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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 순례 - 산청 정취암

초암 정만순 2021. 1. 17. 14:31

 산청 정취암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절벽위 암자, 산청 정취암

 

▲ 높은 바위 절벽 위에 자리 잡은 경남 산청 정취암은 소문난 수행처이자 기도터이다.

 

인생은 대몽(大夢)이라!

이 대몽에서 누가 먼저 깨어난단 말인가.

제갈공명도 유비에게 불려가기 전 융중(隆中)에 있을 때 ‘대몽수선각(大夢誰先覺)’이라는 화두를 품고 살았던 도사였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까 공명은 유비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수행을 그만두고 닭벼슬 같은 벼슬자리가 대단한 것이라고 여긴 것 같다.

소꿉장난 같은 벼슬자리를 벼슬이라고 맡아서 결국 사람 죽이는 전쟁만 하다가 병들어 죽었다.

공명은 대몽에서 깨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인생이 꿈과 같다는 사실을 다시 인수분해하였다.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는 4가지 상징으로 설명한 것이다.

인생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인간은 평상시의 삶이 따지고 보면 대몽이지만 그 대몽 속에서 또 작은 꿈을 꾼다. 몽중몽(夢中夢)이다.
   
   필자는 가끔 바람 쐬러 경북 경주에 간다.

이야기를 채취하는 채담가(採談家)의 입장에서 보면 경주는 특급호텔의 뷔페식당과 같다.

바닷가재부터 양갈비, 생선초밥, 각종 과일 등이 푸짐하게 쌓여 있다.

경주 곳곳에 뷔페처럼 이야깃거리가 널려 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 낳은 아들인 설총의 고분도 있다.

설총은 왕도 아니고 삼국통일 장군도 아니었지만 묘가 남아 있다.

그 설총 묘의 근처에 아는 분의 집이 있다.

이 집에서 하룻밤 자다가 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이 가관이다. 눈이 불그스름한 하얀색의 조그만 여우가 꿈에 나타났다.

‘백여우가 나타나다니, 이건 어떤 징조란 말인가?’

꿈보다 해몽이 어려운 법이다.

 

백여우 꿈을 꾸고 나서 이틀 있다가 경남 산청군 대성산에 있는 정취암(淨趣庵)에 가게 되었다.

높은 바위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암자다.

백척간두 위에 서 있는 수행처이자 소문난 기도터이기도 하다.

암자를 지키는 단하(丹霞) 수완(修完·67) 스님과 절의 내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여기에는 문가학(文可學·?~1406)이라는 도사 이야기도 전해져 옵니다.

문가학이 백여우에게 둔갑술을 배웠다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백여우의 전설
   
   이야기를 간추리면 이렇다.

인근에 살았던 문가학이 소싯적에 정취암에 와서 공부를 하다가 정월 초하룻날이 되니 절에 있던 승려들이 요물을 피해서 피난을 갔다.

문가학만 홀로 절에 남아 요물을 때려잡기로 했다.

밤이 되자 이쁜 여자가 나타나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여자가 술에 취해서 쓰러지니 그 정체가 드러났다. 백여우였다.

문가학은 새끼줄로 술 취한 여우를 동여매었다.

술에서 깬 여우가 ‘나를 풀어주면 둔갑술을 알려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문가학은 여우를 풀어주고 백여우로부터 ‘비술책(秘術冊)’을 받아 비술책에 쓰인 둔갑술을 배우게 되었다.

진도가 한참 나갔다. 둔갑술의 8장까지 배우고 마지막 9장을 남겨 두고 있는데, 문가학의 집에서 일하던 하인이 문가학을 데리러 왔다.

“집에 큰일이 났습니다.” 집에 큰일이 났다고 하니 잠시 둔갑술 공부를 중단하고 정취암을 내려가 속가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집에 내려가서 보니 별일도 아니었다.

공부를 방해하는 마장(魔障)에 걸렸던 것이다.

산에서 공부를 하다 보면 꼭 중간이나 마지막 부분에서 속가의 집이나 속가의 어떤 인연으로 인해 공부를 중단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정취암에 다시 올라와서 보니 여우는 자취를 감추었다.

둔갑술 교과서인 ‘비술책’은 여우가 책바위에 숨겨 버렸고, 백여우는 지금의 산신각 아래쪽 동굴에 숨어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책바위는 산신각 올라가는 계단의 마지막 부분 왼쪽에 있는 바위다.

꼭 납작한 책이 겹쳐져 있는 것처럼 생겼다.

 

결국 문가학은 둔갑술을 완전히 마스터하지 못하고 세상에 나왔다.

그렇지만 신통력은 있었다.

특히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하는 호풍환우의 주특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문가학이 비를 내리게 하는 신통력이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비를 내리게 해주었다는 보상으로 태종으로부터 쌀과 옷을 하사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다가 역모사건을 일으켜 사형을 당하게 된다.

일설에는 문가학이 역모 과정에서 둔갑술을 부렸지만 마지막 상투 부분이나 옷자락 끝부분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 역모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둔갑술을 완전히 마스터하지 못한 결과였다.

