칭하고 북파로 명하며 하남 마파심의권은 많이는 심의육합권 혹은 간단히 심의권이라고 부르고 남파라고 명명한다.
이노농이 형의권 수련경지가 한계를 넘었고 형의권의 전파뿐만 아니라 심의육합권을 개진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므로 형의권이라고 하면 이노농을 시조로 존칭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형의권이란 많은 경우에 이노농이후의 북파 형의권을 가리킨다.
형의권의 유파와 지파
이노농종사를 시작으로 문하 득의제자들의 전파를 거쳐 오늘날 형의권은 거대한 발전을 가져와 4대유파를 위주로 한 크고작은 지파를 형성하였고 하북과 산서의 광활한 지역에서 성행하고 있다.
하북형의권유파중에서 류기란종사 문하에 이존의(李存義)와 장조동(張兆東) 그리고 장점괴(張占魁)가 진수를 깨달아 유명하였고 곽운심문하에는 계승인이 많았고 저명했던 승전자도 적지 않았는데 진정 진수를 얻었고 한계를 초월한자는 곽운심종사의 재전(再傳)제자[즉 도손(徒孫)] 손녹당(孫祿堂)선생이다. 현대 대성권(의권)의 창시자 왕향재(王薌齋)도 곽운심의 마지막 제자[주1]이고 종사의 정수를 얻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상 곽운심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고 형의권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으니 진수터득이라 함은 어쩐지 용의를 벗어나기 어려운 설이다.
산서형의권유파는 차의재의 차식(車式)형의권에서 포학관(布學寬)이 뛰여났고 송세영의 송식형의권에서 송철린(宋鐵麟)에 이어서 송광화(宋光華)와 송호신(宋虎臣)이 유명하였다.
형의권의 특성과 달인들
유로서 강을 제어하는 내가권의 특성과 어긋난다고 느낄정도로 형의권의 타격은 강경(剛勁)발력이 팔괘장, 태극권과 구별되는 선명한 특징이다. 그 강대한 살상역 때문에 중국무술계에는 또한 "형의권수련이 1년이면 사람을 때려죽인다"는 설이 있다.
반보붕권(半步崩拳) 곽운심(郭雲深) - 곽운심은 이노농선생의 제1득의제자로서 후세에 가장 영향역 있는 종사이며 그에 관한 전설은 중국무술계의 한계를 넘어 민간에까지 널리 알려져 미담으로 전해지는 중국전통무예의 전기적인물이다. 곽운심의 형의권은 조예가 깊어 형의권의 가장 기본보법인 반보(半步)에 기본권법인 오행권(五行拳)의 붕권(崩拳)을 가미한 반보붕권으로써 도전하는 적수와 상대하였는 데 언제나 단 한 주먹에 손쉽게 승전하였다고 하여 "반보붕권으로 천하를 다졌다"는 미칭으로 무술계에서 존경받았다. 비록 겉보기에는 간단한 반보붕권[주2]이지만 곽운심종사의 단 일격에 이미 7,8가지 부동한 경도(勁道) 심지어는 10여개의 경도가 숨어있었던것이다. 가장 평범한 수단으로 가장 비범한 재주를 보여준 전형으로 이소룡선생의 말을 빌면 "기교를 무형속에 숨김으로써 가장 간단한 동작으로 최대한의 내용물을 보여주는것"인데 곽운심종사의 무예경지가 어느 정도 였음을 넉넉히 짐작할수 있다.
차식(車式)형의권 - 산서 형의권계에서는 일명 태곡(太谷)형의권이라고 하는데 이노농의 득의제자 차의재선생이 창시한 또 다른 센스의 형의권지파이다. 차의재종사의 무예경지도 나중에 화경(化勁)[주3]의 단계에 이르러 의외의 기습도 손쉽게 본능적인 발경으로 방어와 반격을 순간적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송파(宋派)형의권의 특징 - 송식형의권이 기타 형의유파와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은 발경후 사지의 선명한 떨림 즉 두경(抖勁)이다. 다시말해서 순간적으로 탄성작력(彈性炸力)이 폭발(爆發)하는 것이다.
