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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삼 특집

초암 정만순 2021. 11. 5. 09:27

산삼 특집 

 

 

 

 

월간 "산"에 연재된 산삼 특집을 재편집하여 올립니다

산삼에 대한 풍부하고 정확한 지식을 얻고 생활에 응용하여 건강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 초암 -

 

 

<1> 심마니 열전]

 

등골 오싹한 계곡에서 1억2,000만 원짜리 산삼 발견

 

베테랑 심마니 원현덕, 최경찬, 배용수씨의 신비로운 산삼 이야기

등산로가 없는 7부 능선 사면에서 산삼을 찾는 심마니들.

거친 산 속을 누벼야 하기에 내구성이 좋은 옷과 장비를 선호한다.

 

“심봤다!” 대신 “여기여!”하고 외쳤다. 그것도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였다.

강원도 양구와 춘천 경계의 깊은 산자락, 한 발을 옮겨놓기가 고역이었다.

가파른 사면에는 크고 작은 나무와 넝쿨, 도깨비 뿔 같은 바위가 곳곳에 튀어나와 있어 이동하기 쉽지 않았다.

등산로가 없는 원시림 속에서는 제 아무리 베테랑 산꾼이라 해도 심마니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한국심마니협회의 추천으로 3명의 심마니가 모였다.

전국에서 추천 받은 4개 지부의 4명의 심마니가 모이기로 했으나 사정상 3명이 모였다.

협회에 소속된 200여 명의 심마니 중에서도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산삼을 잘 찾아내는 심마니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주인공은 한국심마니협회 부회장 최경찬, 가평지회장인 원현덕, 남양주 진접읍에서 온 배용수 회원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산을 좋아한다는 것.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도시로 나간 적도 있었지만, 산이 그리워 결국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협회 박만구 회장까지 4명의 베테랑 심마니가 산에 깃든다.

축지법을 쓰는지 분명 왼쪽 사면에 있었는데, 다가가보면 오른쪽 사면 위에 있고, 가면 또 왼쪽 사면 위에 있다.

등산로에서라면 20㎏ 배낭을 메고 있어도 따라잡을 자신이 있지만, 비등산로 급경사 사면에서는 어린이와 어른마냥 따라 잡기가 버겁다.

마음 같아선 계곡을 따라 오르거나 능선까지 치고 올라가, 능선을 따라 걷고 싶지만 그런 쉬운 길로는 절대 가지 않는다.

산삼이 계곡과 능선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적당히 그늘지고, 너무 빽빽하지 않아 바람이 잘 통하는 곳, 사람 발길이 과연 닿은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깊고 거친 곳을 누빈다.

 

산에 든 지 5시간 정도 되었을 뿐인데 산행 10시간은 한 것 같은 피로감이 몰려온다.

워낙 가파르고 앞을 막는 장애물이 많아 한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다.

게다가 심마니들은 “나름 천천히 가는 것”이라고 하는데 서둘러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다.

그들을 놓칠까봐 노심초사할 지경이다.

산이 낯설다. 등산로가 얼마나 편한 곳이었는지를 실감한다.

습한 곳, 낙엽 쌓인 곳이 많아 발은 푹푹 빠진다.

심마니들이 등산화가 아닌 장화를 신은 이유를 알 것 같다.

툭 튀어나온 나뭇가지와 가지가 곳곳에서 팔을 잡아당기고, 등산복이 여기 저기 긁힌다.

비슷해 보이는 사면이 계속 반복된다.

감각만으로 현 위치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GPS가 없다면 조난 당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심마니들은 어렵지 않게 위치를 파악한다.

심마니 4명 중 3명은 처음 온 곳이고 지도나 GPS가 없는데도 어렵지 않게 산을 읽어 낸다.

 

한국심마니협회의 베테랑 심마니들. 왼쪽부터 배용수, 최경찬, 박만구, 원현덕 심마니.

비포장 임도를 오를 때가 많아 4륜 지프차를 이용한다.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들이 산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절을 올리고 있다.

 

처음에는 기자도 산삼을 찾겠다는 의지가 있었으나, 6시간이 넘자 산삼은커녕 따라가는 것에만 전력을 다한다.

간혹 일행이 멀어졌다 싶으면 나무 지팡이로 나무를 쳐 소리 내어 위치를 알린다.

숲이 짙어 사진 촬영도 어렵고, 산삼도 없어 하산하자고 얘기하려는데 “여기여”하는 소리가 들린다.

설마 산삼을 찾은 건 아니겠지 하고 가보니 산삼을 찾았단다.

 

가을이라 잎이 바래고 고개를 숙인, 산삼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모양새다.

심마니들은 먼저 산삼을 앞에 두고 절부터 올린다.

산신령에 대한 감사의 의미다.

거칠게 산을 누비던 심마니들이 섬세해지는 순간이다. 

조심스런 손길로 흙을 걷어내자 산삼 뿌리가 조금씩 모양을 드러낸다.    

