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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글씨] 전국에 1200점...과연 그 솜씨는?

초암 정만순 2015. 9. 7. 09:37

 

[박정희 글씨] 전국에 1200점...과연 그 솜씨는?

 


* 매국노 이완용에 이어 최근 조선 후기의 청암 이삼만, 구한말의 석촌 윤용구 등 서예가들의 글씨 얘기를 우연히 잇달아 쓰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낯익은 글씨 가운데 하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입니다. 그는 18년간의 재임동안 전국 도처에 무려 1200여점의 글씨를 남겼습니다. 그의 글씨를 두고 흔히 '박정희체'라고 할 정도로 그나름의 필체도 있습니다. 지난 90년대 후반 그의 생애를 취재하면서 그의 청년기, 집권초기의 글씨들을 몇 점 수집한 것도 있고 해서 이번 기회에 그의 글씨 얘기를 다뤄볼 생각입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앞으로 다룰 기회도 마땅하지 않을 뿐더러 또 제가 갖고 있는 몇 점의 자료들을 온전히 잘 보관할 자신도 없어서 입니다. 모두 세 차례(상-중-하)에 걸쳐 소개할 예정인데요, 취지는 기록 차원에서 하는 것이니 혹여라도 이 점에 대해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필자 주]


제가 살고 있는 독립문 네거리에서 홍제동 쪽으로 가려면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합니다.
무악재 고개가 바로 그것입니다.
무악재는 인왕산(仁王山)과 안산(鞍山, 毋岳) 사이에 있는 나지막한 고개로,
그 명칭은 조선 개국에 공이 큰 무학대사(無學大師)무학에서 연유했다고 합니다.
무악재는 평안도, 함경도 등 서북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조선시대엔 중국 사신 영접을 위해 모화관(慕華館)과 영은문(迎恩門)을 이곳에 세웠었죠.


1900년대 초 무악재. 삿갓 쓴 노인이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오고 있다


1960년대 도로확장 공사중인 무악재 고개길을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독립문 쪽에서 바라본 무악재 고개. 고개마루 왼편에 무악재 기념비가 서 있다


구한말 시절까지만 해도 이 일대에는 호랑이가 더러 출몰했다는 기록도 있는데요
,
그 때는 지금보다 경사도 가파르고 폭도 좁고 또 길도 구불구불했던 것을 보입니다.
그러다가 일제 때 당초 5m였던 것을 7m로 넓히고 고개도 낮추고 또 포장도 했더군요.
<동아일보> 기사(1972. 2. 12)에 따르면, 해방 후엔 두 차례에 걸쳐 손을 봤는데요.
1956년엔 폭을 15m로 넓혔으며, 또 10년 뒤인 1966년엔 대대적인 공사를 했더군요.
우선 노폭을 35m로 두 배 이상 대폭 넓히고 높이도 3.2m 정도 낮추고 또 직선화를 했더군요.
그리고는 이를 기념해 당시 불도저로 불린 김현옥 서울시장 명의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무악재 도로확장공사 기념비(1966. 11. 8)


그런데 이 기념비 전면에 새겨진
무악재세 글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입니다.
당시로선 제법 큰 공사였다고 쳐도 이런 데까지 대통령 글씨를 새긴 건 좀 그렇습니다.
(* 제 생각엔 이 정도 공사라면 구청장, 아니면 서울시장 정도가 적절해 보입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엔 박 대통령이 재임시절에 비석·현판·액자 글씨가 산재해 있습니다.
18년간이나 통치했으니 역대 대통령들에 비해 물리적으로 그 수가 많을 수도 있겠지만
박 대통령 그 자신이 휘호를 써서 주는 것을 즐겼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반면 그의 이런 취향을 파악한 아랫사람들이 자주 글씨를 요청했다는 얘기도 있구요.

그러면 박 대통령이 공공장소에 남긴 글씨는 어디에, 몇 점이나 될까요?