문가학은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가져온 문익점의 동생 아들이라고 한다.

문익점의 조카였던 것이다.

문가학 역모사건 이후로 산청 지역의 문가학 집안이 상당히 곤욕을 치렀다.
   
   
   자연 동굴은 최고의 수행터
   
   수완 스님으로부터 여우 이야기를 듣고 필자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정취암은 불교 이전부터 고대의 수행법이 전해져 오던 영지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흰여우는 백호(白狐)이다.

흰 호랑이인 백호(白虎)와 그 발음이 같다.

좌청룡 우백호라고 할 때 지금은 호랑이 호(虎)를 쓰지만 옛날에는 여우 호(狐)를 썼다.

백여우가 그만큼 영물이었다는 이야기다.

시대를 거쳐오면서 여우가 호랑이로 대체되었다는 말이다.

지금도 중국의 산둥 지역이나 랴오닝성, 지린성 쪽에서는 여우신앙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흰여우가 그만큼 영험이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토착 수행법으로 백호수행법이 있었다.

여우굴 같은 입구가 작은 컴컴한 굴 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 방법이다.

불가에서는 이러한 재래의 토착 수행법을 야호선(野狐禪)이라고 하여 비판한다.

백장선사가 야호선을 비판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깨달음의 궁극에 가지 못한 어설픈 수행법이라는 것이다.
   
   정취암에 이런 백여우 전설이 전해진다는 사실은 이곳이 불교 이전부터 이미 수행처로 알려져 있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다.

정취암 주변이 전부 험한 바위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대략 30~60m 높이의 바위절벽이다.

천인벽립(千仞壁立)의 기세다.

절벽 밑으로도 계속 바위 맥이 깔려 있고, 그 중간중간에 여러 군데의 작은 동굴이 있다.

도 닦기에 좋은 동굴들이다.

 

불교는 수행방법으로 염불도 있고, 위파사나 같은 관법도 있고, 들숨과 남숨의 숫자를 세는 수식관(數息觀)도 있고, 화두를 생각하는 화두선도 있다.

불교 이전의 고대 수행법의 핵심은 어두컴컴함에 있지 않았나 싶다.

인간은 어두운 데 있어야 잡념을 없앨 수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자기 내면세계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관건은 어두운 공간이다.

어두운 공간에 오래 있어야 4차원의 정신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밝은 데서는 온갖 정보가 들어온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외부 정보의 차단이 요구된다.

그러려면 자연 동굴만 한 장소가 없다.
   
   2만~3만년 전 원시인들이 그려 놓은 벽화로 유명한 알타미라동굴, 라스코동굴이 단순히 그림 그리러 들어간 동굴이 아니라 원시인들의 종교적 각성을 위한 수행처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알타미라동굴을 가보진 못했지만, 가본 사람들 말에 의하면 동굴의 구조가 특수하다고 한다.

동굴 입구에서 수평으로 들어가다가 중간쯤에 가면 절벽이 수직으로 50~60m쯤 뚝 떨어지는 지점이 있다고 한다.

어둠 속에서 50m 절벽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서 다시 수평으로 한참을 가면 동굴의 막다른 지점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런 동굴들은 그야말로 암흑의 공간이었다.

랜턴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동굴 속의 수십 미터 절벽 아래로 내려갈 생각을 했을까.

엄청난 공포의 체험이다.

아마도 이런 암흑의 공간에서 인간은 죽음을 경험하고 거듭나게 되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한 번 죽은 다음에 거듭나야만 4차원의 세계에 진입한다.

즉 영발이 생기는 것이다.

그 임사체험을 하는 공간으로 어둠의 동굴이 필요하다.

이 어둠의 동굴 수행법을 총칭하여 야호선이라 하지 않았을까.

동북아시아 고대 샤머니즘 전통에서 남아 있는 야호선 동굴의 특징은 입구가 좁다는 점이다.

겨우 여우가 들락거릴 정도로 입구가 좁아야만 암흑 수행의 효과가 좋다.

외부와 완전 격리된 느낌을 준다.
   
   

▲ 한 석공이 기증한 산신상. 무게가 3t에 이른다.


   철분은 정신의 단백질
   
   정취암의 보이지 않는 특징은 이 암자가 기대고 있는 산 이름이 둔철산(屯鐵山)이라는 점이다.

철이 많은 산이라는 뜻이다.

고대 가야는 철기로 유명했다. 가야 지역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었다.

그래서 가야 지역이었던 경남의 합천, 산청, 경북 청도 지역 일대에는 철을 캐고 철을 다루었던 지명들이 남아 있다.

야로(冶爐)라는 지명도 그런 예이다.

‘둔철(屯鐵)’이라는 지명도 철 냄새가 강하게 난다.

 

철이란 무엇인가?

전쟁무기 만드는 데에만 유용한 게 아니다. 도 닦는 데에도 아주 유용하다.

도 닦는 데 있어서는 철이 단백질에 해당한다.