15년 정도 된 산삼이다.

오래되진 않았으나 뿌리의 모습으로 봤을 때 종자 자체는 확실한 산삼이라 한다.

전통 방식으로 산삼을 포장한다.

굴참나무 잎과 개동백나무 잎사귀 등을 수북하게 뜯어 산삼을 넣고 끈으로 묶어 배낭에 넣는다.

나뭇잎이 습도를 맞춰 주어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긴장감이 돌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으로 침묵하며 산삼 찾는 데만 열중하던 심마니들이 그제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고 걸음도 느릿느릿 여유롭다.

하산길, 계곡에 들러 세수를 하며 묵은 땀을 씻어내고 농담을 나누며 한 바탕 웃는다.

약초꾼과는 다른 그들만의 프로 정신이 드러난다.

◎오싹한 곳에서 몇 달 버티며 산삼 캐 

 

원현덕 가평지회장

 

원현덕(55) 심마니협회 가평지회장은 목에 수염을 길렀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산삼을 캐서 내려오다 넘어지는 바람에 뿌리가 부러져서 상품성이 없어져 그냥 먹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목에 흰 수염이 나기 시작했다.

이 수염을 깎으면 가려워서 잠을 편히 자기 어려워 독특하게도 목 수염을 기르게 되었다.

 

25년 경력의 베테랑 심마니인 그는 사계절 내내 산을 누빈다.

보통 겨울에는 일종의 휴식기에 들어가는 심마니도 많지만 그는 한겨울에도 겨우살이나 버섯을 채취하러 다닌다.

심마니이자 약초꾼이다.

 

가평군 조종면 현리에 살고 있으나 집을 나와 전국의 산을 누빌 때가 더 많다.

길게는 3개월까지 집에 가지 않는다.

큰 산에 한 번 들어갈 때 쌀과 된장, 고추장만 가지고 가서 열흘씩 산삼을 찾기도 한다.

반찬은 곰취나 더덕, 도라지 같은 산에서 만나는 것들이다.

그는 기억력이 비상해 산삼을 한 번 발견했던 곳은 GPS나 지도가 없어도 세세하게 기억한다.

“심마니는 산삼 나는 곳은 자식에게도 안 가르쳐준다고 해요. 제가 알고 있는 산삼 터가 40군데예요.

산삼 시즌에는 이런 고정적인 장소를 돌아다니죠.

즉흥적으로 산에 갈 때는 당긴다고 할까?

뭔가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지는 산을 오르는 거죠.”

 

가장 이상한 기운을 느꼈던 건 10년 전 강원도 인제의 깊은 산에서다.

높이 1,000m가 넘는 큰 산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어느 골짜기만 가면 너무 무서워 더 이상 들어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냥 그 골에만 가면 소름이 끼치고 무서웠다.

사실 그는 산에서 밤에 혼자 자는 데 이골이 나 있을 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음기가 강한 계곡이 있어요.

산을 내려와 마을에서 물어보면 대부분 6·25 때 사람이 많이 죽은 곳이에요.

낮은 야산도 그런 데가 있어요. 헌데 그런 데서 꼭 산삼이 나와요.”

 

신기하게도 심마니 여럿이 갔을 때도 동시에 그런 한기를 느끼는데, 이빨이 달달 떨리고 “아우 추워”하는 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오싹하다고 한다.

심할 경우 현기증이 나고 머리가 어지럽기도 한데, 상당수의 심마니는 이것을 못 견뎌 그 장소를 떠나고 만다. 

 

원현덕 심마니가 인제에서 1억2,000만 원 가격의 산삼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그의 심마니 인생에 있어 가장 비싸게 팔린 산삼이었다.

그는 무척 강한 오싹함을 느끼고선 분명 이 골짜기에 특별한 산삼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계곡 주변을 맴돌며 악착같이 버텨 한 달쯤 지나자 무서움이 걷혔다고 한다.

그때부터 2개월간 골짜기를 샅샅이 훑어 산삼 뿌리만 80㎝에 이르는 귀한 산삼을 캤다.

혼자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캐는 데 3일이 걸렸다.

 

원 심마니는 손재주가 뛰어난 기인으로 손꼽힌다.

산에서 가져온 목재로 공예가에 가까울 정도로 세련되게 부엉이 같은 앙증맞은 조각품을 만들어낸다.

애주가로도 유명했는데, 하루 걸러 하루 술에 취해 있을 정도였다.

한 번은 과음으로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손님에게 주기로 한 수 천만 원 가격의 산삼을 안주로 먹고는 다음날 찾아온 손님에게 무릎 꿇고 빌고서는 술을 완전히 끊었다고 한다. 

 

원현덕 가평지회장 산삼 문의 010-4781-7149



길몽으로 떼심 발견한 직감 뛰어난 심마니

 

한국심마니협회 최경찬 부회장

 

30년 경력의 한국심마니협회 최경찬(60) 부회장은 ‘몽夢을 받아 산삼을 캔 일화’로 심마니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강원도 양구 토박이인 그는 1998년 꿈에서 여자가 아이를 낳는 장면을 보았다.