1989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집 <위대한 생애>를 펴낸 민족중흥회에 따르면,
당시 총무처는 박 대통령의 일과와 행적을 기록한 <박정희 치적사>라는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이 문서에는 박 대통령의 글씨가 언제 어디서 어떤 내용으로 씌었는지를 소상히 밝혔는데,
박 대통령은 18년 재임 동안 전국 각지에 친필 1200여점을 남긴 것으로 돼 있습니다.
어림잡아 계산해도 매년 66점 이상, 매주 1점 이상씩을 쓴 셈입니다.
물량이 이 정도나 되다보니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위대한 생애> 표지


그가 재임하던 1960~70년대는 곳곳에서 이러저런 건설이 한창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루 걸러서 기공식이나 준공식, 기념식 같은 행사가 줄을 이었고,
평소 현장방문을 즐겼던 그는 그런 행사에 참석해 자신의 필적을 남기곤 했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무악재 기념비(1966)와 진해 제황산공원의 진해탑(1967)을 비롯해
진해공설운동장(1965), 언양~울산고속도로(1969), 태릉국제스케이트장(1971),
그리고 1970년 추풍령에 세운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 글씨도 그가 썼습니다.

요즘이야 많이 줄었지만 그 때는 대통령의 부처 연두순시나 시찰이 많았었지요
.
그럴 때마다 그는 방문한 기관의 성격에 맞춰 친필을 하사(?)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파월부대인 해병대사령부에 가서는 우리청룡만세!’(1965)출전준비’(1967),
농협중앙회엔 과학하는 농촌’(1966), 전매청엔 잎담배 수출증대’(1969), 문화공보부엔
유신이념의 구현’(1973), 재무부에는 저축은 국력’(1976) 같은 표어·구호성 문구를 내렸습니다.
또 민주공화당 중앙훈련원엔 이곳을 거쳐나가는 자여 조국은 너를 믿노라’(1969)를 남겼죠.

붓글씨를 쓰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의
친필 하사는 이런 분야에서 그치지 않고 문화재 등에까지 이르렀는데,
이는 그가 재임시절 민족문화 창달을 부르짖으며 문화재 복원사업을 펼친 때문입니다.
이는 나중에 그의 친일전력 등이 문제가 되면서 적잖은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사례를 보자면, 수원 화성 복원작업, 경복궁 준공, 아산 현충사 성역화사업 등인데요,
작년에 교체된 광화문현판을 비롯해 수원시 화령전(정조의 사당)의 운한각 현판,
서울 세종로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1973) 등에도 자신의 글씨를 남겼습니다.

이왕 글씨 얘기가 나왔으니 이번엔 그의 글씨 자체에 대한 얘기를 좀 해보렵니다
.
우선 그는 누구에게서 글씨를 배웠는지, 아니면 전적으로 독학으로 익힌 것이지,
또 그의 글씨의 특징은 무엇이며, 평가를 하자면 점수는 과연 몇 점이나 될지 등등.

일전에
<한겨레>가 이와 관련한 내용을 다룬 적이 있는데요, 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서예 취미는 대구사범 시절 습자시간에 붓글씨를 배우면서 시작됐는데,
당시 서예 선생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친 김용하 선생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81년 작고)의 지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다만 혹자는 훈수수준 정도라고도 하며 또 어떤 이는 배운 적이 없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글씨가 소전과는 전혀 다르다는 데는 모두 동의한다고 합니다.
실지로 소전은 정자체인 해서나 행서보다는 전서나 예서를 즐겨 썼습니다.
소전 손재형의 행서체 글씨
소전 손재형의 전서체 글씨

그러면 글씨 전문가들은 그의 글씨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어릴 때부터 글씨를 배웠고
, 또 많이도 썼는데, 그런 만큼 잘 쓴 글씨일까요?
앞서 한겨레 기사의 한 대목을 인용해볼 때 그리 후한 점수는 아니군요.
전통 서첩으로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예가 수준은 아니다고 합니다만,
배운 글씨는 아니지만 워낙 주관이 뚜렷하고 개성이 강해 그의 야물딱진
성격이 잘 드러난다”(무림 김영기, 해청 손경식)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평입니다.
다만 오랫동안 쓰다 보니 말년에 가서는 초기에 비해 많이 안정됐다고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들의 평가에 상당부분 공감하는 편입니다.

