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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 순례 - 사자산 법흥사

초암 정만순 2021. 1. 18. 14:15

사자산 법흥사

 

 

 

자장율사가 백골 옆에서 수행하던 돌무덤

 

 

▲ 자장율사의 수행터로 전해지는 영월 법흥사 석분

 

 

서양 기독교에서는 구원을 말한다. 구원이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구원이 동양에서는 도통(道通)이 아닌가 싶다.

도를 통하면 괴로움에서 해탈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도통한단 말인가?

방법이 관건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수식관(數息觀)이고, 또 하나는 백골관(白骨觀)이다.

 

수식관은 자신의 들숨과 날숨의 숫자를 세면서 자기 호흡을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호흡을 관찰하다 보면 저절로 정신집중이 된다는 것이다.

남방불교의 위파사나 수행법은 대개 이 수식관이다.
   
   백골관은 사람의 백골을 쳐다보는 방법이다.

백골을 쳐다보면서 명상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관찰이 깊어진 상태를 불교에서는 관(觀)이라고 한다.

밤에 올빼미가 나뭇가지에 앉아서 빨갛고 커다란 눈으로 쥐의 움직임을 아주 고요하면서도 차분하게 바라다보는 상태가 관의 개념이다.
   
   신라 불교의 정석을 깔아 놓은 인물이 바로 자장율사(慈藏律師·590 ~658)이다. 

양산 통도사, 울산 태화강 입구에 세워졌던 태화사(太和寺·태화강 이름의 유래도 태화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황룡사 구층탑, 오대산 월정사, 태백산 정암사가 바로 자장율사 창건이다.

신라 불교의 골격과 뼈대를 형성한 고승이 자장율사이다.

그런데 이 양반이 도를 깨달은 방법이 ‘삼국유사’에 보면 백골관으로 알려져 있다.

젊었을 때 깊은 산속에 들어가 백골관을 닦았다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 불교는 화두를 연마하는 간화선이 주된 수행법이다.
   
   
   자장율사의 백골관 수행터
   
   백골관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었을까?

왜냐하면 고려나 조선시대 고승들은 백골관으로 수행했다는 이야기가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장율사만 백골관이다.

백골관을 닦을 때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삼국유사에는 그냥 ‘백골관을 했다’는 한 줄만 나온다.

필자는 대학 다닐 때 이 한 줄을 읽은 이래로 백골관을 어떻게 하는지가 수십 년간 궁금했다.

필자는 이 백골관이 끌린다.

다른 수행법보다도 ‘막고 품는’ 방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원초적이고 아주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우리같이 머리가 복잡한 사람은 단순무식이 좋을 때가 많다.

돌직구가 맞을 땐 아프지만 효과는 확실한 것 아닌가.

정교하고 섬세하면 효과를 못 느끼는 약점이 있는 체질이다.
   
   근래에 강원도 영월에 있는 사자산 아래에 자리 잡은 법흥사를 가보았다.

사자산 근처에 접근하면서 사자산의 산세를 보니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이 왜 생겼는지 짐작이 갔다.

사자산은 그 모습이 마치 사자의 대가리같이 생겼다.

수사자 머리의 갈기가 무성하게 풀어져 있는 모습이다.

도교, 선도에서는 호랑이를 좋아하지만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사자를 좋아한다.

인도에는 사자도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필자가 가본 사자의 형상을 한 산은 두 군데인데, 전남 장흥의 사자산영월의 사자산이다.

사자산에는 사자앙천혈(獅子仰天穴)의 명당이 있기 마련이다.

사자가 하늘을 보고 포효하는 형국을 가리킨다.
   
   법흥사도 이 사자 대가리의 주둥이 부위에 자리 잡은 절이었다.

이날 같이 동행한 사찰 풍수의 대가 혜담(慧潭·71) 스님에 의하면 법흥사는 예전에 사자 혓바닥 위로 길을 내서 좋지 않았다고 한다.

사자 혓바닥 위로 사람이 다녀버리면 포효에 지장이 있다.

그래서 17~18년 전쯤 혜담 스님의 코치로 당시 주지 스님이 혓바닥 바로 옆으로 길을 새로 냈다고 한다.

돌로 만든 사자석상 주둥이로 약수가 나오는 약수터가 있고, 이 약수터 오른쪽 방향의 사자 혓바닥 옆으로 새로 낸 길을 따라 10분 정도 언덕으로 올라가면 적멸보궁이 나온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 놓은 곳을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이 적멸보궁 터가 기운이 뭉친 지점이다.

앞으로는 구봉산(九峰山)이 병풍처럼 터를 감싸고 있다.

왼쪽으로는 문필봉도 보인다.

법흥사는 앞산인 구봉산이 아주 화려하다.

필자는 화려하고 영양가 있는 산세를 접하면 화투에 비유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구봉산은 ‘비풍초 똥팔삼’이 모두 포진한 산세라고나 할까.

영험한 산세를 속세의 땟국물이 전 화투에 비유함으로써 성과 속이 둘이 아니라는 이치를 깨닫고 싶은 욕구의 작동이다.

쉽게 말하면 불경죄이다.
   
   

▲ 구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영월 법흥사 전경.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시체 썩는 옆에서 육신의 허망함을 깨닫다
   
   문제는 이 적멸보궁 법당 뒤에 살포시 자리 잡은 둥그런 봉분이다.

언뜻 보면 무덤같이 생겼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돌로 만든 입구가 있다.

입구의 크기가 가로 40㎝, 세로 20㎝쯤 될까.

사람이 엎드리면 기어서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이다.

공식 명칭은 영월 법흥사 석분(石墳)이다.

돌로 만든 무덤이라는 뜻이다.