분명 산삼을 점지해 준 것이라 믿은 그는 인근의 양구 ‘해산’을 찾았다.

지명과 꿈이 연관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구에서 산신제를 올리고 입산한 그는 다음날 곧장 80년 묵은 산삼 5뿌리를 캤다.

 

최 부회장은 젊은 시절 트럭 운전을 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 두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형편이 도저히 나아지지 않아 약초꾼의 길을 택해 여기까지 왔다.

당시 시골 사람들에게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강원도의 산이란 산은 다 누비고 다녔다.

 

최 부회장은 유명한 일화가 여럿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심마니들 사이에서 전설로 통하는 ‘떼심’ 이야기다.

‘떼심’은 산삼이 엄청 많은 곳을 뜻하는 심마니들의 은어다.

최 부회장은 강원도 인제의 어느 산에 수 천, 혹은 수 만 뿌리가 숨겨진 떼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노 심마니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그 심마니는 1년에 한 번 이상, 몇 십 년을 떼심을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1990년대 초 그는 강원도 인제의 그 산에 발 빠른 2명의 심마니와 함께 떼심을 찾기 위해 작심하고 들어갔다. 산 속에서 나뭇가지와 비닐로 임시 움막을 짓고 자는데 꿈에서 큰 상여가 그들이 자는 움막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는 분명 산삼을 찾을 조짐이라 여겼다.

다음날 높은 벼랑 위에 섰는데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 산삼 잎이 얼핏 보였다.

그런데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아, 반신반의하며 내려갔다고 한다.

절벽 아래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 천 뿌리의 산삼이 있었다.

그는 일행을 불러 80뿌리를 캐었고, 나머지는 가을에 캐기로 약속했다.

가을에 캔 삼이 약효가 좋아 비싼 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어 그곳을 다시 찾았으나, 산삼은 한 뿌리도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행 중 한 명이 배신하고 몰래 와서 다 캐 간 후였다.

심증이 가는 사람이 있었으나 그는 극구 부인했고 증거가 없었다.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로또를 맞은 것과 마찬가지였으나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이었다.

답답했던 그는 용하다는 점집을 찾았다.

무당은 “훔쳐간 사내가 올해를 넘기기 전에 죽을 것”이라 했고, 실제로 그는 간암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 동료 심마니가 죽은 지 3일 만에 그 집에 불이 났고, 죽은 심마니의 아들이 그 자리에 으리으리한 큰 집을 지었다고 한다.

 

한때 이렇듯 직관력이 뛰어난 심마니였으나 지금은 산양삼과 산삼을 함께하고 있다.

협동조합 형태로 마을주민 4명과 산을 임대해 산삼씨를 뿌려 농약 없이 자연 그대로의 환경에서 키우는 산양삼이다.

내년에 환갑이 되는 만큼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 매일 험산 비등산로를 누비기 어려워서다.

 

최경찬 부회장 산삼·산양삼 문의 010-5340-5539 /033-481-5539



“딸 살리고 심마니 됐어요”… 산삼 기운 확신

 

남양주 진접 배용수 심마니

남양주에서 온 배용수(57) 심마니는 첫인상이 부드러운 호남형이라 산에 다니는 사람 같지 않다.

그러나 16년 경력의 심마니로 파란만장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는 딸 때문에 심마니가 되었다.

원래 자동차 공업사를 운영하며 아내와 두 딸을 키우며 단란한 가정을 꾸렸으나 IMF 외환위기로 사업이 망하고, 마지막 수단으로 미국 이민을 갔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일했으나 영어가 늘지 않아 점점 스트레스만 커졌다. 결국 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이번엔 고등학생이던 큰딸이 뇌출혈로 쓰러졌다.

심장이 멎어 전기충격기로 살렸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어느 날 병원에서 “산삼이 딸의 병에 좋다”는 말을 들었으나 구입하기엔 턱없이 비쌌다.

아내는 일을 하고 남편인 배씨는 딸을 살려야겠다는 일념에 온 산을 누볐다.

한 달간 산을 누벼 결국 작은 산삼 한 뿌리를 캐왔다.

“큰딸에게 먹였더니, 얼마 안 가 몸이 간지럽다는 거예요.

보니까 등이 빨갛게 되면서 혈액순환이 되기 시작하더라고요.”

 

산삼의 효험을 피부로 접한 그는 심마니협회에 가입해 산삼 찾는 노하우를 배우며, 온 산을 누볐다.

30세가 넘은 딸은 현재 완치되었고, 지금도 몸이 조금 약해졌다 싶으면 산삼을 찾을 정도로 산삼 마니아가 되었다.