그러면 이번엔 그의 글씨가
안정돼 가는 과정을 실물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한자와 한글로 나눈 후 이를 다시 연도별로 추이를 살펴보겠습니다.
한자와 한글 가운데는 아무래도 한자가 친근하고 또 익숙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한글, 한자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글씨가 나아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 먼저 한글 필체들을 연도순으로 살펴보기로 하죠.


위 두 점은 60년대 중반에 쓴 것으로 한글로는 초기작품에 속합니다.
두 점 가운데 '무악재'는 글씨 크기의 균형도 맞지 않을 뿐더러
특히 '재'자의 경우 'ㅈ'은 지나치게 크고 'ㅐ'도 균형을 잃었습니다.
반면 법무부에 써준 '인권옹호'의 경우 상대적으로 균형이 좋습니다.
박 대통령 한글 글씨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가로 획 끝에 힘을 주는 점인데요,
'옹'자와 '호'자의 'ㅗ' 끝부분에 그런 현상이 잘 나타나 있군요.

아래 '삼일문'은 1967년에 쓴 것인데요, 둘 중에서는 위(파란 네모)의 것입니다.
세 글자 가운데 '삼'자 하나 정도 빼고는 '일', '문' 모두 조잡한 글씨랄 수 있습니다.
이 현판은 서울 종로 2가 탑골공원(한 때는 파고다공원) 입구에 걸려 있었는데요,
지난 2001년 곽태영(2008년 작고) 씨가 우경태 씨 등과 함께 끌어내려 철거했습니다.
[관련글 - 박정희 친필 '삼일문' 현판 철거한 곽태영 선생]  
아래 현판은 그후 당국이 독립선언서에서 집자(執字)하여 새로 마련한 것입니다.
박 대통령이 쓴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글씨가 고르고 또 기품도 있어 보입니다.  

둘 가운데 위는 박 대통령 글씨이며, 아래는 독립선언서에서 집자한 것임


아래의 '광화문'은 경복궁 정문 광화문 현판으로 1968년 광화문 복원 때 쓴 것입니다.
그런데 현판 종류가 두 가지군요. 박 대통령이 쓴 것은 둘 중 어느 것일까요?
정답은 '둘 다' 입니다.
한동안 봐왔던 현판은 아랫쪽 현판인데 그럼 윗쪽(파란 네모) 현판은 무엇일까요?
문화재청에 따르면, 1968년 광화문 복원 때 처음 내건 현판은 윗쪽 글씨랍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아래 것으로 교체됐는데, 정확한 날짜는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럼, 두 글씨를 한번 살펴볼까요?
우선 윗쪽 현판은 아랫쪽 현판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잡한데, 특히 '광'자가 그렇습니다.
'광'자의 'ㄱ'이 과도하게 크며, 아래 'ㅇ' 받침도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쳤습니다.
그래서였던지 나중에 아랫쪽 현판으로 다시 바꾸어 달았다고 합니다.  
윗쪽 현판이 정자체인 해서라면 아랫쪽 현판은 조금은 흘려 쓴 행서에 가깝군요.
글씨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특별히 흠잡을 데는 없어 보입니다.
(* 이 글씨는 작년에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원래의 한자 현판으로 교체 됐습니다.)

