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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행의 맛 - 선석산

초암 정만순 2022. 2. 4. 14:42

겨울 산행의 맛 - 선석산

 

 

 

 

 산행 : 

2022. 2. 10 (맑음)

 

 산행경로 :

세종대왕자태실 - 불광교 - 태봉바위 - 용바위 - 선석산 - 들목재 - 선석사 - 세종대왕자태실 

 

 산행인 : 

초암 그리고 한분



■ 선석산(禪石山)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과 칠곡군 약목면·북삼읍 경계에 있는 산이다.

높이는 742.4m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과 칠곡군 약목면·북삼읍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서진산(棲鎭山) 또는 누진산(樓鎭山)이라고도 불린다.

영암산(鈴岩山, 784m), 비룡산(飛龍山, 546m), 시묘산(侍墓山, 367m)과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선석산에는 사적 제444호로 지정된‘성주 세종대왕자태실(星州世宗大王子胎室)’을 비롯하여 천년고찰 선석사(禪石寺)와 자연 전망대 역할을 하는 용바위, 태봉(胎峰) 등의 바위가 있다.

바위의 형상이 용의 머리를 연상시킨다 하여 용바위라 불리는 바위는 정상으로부터 약 2분 거리에 있는데 이곳에 서면 첩첩이 쌓인 가야산과 금오산 줄기가 펼쳐지고, 낙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용바위에서 약 5분 거리에 있는 태봉바위에서 내려다보면 성주의 특산물인 참외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단지가 호수처럼 펼쳐진다.

태봉 근처에는 조선시대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19기가 묘여 있는 세종대왕자태실이 있다.

산 아래쪽에 자리 잡은 선석사는 신라 말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사찰로, 원래 지금 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신광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가 고려시대 공민왕 때 현 위치로 이전했다 한다.

그때 절터에서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를 닦는다’는 의미를 가진 ‘선(禪)’자를 넣어 선석사라 개칭했는데 이로 인해 산의 이름도 선석산이 되었다.

 

사찰에는 ‘선석사 대웅전(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13호)’ ,‘선석사 괘불탱(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57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 선석사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서진산(棲鎭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성주지방에서는 가장 큰 절이다.

 

692년(효소왕 1)에 의상(義湘)이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 창건하여 신광사(神光寺)라 하였으나, 현재보다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1361년(공민왕 10)에는 나옹(懶翁)이 신광사 주지로 부임한 뒤, 절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런데 당시 새 절터를 닦다가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 닦을 ‘선(禪)’자를 넣어 절 이름을 선석사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바위는 대웅전 앞뜰에 묻힌 채 머리 부분만 땅 위로 나와 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1684년(숙종 10)에 혜묵(惠默)·나헌(懶軒) 등이 중창하였다.

1725년(영조 1)에 서쪽의 옛터로 이건하였다가 1804년(순조 4)에 서윤(瑞允)이 신도들의 도움을 얻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고 대웅전·명부전·칠성각·산왕각·어필각(御筆閣)·정법료(正法寮) 등의 당우를 갖추었다.

세종의 왕자 태실(胎室)이 있는 태봉(胎峰)에서 약 2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 절은 왕자의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었으므로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 어필을 보관했던 곳이 어필각이었으나 그 뒤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영조 어필의 병풍은 정법료에 보관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칠성각·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집이다.

이 절의 어필각 주위에는 바람이 불면 이상한 소리를 내는 쌍곡죽(雙谷竹)이라는 대나무 숲이 있었다고 한다.

이 대나무를 잘라 만든 피리는 그 소리의 맑고 깨끗하기가 다른 피리와 비길 바가 아니었으며, 이를 교방적(敎坊笛)이라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쌍곡죽이 남아 있지 않다.

 

 

건너 봉우리엔 세종대왕 왕자 태실이 있어 예로부터 선석사는 태실 수호 도량으로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기도하고 왕조의 권력 투쟁으로 인한 태실의 변화를 지켜보아야 했다.

숱한 역사의 굴곡을 함께 하여온 선석사는 이제 성주 고장 사람들을 위한 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절로 들어오는 길엔 온통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들이 고고함을 자랑하고, 조금 높이 절집 옆 휴식 공간엔 200년이 넘어 보호수로 지정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오는 이를 맞이한다.

 

■ 느티나무 보호수

 

 

선석사 사찰 경내에 소재한 이 느티나무는 면 보호수(11-21-10-2)로 지정 되었다

풍치목으로 수령은 약200년 으로 높이는 17m나무 둘레가4.5m로 우람하고 고풍스런 자태를 자랑한다

 

 

 세종대왕자 태실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태봉() 정상부에 있는 조선전기 제4대 세종의 왕자들의 태를 봉안한 태실. 사적.사적 제444호

 

1438년(세종 20)에서 1442년(세종 24) 사이에 조성된 태실로, 세종의 적서()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1기를 합쳐 모두 19기로 조성되었다.

이 태실이 자리잡은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 이장경()의 묘가 있었던 곳으로,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묘를 이장하도록 하고 태를 안치하였다 한다.

 

태실의 전체면적은 5,950㎡로,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은 방형의 연엽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다.

즉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실패하여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과 한남군·화의군, 계유정난에 죽은 안평대군의 태무덤과 태비는 넘어져 태봉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불운을 겪게 된다.

그렇게 500여 년을 버림받았던 태무덤들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1975년 이 태실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그 두 해 뒤에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태실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형식·구조는 연엽형의 개첨석(, 밑지름 102㎝, 높이 42㎝), 구형의 중동석(, 높이 60㎝), 석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실 비문에 ‘□□(대)군명태장 황명연호년월일입석(□□() )’이라고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한편, 세조 태실은 그가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를 세워두었는데, 현재 비문은 마모되었고, 조선왕조실록에 비문이 수록되어 전한다.

1977년 태실 정비사업 과정에서 분청인화문개()·분청인화문완()·평저호()·지석()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태를 봉안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김유신 장태()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고려 왕실에서 태봉안양식()이 성립된 후 조선시대까지 그 맥락이 이어진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 태봉에 태를 봉안하기 위한 석물의 구성은 우리나라에서만 행해졌던 독특하고 독자적인 문화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태실은 왕과 태자에 대한 태실만을 조성하던 고려시대의 태 봉안 양식이 변화되어 왕과 왕비, 그리고 그 자녀의 태실을 조성하기 시작한 조선시대 최초의 왕자 태실로서 의미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 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 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곳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의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크다..

 

■ 구간별 대표 경관

 

● 세종대왕자 태실

 

 

● 불광교 - 선석산

 

 

● 선석산

 

 

선석산 - 들목재 - 선석사

 

 

선석사

 

 

 

 

◆ 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