배용수씨는 그렇게 심마니로 거듭났고, 주변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 2006년 남양주 진접읍 팔야리에 산삼과 약초를 파는 매장을 차려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10년 넘게 매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그는 “이 장사는 속이면 오래 못 간다”며 “주로 효험을 본 단골이 사간다”고 한다.

기억에 남는 단골로 서울 강남에 살던 효자를 꼽았다.

“매년 몇 천 만 원짜리 산삼을 사가던 단골이 있었어요.

알고 보니 90세가 넘은 노모를 위해 매년 사가는 거였어요.

한 번은 경북 봉화에서 가격이 5,000만 원에 이르는 50년 묵은 큰 삼을 캐서 연락했더니 망설임 없이 사갔어요.”

 

그는 “산삼에도 기운이 있다”고 말한다.

손님에게 산삼을 보여 줬는데 망설이거나 찝찝해 하면 산삼을 팔지 않는다.

또 단골들은 믿고 거래하기에 가격을 깎지 않으며, 그는 가격을 비싸게 받지도 않는다고 한다.

간혹 사정이 딱한 손님에게는 그 입장에 맞춰서 산삼을 주기도 한다.

“조카가 43세에 파킨슨병이 온 거예요.

온라인 보안시스템 관리 일을 하다 보니 운동은 안 하고 온 종일 책상에 앉아 모니터만 보는 일을 오래 했거든요.

결국 일을 더 할 수 없어 누워 있었는데 산삼을 4년 동안 공짜로 주다시피 했어요.

지금은 다 나아서 정상적으로 직장생활하고 있어요.”

 

배용수 심마니는 딸과 조카를 비롯해 그가 산삼으로 살린 사람만 여럿이라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거짓말이라 할 만큼 깜짝 효험을 본 사래도 여러 번 있다고 한다.

특히 혈액과 관련된 지병에 좋다고 구체적인 사례를 예로 들며 설명한다.

배 심마니는 직접 약효를 체험했기에 눈빛과 말에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배용수 산삼·버섯 약초 문의 010-5393-3385 매장 자연산약초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 716-11.

 

조심스런 손길로 산삼을 캐는 심마니.

뿌리가 끊어지거나 상하면 상품성이 없으므로 극도로 주의해 산삼을 캔다.

 

 

<2> 효능과 구별법

최고의 삼으로 꼽히는 칠구 두루붙이, 육구 만달, 천년 각구 이야기

가파른 산비탈을 치고오르는 원현덕 가평지회장.

발이 푹푹 빠지는 습한 곳을 지날 때가 많아 심마니들은 장화를 즐겨신는다.

 

 “산삼을 어떻게 구별하죠?”라고 묻는다면 답은 뻔하다

. “인삼을 보라”는 것. 경우에 따라서 1,000배가 넘는 가격 차이가 나지만, 산삼을 인공적으로 재배한 것이 인삼이므로 생김새는 똑같다.

뿌리 모양은 다르지만 땅 밖에 나와 있는 줄기와 잎, 열매는 똑같이 생겼다.

줄기가 곧게 뻗었으며, 갈라져 나온 줄기는 대칭형이고, 5개의 잎이 줄기마다 달려 있다.

심마니들이 쓰는 고유어를 알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잎이 5개가 달려 있는 모양을 ‘오행五行’이라 하고, 오행 가지가 2개면 ‘각구角球’, 3개면 삼구이고 순서대로 사구, 오구, 육구로 나뉜다.

구의 숫자가 많을수록 값이 비싸다.

즉 각구보다 육구가 더 오래된 것이다.

 

산삼도 일반적으로 잎이 달린 가지가 많을수록 더 오래된 삼으로 여긴다.

한국심마니협회 박만구 회장은 “산삼이 성장하는 데 인삼보다 10배의 시간이 더 걸린다”고 한다.

인삼 오행 줄기가 하나씩 늘어나는 데 보통 1년씩 걸리는 반면 산삼은 10년씩 걸린다는 것이다.

오행이면 10년, 각구이면 20년, 삼구면 30년, 육구 산삼은 60년이라는 얘기다.

 

보통은 육구가 최대지만 칠구도 간혹 볼 수 있다고 한다.

대칭이 된 오행 가지가 하나 더 붙은 것을 ‘두루붙이(두루부치)’라고 한다.

두루 잘 붙는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되며, 칠구에 오행 하나가 더 붙은 모양의 삼을 ‘칠구 두루붙이’라고 한다.

가지가 많으면 더 오래되고 비싼 산삼으로 대접 받지만, 100% 맞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심마니들 사이에 ‘천년 각구’라는 말이 있다. 천년 수령의 각구란 뜻이다.

 

보통 산삼의 수명을 100년으로 보는데, 주근이 수명이 다 되어 죽으면, 뇌두에 형성되어 있던 턱수 뿌리가 원뿌리가 되는 것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천 년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미尾란 본 뿌리에서 뻗어 나온 실뿌리를 말한다.

