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산(主山)의 의미
조화와 균형 이룬 터잡기의 기준점
① 바위를 주산으로 한 어느 무덤. ② 곰소초등학교의 주산. ③ 봉화군 토일 마을에 있는 안동 권씨 종가의 주산. ④ 여수 향일암의 주산.
조선 초기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주산을 어디로 할 것이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장했는데, 인왕산을 주산으로 할 경우 궁궐뿐 아니라 도읍 전체의 공간 배치가 동향으로 이루어지고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면 남향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는데, 이때 무학대사가 탄식하며 “분명 200년 후에 내 말이 생각날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200년 후 임진왜란과 더불어 국가의 위기가 닥쳤으며, 무학대사의 신묘한 풍수술에 후세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야사일 뿐이다.
실제로 무학대사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고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인왕산을 주산으로 할 경우 드러날 문제점을 무학이 몰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즉 인왕산 아래 주 건물(궁궐)들이 동향으로 들어설 경우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청계천이 그대로 보여 풍수에서 가장 꺼리는 바가 된다.
또한 북악산이 좌청룡이 되는데, 그러면 북악산이 삐딱하게 몸을 비틀고 있어 모습이 흉하다.
뿐만 아니라 우백호 위치에 있는 남대문 지점이 푹 꺼져 도시 모습이 더욱 흉하게 된다.
혈 맺히고 반듯한 모양 주산 될 자격
이렇듯 주산은 공간 배치에서 중심 구실을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풍수에서 주산(또는 진산)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또 그것이 터 잡기에서 어떻게 나타날까.
주산의 크기나 높이, 모양에 따라 아래 들어서는 터의 성격이나 크기가 정해지기 때문에 주산은 주변의 산들보다 훨씬 웅장해야 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북악산과 인왕산을 둘러싼 주산 논쟁이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입을 빌려 나오게 된 것이다.
비록 북악산이 인왕산보다 몇 미터 정도 높긴 하지만 크기에서 보면 인왕산이 훨씬 크므로 어느 산이 주산이 돼야 할지 가리기 어려워진다.
또 주산은 혈이 맺히는 곳으로서 모양이 반듯해야 하며, 붓 모양으로 뾰족한 산, 노적봉 모습의 산, 솥단지나 종을 엎어놓은 듯한 산만이 주산이 될 자격이 있다.
주산은 도읍지뿐 아니라 무덤을 정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사진 1은 어느 이름 모를 무덤으로 뒤에 바위를 주산으로 삼아 자리 잡았다.
풍수에서 바위는 흙이 압축된 것으로서, 지기가 강하게 응결된 괴이한 혈(怪穴)로 본다.
이때 바위 모양 역시 둥글거나 반듯해야 한다.
찌그러지거나 깨진 바위는 주산이 될 수 없다.
사진 2는 전북 부안 곰소초등학교의 주산으로, 옛날 시골 초등학교의 터 잡기에서도 풍수가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사진 3은 경북 봉화군 유곡2리(토일 마을)에 위치한 안동 권씨 종가 서설당(瑞雪堂) 전경이다.
이곳 주산(망월봉)은 반듯하며, 주산 한가운데에서 뻗어 내려오는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 종가가 자리 잡아 주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서설당은 350년 동안이나 주인이 바뀌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
사진 4는 여수 향일암으로, 뒤에 솟아 있는 큰 바위들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단정한 산이나 바위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바위들로 이루어진 이러한 주산은 화기(火氣)가 강해 음택이나 양기(陽基)로서는 적절치 않으나 사찰 터로서는 괜찮다.
이렇게 도읍지뿐 아니라 무덤이나 집터 선정에 이르기까지 주산이 중시되는 까닭은 주산이 어떠한지에 따라 그곳에 들어서는 건물과 주변의 균형 및 조화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건물은 오래가지만, 그렇지 못한 건물은 얼마 안 가 헐리거나 주인이 바뀌게 된다.
또 그러한 도시는 발달하지 못하고 난잡한 도시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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