송식형의권은 이노농의 또 다른 한 득의제자 송세영이 창시한 독특한 형의권법으로서 시조 송세영에서 송철린(宋鐵麟) 이어서 송광화(宋光華)와 송호신(宋虎臣)에 의하여 승전하여왔다.
손녹당(孫祿堂) - 곽운심대사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지만 형식상으로는 곽대사의 도손이다. 여느 사람들은 한가지 내가권법을 터특하기 위하여 한평생을 수련하여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손녹당선생은 아주 젊어서 이미 형의 팔괘 태극 3대내가권에 정통하여 손선생의 팔괘장스승인 정정화(程廷華)종사[정식팔괘장의 시조]마저 탄복할 지경이다. 게다가 그 실전역은 남북내외가 여러문파의 한다하는 권법가들을 찾아다니면서 도전하여 모두 승전하였는데 50여년에 적수가 없었다. 아쉽게도 손선생의 무예진수를 가장 많이 터득한 아들 손존주(孫存周)[주4]대사가 세상뜬후 손선생의 손식실전무예가 거의 실전되다시피 되여버렸다.
형의권의 주요권법기술
장공은 삼재식(三才式)[삼체세(三體勢)]을 기본으로
기본권법은 오행권으로서 벽권(劈拳) 붕권(崩拳) 찬권(鑽拳) 포권(炮拳) 횡권(橫拳)
십이형권 - 시초에는 십형권 룡, 범, 원숭이, 말, ? ,닭, 익더귀(鷂)[새매], 제비, 뱀, ? , 매, 곰 등 12가지 동물의 특점을 본딴 상형권
십사타(十四打)법 - 두타(頭打), 견타(肩打)[좌우], 주타(肘打)[좌우], 수타(手打)[좌우], 과타(胯打)[좌우], 무릅타(膝打)[좌우], 족타(足打)[좌우], 미려타(尾閭打)[일명 배미(背尾)타] 등
유파마다 독특한 수련과 권법특성이 있어 서로 세부적인 권법기술과 무기술내용이 틀리는 바 위에서 소개한 내용은 형의권의 기본으로 되고 유파마다 준수하는 일반적인 단련과정과 수단이다.
주1: 또한 왕향재는 곽운심이 세상뜬 후 입문한 이름건 제자라는 일설도 있는데 대성권의 내용을 보면 심의권이나 형의권의 권법리론은 많이 인용했지만 권법기술이 아주 틀려있고 대성권은 중국전통무예가 가장 발전했던 근대에는 소문이 없었는데 근현대에 이름있던 실전무예가들이 대부분이 세상뜨고 전통무예가 심하게 파괴되던 시기에 점차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창시자 왕향재도 세상뜬 후에 유명해졌다는 것이 이상하다.
주2: 반보붕권은 형식상에서 태권도나 공수도의 범서기자세로 나아가면서 주먹찌르기와 흡사한 느낌이다.
주3: 내가권의 수련경지를 통털어 3단계로 나누는데 초급단계는 명경(明勁), 중급단계는 음경(陰勁), 고급단계는 화경(化勁)이다. 화경은 이미 동경을 넘어 신명(神明)에 가까운데 자세나 환경 그리고 상태에 구애없이 아주 본능적인 반사로써 의외의 기습에 나름대로 대처할수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차의재가 아침세수를 하는데 한 도전자가 가만히 숨어들어와서 다짜고짜 차의재의 태양혈을 타격기습하는데 차의재는 그 세수하던 자세가 거의 변함없이 근근히 얼굴부위의 화경으로써 상대를 날려버렸다고 한다.
주4: 손존주선생은 손녹당이 세상뜬후 아버지를 대체하여 제1실전무술가로 되였는데 자신의 무예가 손녹당선생의 10의 3~4정도밖에 이르지 못했다고 자백했다. 하지만 손존주 역시 일생에서 적수를 만나지 못했는데 후세인들이 그의 무예진수를 이어받은 자가 거의 없다.
출처: 오리지날 무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