식물학자들은 보통 “초본류인 여러해살이풀이 수 백 년을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얘기하지만 심마니들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일례로 산삼이 어느 해에는 줄기를 땅 밖으로 내지 않고 잠을 자기도 한다고 말한다.

외부 환경이 나쁘거나 뿌리의 상태에 따라 최소 1년 혹은 수년간 잎을 틔우지 않고 땅 속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다.

산삼도 수명이 있어 오래되면 본 뿌리가 썩어 없어진다.

수명이 다해 사라진다.

그러나 실뿌리가 다시 본 뿌리가 되는 방식으로 생을 연장하게 된다고 한다.

본 뿌리가 된 실뿌리에서 각구가 나온 것이 ‘천년 각구’란 얘기다.

온 종일 산을 누벼 캔 산삼을 들어보이는 박만구 협회장.

개인 사유지인 산을 허가를 받아 입산하여 채취했다.

 

산삼과 혼돈하기 쉬운 천남성.

옛날 사약의 재료로도 쓰인 독초이자 약으로도 쓰이는 식물이다.

 

장뇌삼과 산삼(오른쪽).

장뇌삼은 인삼의 뿌리, 즉 사람 모양에 가깝고 뇌두가 짧다.

산삼은 뇌두가 길고 전형적인 인삼 뿌리와는 모양이 다르다.

 

 

인삼, 산양삼, 산삼의 차이는?

 

삼은 크게 인삼, 산양삼, 장뇌삼, 산삼으로 나뉜다.

산양삼은 근래에 들어 생긴 말로 장뇌삼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순화하기 위해 만든 말이라고 얘기하는 심마니들이 많다.

산에 산삼 씨앗을 뿌려 농약을 뿌리지 않고 자연 그대로 키운 삼이니, 산양삼 혹은 산양산삼은 틀린 말이 아니다.

다만 산에 심은 씨앗이 산삼이 아닌 인삼에 가까운 종자일 경우 10년 이상 살지 못하고 약효도 산삼에 비할 바 못 된다.

산양삼이라 하더라도 어떤 씨앗을 뿌렸고 몇 년을 키워 수확했느냐에 따라 약성이 갈린다.

 

산삼에도 보이지 않는 등급이 있다.

인삼밭 옆의 야산에 뿌리 내린 것도 산삼이지만, 약성이 신통치 않다.

새가 인삼 열매를 먹고 똥을 싼 것이 발아했을 가능성이 큰데, 종자 자체는 인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삼밭 옆에 있는 산에서 발견한 산삼은 자랑하지 말고 조용히 혼자 먹으란 말도 있다.

그러나 산에 떨어진 인삼 씨앗도 대를 거듭해 산에서 살아남으면, 수명이 늘어나며 산삼으로 변한다.

다만 긴 세월이 필요하다.  

 

요즘은 새싹삼이라고 하여 몇 백 뿌리의 삼을 싸게 팔기도 한다.

심마니들은 “인삼을 콩나물과 같은 방식으로 6개월간 키운 것이 대부분”이라며 “상추 같은 쌈채소 개념으로 보면 된다”고 말한다.

 

심마니들의 공통적인 얘기는, 강원도 크고 깊은 산에서 캔 산삼이 약성이 좋다고 말한다.

주변에 인삼밭이 없으므로 종자 자체가 산삼일 확률이 크고, 야생의 산에서 살아남기 위해 엄청난 양분을 오랜 세월 흡수해 온 지상 에너지의 결정체라는 것이다.

 

삼이 엄청난 양분을 흡수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산삼보다 훨씬 약성이 약한 인삼만 하더라도 8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인삼공사는 6년근 홍삼을 만들기 위해 6년 동안 산삼을 키우는 시간 외에 2년이 더 필요하다고 한다.

땅의 양분을 워낙 많이 흡수하는 인삼을 심으려면 먼저 2년 동안 예정지를 비옥하게 만들어야 한다.

인삼만 하더라도 아무 밭에서나 자랄 수 있는 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번 인삼을 수확하는 데 8년이 걸리고, 그 밭에 인삼을 다시 심으려면 최소 10년은 지나야 한다고 한다.

 

인삼이 이럴진대 산삼은 더 하다.

강원도 양구에서 산양삼을 키우는 최경찬 부회장은 “가장 중요한 것이 땅”이라 말한다.

산양삼을 심어 한 번 수확하면 삼이 땅의 양분을 모두 흡수한 탓에 다시 심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산양삼은 보통 개인 땅을 임대하거나 국유림이나 군유림을 임대해 허가를 받고 키운다.

산양삼과 인삼도 이럴진대 산삼의 양분 흡수력은 이를 훨씬 넘어선다고 한다.

그래서 정말 좋은 산삼이 있는 주변에는 풀이 없다고 한다.

산삼이 양분을 모두 끌어가는 통에 다른 식물이 자랄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인이 산삼 찾는 방법

 

산삼을 캐려면 일단 산삼을 잘 알아야 한다.