바로 여기에서 자장율사가 수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자장은 젊어서는 경주 일대에서 수행을 했을 것이고, 그 이후로 당나라도 갔다 왔고, 신라로 귀국해서도 계속 도를 닦았을 터인데, 도 닦던 장소 가운데 하나가 법흥사 적멸보궁 뒤에 있는 이 석분인 것이다.

옆에 서 있는 표지판의 설명을 보자.

입구를 통해 돌방(석분) 안으로 들어가보면 내부는 돌로 벽을 쌓았다고 되어 있다.

6단 수직벽이다.

돌방의 크기는 어떤가?

높이는 160㎝, 길이는 150㎝, 너비는 190㎝이다.

성인 한 사람이 들어가 앉거나 누울 수 있는 크기의 공간이다.

돌방 뒤편에는 돌로 된 널이 설치되어 있었다.

널빤지처럼 길쭉한 돌이 있었고, 이 돌 널 위에는 사람의 뼈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 안에서 수행을 하다가 죽은 고승의 뼈가 놓여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일종의 무덤으로 생각하는 셈이다.

필자가 이 석분을 보고 직감적으로 와 닿은 느낌은 ‘자장의 백골관 수행터’라는 점이다.

백골관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인도에서는 사람 시체를 길바닥에 그대로 던져 놓는 관습이 있다.

화장을 하려면 장작값이 들어가니까, 장작을 아끼려고 적당한 곳에 그냥 던져 놓는 것이다.

지금도 인도 바라나시에 가면 길거리의 개들이 장작불에 타다 남은 시체의 팔뚝과 살점을 물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날씨도 더우니 시체는 금방 썩는다.

시체 썩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의 수행자들은 이 시체 옆에 자리 깔고 앉아 썩어가는 시체를 바라보면서 몇 달씩 명상을 했다.

‘아 육신이 결국 이렇게 썩어 없어지는 것이구나! 내가 그토록 보존하려고 바둥거렸던 이 육신이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썩어가는 시체를 바로 눈과 코앞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너무나 막고 품는 수행법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아볼 때 확실히 안다.

육신의 허망함은 책으로 읽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시체 썩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볼 때 확실하게 알게 된다.

세속적인 욕망을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백골관의 유래이다.

살점이 썩어서 백골로 변해가는 모습을 5~6개월 관하다 보면 어떤 이치라도 하나 깨우치지 않겠는가!

짐작건대 자장율사가 실천했던 백골관은 이미 살이 썩은 뒤에 남은 백골, 또는 해골을 옆에다 놓고 명상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이 석분에 있었다는 백골은 여기서 수행하던 고승의 백골이라기보다는, 이 석분에 들어가서 수행하던 수행자들이 관(觀)을 하던 백골일 가능성이 높다.

자장도 여기서 백골을 놓고 수행했던 것이다.

자장이 여기서 처음 백골관을 닦은 이래로 그 전통이 쭉 이어져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승려들이 백골을 놓고 이 어두컴컴한 돌방에서 관을 닦은 것으로 보인다.

바꾸어 말하면 육탈이 된 백골만을 여기에다 놓고 관을 하였다는 의미이다.

인도처럼 썩기 시작해 냄새나는 시체를 놓고 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여우굴에서 도통하는 야호선

 


   
   이 석분을 보고 또 하나 번쩍 들어오는 직감은 ‘이 석분이 고대의 야호선 수행터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야호선(野狐禪)은 동북아시아 고대 수행법이다.

여우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굴 속에서 수행하는 명상법이다.

핵심은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굴이다.

여우가 들락거리는 굴은 입구가 작아야 한다.

사람이 간신히 기어 들어갈 수 있는 좁은 입구다.

입구가 크면 빛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빛이 안 들어와야 한다.

이런 컴컴한 굴속에서 한두 달 명상을 하면 도통하는 방법이 야호선이다.

이를 도교에서는 호선숭배(狐仙崇拜)라고 한다.

여우신선을 숭배한다는 뜻이다.
   
   도교 전문가인 안동준 교수(경상대)로부터 필자는 고대 동북아시아의 야호선 전통을 들었다.

흰색 여우를 숭배하는 전통이 내려왔다고 한다.

좌청룡 우백호의 우백호가 지금은 흰색 호랑이(白虎)로 대체되었지만 원래는 ‘흰색 여우’라는 뜻의 백호(白狐)였다는 것이다.

그만큼 흰색 여우는 신성시되었던 동물이다.

지금도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이 흰색 여우를 숭배하는 전통이 남아 있다.

호선(狐仙)신앙이다.

호선신앙 내지는 야호선의 핵심은 컴컴한 공간에 있다.

빛이 밝으면 내면세계로 깊이 들어가기가 어렵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인간은 내면의 깊은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 공간이 어디인가?

여우가 들락거리는 입구가 좁은 자연동굴인 것이다.

자장율사 백골관 터도 그 입구가 아주 좁다.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다.

내부는 어둠이다.

촛불을 켜고 있지는 않았다.

석분 내부는 그야말로 어둠의 공간이다.
   
   중국 도교인 전진교(全眞敎)의 장문인인 왕중양(王重陽·1112~1170)이 처음 도를 닦기 위해서 이 방법 저 방법을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시도한 방법이 땅 밑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 어둠 속에서 대략 2년 정도 좌선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땅 밑의 굴속에서 수도를 한 뒤에 도를 통하였다.

이 땅 밑의 굴을 ‘활사인묘(活死人墓)’라고 부른다

 ‘살아서 죽은 사람의 묘’라는 뜻 아니겠는가.

이 ‘활사인묘’는 고대 동북아시아 샤머니즘 전통에서 유래한 호선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장율사의 석분도 이 ‘활사인묘’의 전통이 왕중양보다 훨씬 이전에 결합하여 있었다.

백골관과 활사인묘의 결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