둘 가운데 위는 1968년에 쓴 것이며, 아래는 나중에 다시 쓴 것임


2010년 새로 교체된 한자 '光化門' 현판


아래 여섯 점의 한글 현판 등은 모두 1969년~1971년 사이에 쓴 것들인데요,
별 특징이 없어보이면서도 뜯어보면 자소간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바로 아래의 현충사, 충장사 두 점은 글씨체가 판연히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현충사'는 바로 위의 '광화문' 현판과 비슷한 반면 '충장사'는 다소 이례적입니다.
특히 그는 애국선열들을 모신 사당 현판에는 나름으로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넉 점의 글씨는 신년을 맞아 썼거나 신문사 창간기념일 등에 쓴 것인데,
현판 글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성이 덜 들어간 걸로 보입니다.
이 가운데 '개척과 전진'의 경우 지난 2004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6300만원에 낙찰됐다는데,
글씨로만 본다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당시 시중가는 500만원 정도였다고 합니다.  
70년대 초반무렵까지는 한글 글씨가 아직은 습작 단계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남산 중턱 백범광장에는 백범 김구 선생 동상이 한강 쪽을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백범 동상 좌우측면에는 장개석 총통이 보낸 휘호와 박 대통령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아래 왼편 글씨가 그것입니다.이 동상이 건립되던 해인 1969년에 쓴 것인데요,
글씨체로 볼 때 그의 글씨인 건 맞는데 이 무렵 다른 글씨에 비해 숙련도가 높아보입니다.
이로부터 7년 뒤인 1976년에 쓴 '조국과겨레와...'는 그의 글씨체가 완숙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래 쓰다보니 솜씨도 좋아지고 나름의 독특한 체도 터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남산 중턱 백범광장에 서 있는 백범 김구 선생 동상



다음은 그의 한자 글씨들을 한번 살펴볼 차례입니다.
참고로 1917년생인 그는 해방 당시 28세였습니다.(당시 신분은 만주군 중위였구요.)
당시 그 또래들이라면 서당은 다니지 않았으나 한문에 낯선 세대는 아니었습니다.
즉 학교나 일상생활 속에서 한자(한문)을 자연스럽게 쓰고 배우던 세대라는 얘깁니다.
그건 그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며, 실지로 그는 편지 등에서 한자를 즐겨 썼더군요.

연도별로 살펴보면, 바로 아래의 두 점은 집권 초기에 쓴 것들입니다.
'혁명완수'는 5.16 쿠데타 이듬해 정초에, '정청인화'는 다시 그 이듬해 정초에 썼군요.
당시 신분은 국가재건최고회 부의장(의장) 신분이었기에 '대통령' 세 글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두 점의 글씨들은 생각보다 수준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군요.
장삼이사도 흔히 쓸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수준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반면 아래의 70년대 들어서 쓴 글씨들은 상당히 세련미가 눈에 띕니다.
이런 글씨체가 흔히 '박정희체'로 일컬어지는 글씨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로 근대화, 새마을, 총화 등 당시 박 정권의 정치 슬로건들을 적은 것으로써,
이런 글귀들이 관공서나 공공장소에 내걸려서 정치적으로 활용됐다고 하겠습니다.

하나 짚고넘어갈 것은 이런 글귀들에서 일본제국주의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는 점입니다.
우선 '진충분의(盡忠奮義)'는 진충보국(盡忠報國)'을 연상시키며,
'국민총화(國民總和)'는 '국민총력(國民總力)'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그가 주창한 '10월 유신(維新)'이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따라 한 건 다 아시죠?
(* 물론 어쩌면 이는 그런 내용을 아는 저같은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래 3개의 글씨는 군부대를 방문했다가 현지에서 즉석에서 쓴 글씨로 보입니다.
또 어쩌면 공적 장소에 내거는 현판 같은 것보다는 부담없이 쓴 것 같기도 하구요.
그의 이런 글씨체를 흔히 '사령관체'라고도 하는 데 평소 글씨에 비하면 수준이 낮습니다.
오히려 제일 먼저 쓴, 7사단장 시절에 쓴 글씨가 나중에 쓴 두 편보다 낫군요.
군인 출신 치고는 비교적 그가 '먹물'을 많이 먹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의 집권 후반기, 즉 1970년대 중후반기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바로 아래 글씨는 의병장 의암 유인석 선생의 동상 전면에 쓴 것인데요,
1976년 강원도 춘천 공지천에 건립할 때 그가 이 글씨를 써준 것입니다.
그는 집권 기간 중에 국난기의 애국선열 현창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뒀던 것 같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 건립 및 현충사 성역화 작업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데요,
한말 의병장들의 사당 건립이나 동상 건립 등에도 관심을 쏟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그의 이런 행보에 대해 후세의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고 하겠습니다.
우선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은 그의 투철한 민족주의를 높이 평가합니다.
반면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자신의 흠결을 덮으려는 정치적 술수라는 입장도 있습니다.
실지로 그는 일본군(만주군) 장교 출신이며, 남로당 가입으로 좌익전력 시비가 있었고,
또 그의 독재정권 하에서 이 땅의 민주화가 심히 유린됐다는 비판적 평가도 있었지요.
그런 그가 애국선열들의 혼이 서린 곳에 현판 등을 쓴 것은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많았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요, 집권말기의 한자 글씨들은 그 나름의 숙련도가 높습니다.
물론 이건 서예 측면의 평가라기보다는 이른바 '박정희체'의 입장에서의 평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글씨가 일반적인 시각에서보면 형편없다는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그 또래 중에서 글줄이나 읽은 사람들은 대개 붓을 잡을 줄 알았고, 또 이 정도는 썼습니다.
그의 글씨를 화제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가 대통령을 지내면서 숱한 글씨를 남겼고,
또 그것이 시중에서 적잖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 등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무명인사가 이 정도의 글씨를 썼다면 그걸 소장하려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의암유인석선생상(춘천 공지천, 1976년)