인삼 실물이나 사진을 통해 그 모습을 눈에 익히는 것이 우선이다.

박만구 회장은 “산삼은 1년에 세 번 잘 보인다”고 한다.

강원도 기준 4월 말부터 5월 초에는 다른 풀이 키가 크기 전에 산삼이 먼저 대를 세운다고 한다.

7월에는 열매가 빨갛게 익어 눈에 잘 띈다.

심마니들은 산삼 열매를 ‘달’이라고 한다.

오행 여섯 가지에 열매가 가득 맺은 산삼을 ‘육구 만달’이라 부른다.

달은 보통 하나가 맺히지만, 오래된 삼은 열매가 여럿 달려 ‘만달’이라는 표현을 쓴다.

10월에는 잎이 은행잎처럼 노랗게 물들어 잘 보인다고 한다.

 

일반인들은 산삼을 앞에 두고도 발로 밟을 정도로 구분이 쉽지 않지만, 심마니들은 멀리서 봐도 광채가 날 때가 있다고 한다.

장마철 장대비가 쏟아져도 산삼을 구해 달라는 손님이 있으면 산에 들어가는데, 보통 풀은 비를 맞고 쓰러지지만 산삼만은 줄기를 꼿꼿이 세우고 있어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보통 동북쪽 사면에 많다고 알려져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좋은 산삼이 동북쪽 사면이 아닌 곳에서도 나기 때문이다.

보통 8부 능선과 5부 능선 사이에 많고, 너무 습기가 많거나 너무 건조해도 서식하지 않는다.

적당히 습하면서 적당히 그늘지고 적당히 통풍이 잘 되어야 한다.

이 ‘적당히’를 수치화할 수 없기에 심마니들은 ‘감으로 찾는다’고 말한다.



산삼이 과연 불로초인가

산삼은 과연 진시황이 찾던 불로초인가?

산삼의 효능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병이 나았다든지, 면역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든지 하는 사례가 있다.

박만구 회장은 “산삼의 효능은 산삼이 귀한 영약으로 인정 받아온 수 천 년 세월과 문헌들이 증명하며, 비싼 값을 내고 구매해 온 단골들에 의해 증명된다”고 한다.

 

산삼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 6세기경 양나라 도홍경이 지은 <명의별록>이다.

이후에도 삼국시대와 고려·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산삼을 조공으로 보내왔다는 기록이 중국 문헌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에 신라 소성왕 1년 길이가 9척이나 되는 산삼을 당나라에 진상했다는 내용이 있다.

고려 때 <향약구급방>에서 산삼을 우리나라 고유의 약재로 기록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산삼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유럽에서 처음 산삼을 언급한 것은 1692년 쓰인 <동북달단기>에서다.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신부 자톡스는 직접 산삼을 먹고 그 효능을 몸으로 확인했다고 기록했으며, 산삼의 효능과 생김새를 그려 프랑스 본국에 보냈다.

이렇듯 역사 속에서 산삼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영약으로 표현하고 있다.

 

남양주의 배용수 심마니는 “산삼 덕분에 뇌출혈로 심장이 멎을 정도로 중증이었던 딸과 파킨슨병으로 쓰러진 조카가 완치됐으며, 백혈병 환자들 여럿이 완치되었는데 완치된 백혈병 말기 환자가 이후 산삼 맹신론자가 되어 단골이 되었다”고 한다.

또 “혈액암 환자가 완치된 경우도 있으며, 산삼이 특히 혈액 유통에 좋은 것 같다”고 설명한다.

 

보통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은 산삼을 먹으면 안 좋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산삼을 먹은 직후 혈액 순환이 활발하게 되면서 몸에 열이 나는 일시적인 현상을 오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얼굴이 일그러지며 마비가 오는 구안와사 환자도 산삼을 먹고 3일 만에 나아 의사가 깜짝 놀란 사례가 있다고 한다.

특히 암에 좋고, 면역력 향상에 좋다고 한다.

말기 암 환자를 살릴 정도로 기적적인 치료가 되었던 사례도 있다고 한다.

신비의 영약이지만, 약성을 극대화하려면 최소한의 건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심마니들은 산삼을 먹은 후 호전 증상으로 피부색이 변하거나 가렵고 평소 안 좋았던 부위에 통증이 오거나, 주체할 수 없이 잠이 쏟아지는 것을 꼽는다.

배용수 심마니는 “산삼에는 기운이 있다”며 “산삼 박스만 열어도 기가 확 느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산삼의 효능이 객관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다.

산삼을 둘러싼 무수한 설들이 그 효능을 부풀리거나, 혹은 반대로 미신적인 이미지를 씌워 축소시키고 있다.

무조건적인 폄하나 맹신이 아닌, 정부 차원의 객관적인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3> 누가 먹고 어떻게 유통되나]

 

“정주영·이건희 회장도 산삼 즐겨 먹었죠

 

과거와 비교하면 산삼 가격 턱없이 저렴해져

쓰러진 나무와 바위가 첩첩으로 쌓인 산비탈에서 산삼을 찾는 심마니들.

왼쪽 아래부터 최경찬, 박만구, 원현덕, 배용수 심마니.

 

 “1990년대 톱스타 K씨와 가수 L씨가 오랜 단골이었지요. 기업에서도 많이 샀죠.”

한국심마니협회 원현덕 가평지회장은 연예인 단골이 많다.

본인이 직접 먹는 경우도 있지만 가수와 탤런트로 인기를 끌었던 K씨의 경우 아픈 모친을 위해 7,500만 원 상당의 산삼을 구입했다고 한다.

기업에서도 산삼을 숱하게 구입했는데, 보통 대기업이나 고위인사에 대한 선물용으로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산삼은 은밀하게 거래되어 왔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지만 굳이 소문내고 밝힐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고객 정보 보호 등 여러 가지 걸림돌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산삼 거래에 대해 심마니들은 시원하게 얘기해 주는 경우는 드물다.

 

작고한 현대 창업주 정주영 회장은 산삼을 즐겨 먹기로 유명했다.

심마니들 사이에 정주영 회장에 대한 일화는 여러 가지가 떠도는데,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정 회장은 직접 심마니의 집을 찾아와 산삼을 보여 달라고 하고, 일단 먹은 다음 돈을 주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수백만 원의 돈을 선뜻 주었으니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최고가로는 650년 묵은 산삼을 먹고 7,000만 원을 주었다고 한다.

1980년 서울 강남의 은마아파트 분양가가 2,000만 원대였으니 엄청난 돈이었다.

물론 검증된 사실이 아닌 심마니들 사이에 전하는 전설적인 소문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도 산삼을 즐겨, 아예 산삼 구입을 담당하는 직원이 있었다고 한다.

강원도 인제 같은 곳에 사무실을 두고 어느 심마니가 산삼을 캤다고 하면, 직원이 직접 심마니를 만나 산삼을 구입해 갔다고 한다.

실제로 이건희 회장의 어록 중에 ‘산삼밭에 가야 산삼을 캘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실제 산삼을 캐는 방법이 아닌 경제적 이득을 얻는 방법을 빗댄 것이지만, 평소 산삼에 관심이 많았음을 방증한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도 정주영 회장에게 1999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 산삼을 선물했으며, 마찬가지로 이건희 회장에게도 선물했다.

옛날 당나라 황제에게 진상하던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산삼은 VIP들을 위한 특별한 선물로 이용되고 있다.

 

이것이 일반인들에게까지 퍼지게 된 건, 산양삼 때문이라고 말한다.

산에서 키운 삼을 ‘산양산삼’이란 말로 판매하면서 산삼에 대한 인식이 대중화되어 산삼 가격이 낮아졌다고 심마니들은 말한다.

심마니들은 산삼 가격이 예전의 10분의 1로 폭락했다고 한다.

산양삼 등으로 전체 시장은 커졌지만 신비감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사회적 경제 상황이 침체인 것도 있지만 김영란 법 시행으로 기업의 구매가 줄어든 것도 한몫한다.

 

주5일 근무가 보편화되면서 주말이면 산삼과 약초를 캐러 다니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또 약초 동호회 등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동호인들이 버스를 타고 단체로 와서 산을 황폐화시킨다고 얘기한다.

새끼 산삼은 살려주고 산삼 씨도 뿌려야 하는데, 무조건 캐기만 한다고 성토한다.

 

1 오행 가지가 4개 달린 사구 산삼.

가을이라 잎이 노랗게 변색되고 열매인 달이 떨어진 상태다.

2 각구 산삼. 잎이 5개인 5행 가지가 2개인 것을 각구라고 부른다.

뇌두가 잘록하니 길쭉한 것이 전형적인 산삼의 특징이다.

 

큰 상인이 대기업과 유력 인사 연결

 

산삼 가격은 뿌리로 결정된다.

뿌리의 생김새와 뇌두의 모양을 통해서 연생과 값어치가 결정된다.

과거에는 중간 상인들이 폭리를 취했다.

산삼을 캐는 것도 중요하지만, 산삼을 팔 수 있는 고객을 보유한 상인이 더 큰 몫을 가져가는 것이다.

시골 약초꾼인 심마니가 대기업 회장에게 곧장 줄을 대기 어려운 현실임을 감안하면, 그 생리를 이해할 수 있다.

박만구 협회장은 과거에는 대상大商, 중상中商, 약재상 등으로 큰 고객을 아는 상인과 중간급 고객을 아는 상인, 대중적인 판매상인 약재상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심마니들 사이에 유명했던 대상들이 주로 대기업 총수나 사장과 유력인사들을 단골로 확보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상들이 나이가 들어 죽거나 후임 없이 은퇴하는 바람에 지금은 대상이라 부를 만한 큰 장사꾼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심마니들은 여럿이 팀을 이뤄 다닐 경우 산삼을 발견하면 판매가를 똑같이 나눈다.