문화예술의전당(서울 세종문화회관, 1978년 4월)


민족정기의 전당(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1979년 9월 2일)


아래 글씨는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씨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그날 그의 공식일정은 충남 서산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이었습니다.
거길 다녀온 그는 그날 저녁 청와대 인근 궁정동 안가에서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참석자는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등으로
당시 권력의 최고실세들이었습니다. 그런만큼 서로 견제와 갈등도 컸겠죠?

이미 알려진대로 이날 김재규 부장이 돌연 권총으로 박 대통령과 차지철을 쐈습니다.
이를 흔히 '10.26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그의 18년 장기집권도 막을 내렸죠.
놀랍게도 이 날(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지
만 70주년이 되는 날이랍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10.26'은 두 큰 사건이 겹칩니다.
둘 다 총격사건인 건 맞는데, 총을 쏜 사람과 대상, 또 그 의미는 결코 같지 않군요.  

그가 비명에 가면서 그의 붓글씨 쓰기도 따라서 막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아래 글씨에 적힌 날짜를 보십시오. '1979년 11월 16일'로 돼 있습니다.
그가 죽은 지 20일이나 지난 날짜인데요,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위 날짜는 여의도에 있는 전경련 회관 준공식을 하는 날이었답니다.
그래서 거기에 주려고 미리 써 둔 회호였는데 참석은 못하고 글씨만 남은 셈입니다.
집권 말기의 글씨 치고는 그리 잘 쓴 글씨 같지는 않습니다.    

창조 협동 번영(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1979년 11월 16일)


이제 이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제목에서는 마치 박정희 대통령 글씨에 점수를 매길 것처럼 썼습니다만,
글씨 전문가도 아닌 제가 글씨의 점수까지를 매기기는 좀 그렇군요.
또 보는 사람에 마다 점수가 다를 테니 제가 매겨봐야 별 소용도 없을 것 같구요.^^
요즘은 편지 대신 이메일이나 문자를 보내는 세태가 돼버렸습니다만,
좋은 측면에서 보자면 붓글씨나 편지를 쓰던 그 시절이 그리운 점도 없지 않군요...

장황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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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에 걸친 박정희 친필 현판 수난사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습니다만, 박정희 대통령이 쓴 현판 중 수난을 겪은 사례도 있습니다.
전부 두 차례인데요, 2001년 곽태영씨가 그가 쓴 탑골공원 정문 '삼일문' 현판을 철거하였으며,
또 2005년 3.1절엔 충남 서천의 양수철씨가 '충의사' 현판을 끌어내려 부수어버렸습니다.
현판 철거 후 두 사람은 "박정희가 쓴 현판이 민족의 성지를 더렵혀 철거했다"고 밝혔습니다.
공적 시설을 훼손한 혐의로 두 사람 모두 사법 처분을 받았다는 점도 여기 부기해 둡니다.

박정희가 쓴 '충의사' 현판을 철거한 후 독립기념관에서 공개한 양수철 씨(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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