물론 성향에 따라 차이는 있어 함께 다니더라도 처음 산삼을 발견한 사람이 독차지하는 규칙을 세운 무리도 간혹 있다.

혼자 다니면 그만큼 산삼 발견 시 자기 몫이 크지만, 큰 산에서 몇 날 며칠을 혼자서 다니기란 쉽지 않다.

 

원현덕 심마니는 오랫동안 혼자 다녔다.

한때 가평지부에 회원이 17명이 있을 정도로 제자를 많이 키우기도 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소중한 산삼 자리를 제자에게 알려주기도 했는데, 몰래 와서 캐어간 이들도 여럿 있었다.

보통은 스승에게 산삼을 캐도 되는지 여쭤보고 혼자 가거나 함께 가서 캐야 한다.

그는 “돈이 급하면 마음도 급해서 빨리 가느라 산삼이 보이지 않는다”며 “마음이 편안해야 산삼이 잘 보인다”고 한다.

산에서 혼자 다닐 때 가장 무서운 것으로 ‘사람’을 꼽는다.

멧돼지나 뱀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괜찮지만, “가만있는 데도 해코지를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고 말한다.

 

심할 경우 1년 동안 산삼을 한 뿌리도 못 캘 때도 있다고 한다.

다른 약초로 밥은 먹고 살 수 있으나, 형편이 바닥을 친다고 원 심마니는 말한다.

값을 깎으려 드는 손님은 극약처방으로 산에 데려 가기도 한다.

그는 “이렇게 힘들고 위험하게 다니면서 산삼을 캔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라며, 이후엔 제값을 지불한단다.

 

매장을 운영하는 배용수 심마니는 “이 장사는 속이면 오래 못 간다”고 얘기한다.

약효를 통해 재구매가 이뤄지기에 값에 맞는 산삼을 내어주는 것이 원칙이란 것이다.

오히려 싸게 줄 때가 많다고 한다.

이윤이 적게 남더라도 손님 형편에 맞춰서 준다고 한다.

 

산삼 유통은 불투명한 면이 많다.

법적으로 정해진 가격 기준도 없고, 인터넷을 통해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순전히 믿고 구입해서 믿고 먹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로 이뤄지는 거래다.

최첨단 시대인 요즘, 옛날 방식 그대로 유통되는 것이 산삼인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믿음만으로 거래할 수 없으므로, 객관적인 가격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정부 차원의 투자 있어야 산삼시장 투명해질 것”

한국심마니협회 박만구 회장

“산삼은 먹어 본 사람이 먹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산삼 약성을 아는 사람이 다시 찾지요.

산삼의 약효를 모르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결코 먹지 않는 게 산삼이에요.” 

 

박만구(60) 회장은 1999년 한국심마니협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이끌고 있다.

그는 “사라져가는 심마니 고유의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고, 산삼에 대한 정보 교류와 판매를 서로 돕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최대 500명까지 회원이 늘었던 적도 있으나 지금은 200명 수준이다.

 

산삼과 관련된 협회의 사기 사건이 간간이 뉴스에 오르내린 적도 있었지만, 그는 “우리 협회는 사기에 휘말린 적이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비영리 단체로 정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순수 심마니 단체라고 설명한다.

특히 전국 각지에서 “내가 한국심마니협회 회장”이라 사칭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수 십 억 원대의 사기를 벌인 사건이 있었으며, 최근에도 박만구 회장을 사칭하는 이들이 버젓이 활동하며 사기를 벌이고 있으니 “주의해 달라”며 “더 이상 피해자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실체 없는 단체들이 ‘엄청난 산삼을 발견했다’는 기사가 간혹 보도되는데, 대부분 산삼의 가치가 상당히 부풀려진 경우가 많단다.

그는 어인마니학교를 세워 신입 회원과 기존 회원들을 교육하고 있다.

‘어인마니’란 우두머리 심마니를 지칭하는 고유어다.

산삼박물관 건립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심마니 놀이마당과 문화, 심마니만의 고유어를 보존하고 계승·발전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사업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이야기한다.

서울에서 일하던 그는 도시 생활이 맞아 않아 1995년 사명산 자락에 정착했다.

포천이 고향인 그는 약초를 공부하기 위해 산에 직접 통나무집을 지었다.

이렇게 약초와 산삼을 공부하는 그에게 주변 심마니들이 “협회가 필요하니 만들어보라”고 권유해 창립했다고 한다.

그는 “심마니들의 권익을 위해 산삼도 정부적인 차원에서 해외수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 “산림청이 산을 등산과 여가의 대상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산삼을 비롯한 산약초 재배의 가능성에 주목해 정부적인 차원의 투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과정이 선행될 때 “불투명한 산삼업계의 유통도 투명해질 것”이라 강조한다.

 

한국심마니협회 033-255-3383  

박만구 회장 010-4118-3385 / 010-5335-36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