철분이 많은 암반은 뇌를 혹사하는 정신노동자에게는 거의 링거 주사와 같다.

뇌세포에 고단백질을 공급한다.

지구의 가장 중심 부분에는 철이 있다고 한다.

바위 속에도 철분이 함유되어 있다.

지자기는 이 철을 타고 전해진다.

사람 핏속에도 철분이 있다.

암반에 있는 철을 타고 올라온 지자기가 사람 핏속에 있는 철분을 타고 혈액 속으로 들어온다.

따라서 도를 닦으려면 반드시 암반이 필요하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바위산에서 고승과 도사가 나온다.

유럽의 영험한 수도원과 성당, 교회는 거의 바위산에 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강한 철분을 필요로 하는 셈이다.

철분이 다량 함유된 산청의 둔철산이야말로 도를 닦기에는 천혜의 산이다.

아마도 가야시대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둔철산의 동쪽 봉우리를 따라 대성산(大聖山)이라고 부른다.

큰 성인이 나온다는 뜻 아닌가.

크게 보면 둔철산이지만 둔철산의 한쪽 부분인 대성산 쪽이 다른 쪽에 비해서 바위 암반이 많이 노출되어 있다.
   
   
   3t 산신상의 사연
   
   대성산이 갖는 이러한 영험함을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정취(正趣)보살이다.

정취암은 일찍부터 정취보살이 머무르는 도량으로 알려졌다.

관음보살과 함께 양대 보살 중 한 분이 정취보살이다.

우리나라에 관음도량은 많지만 정취도량은 정취암뿐이다.

의상대사가 모신 보살이 바로 관음과 정취다.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은 금강산 원통암에 모셨지만, 정취보살은 대성산 정취암에 모셨다.

그만큼 정취암이 비중 있는 수행처였다.

고려 공민왕 때는 개경 왕실에 모셔져 있던 정취보살상이 이곳 정취사로 옮겨졌다.

왕실의 보물 보살상이 정취사로 옮겨졌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적인 상황도 있었을 것이고, 정취암이 지닌 영험함도 작용했을 것이다.

현재 법당에 모셔진 정취보살상은 1714년에 다시 조성된 보살상이다.

 

정취암은 과거에 지금보다 큰 절이었다.

대성산의 바위 절벽 줄기를 따라서 이곳저곳에 많은 암자와 수행처가 산재해 있었다.

100여칸의 규모였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

큰 건물은 들어설 수 없었지만 작은 수행처들은 수십 군데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1832년의 화재로 암자들이 거의 소실되고 현재의 절벽 정상 부위에만 복원 불사가 이루어졌다.

이 정도 규모로 불사가 이루어진 공덕은 현재 주지인 수완 스님의 원력이다.

1995년부터 20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면서 불사를 하였다.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정취암은 함석지붕에 다 쓰러져가는 조그만 암자였다.

여기에다 새로 도로를 내고 법당 앞의 너덜겅을 흙으로 메워 터를 넓히고 전각을 지었다.

수완 스님은 이 불사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고승대덕으로 환생할 것이라고 믿는다.
   
   “탱화가 아니라 석상으로 된 산신상이 모셔져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여기 산신각에는 돌로 만든 산신상이 조성되어 있네요?”라고 수완 스님에게 물었다

. “그게 참 신기해요. 몇 년 전에 경기도에 사는 어떤 석공이 산신상을 만들어서 정취암에 모시고 싶다고 연락을 해 왔어요.

이 석공이 꿈에 산신상을 만들어 달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해요.

꿈에 본 모습 그대로 자기가 산신령 조각을 했대요.

그리고 1년 넘게 산신상을 모실 사찰을 찾아다녔다고 해요.

어떤 절이 자기가 꿈에 본 모습과 비슷한 곳인지를 찾기 위해서요.

결국 정취암에 와서 꿈에 본 풍경을 찾았어요.

호랑이 등에 올라타 있는 산신령이 손에는 파초선을 들고 있는 모습이죠.

무게가 3t이나 나가요.

이 3t 무게의 산신상을 이 산꼭대기까지 운반하는데 엄청 고생했지만, 결국 산신각에 모셔 놓게 되었어요.”

 

정취암에서 가장 기가 센 곳에 산신각이 있다.

산신각 안에 들어가면 벽에 산신 탱화가 없다.

벽에는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고, 그 유리창 너머로 돌로 만든 산신상이 보이는 구조다.

그리고 돌로 된 산신상 뒤에는 정취암에 전래되어 오던 산신 탱화가 배경으로 있다.
   
   그런데 복제품 산신도가 특이하다.

복장과 얼굴 모습이 단군과 비슷하다.

특히 양쪽 어깨에 견장처럼 놓여 있는 나뭇잎이 그렇다.

머리 꼭대기에는 작은 상투처럼 머리를 묶고 비녀를 꽂았다.

여타의 산신 할아버지와는 포스가 다르다.

매우 고풍스러운 느낌이 드는 산신도이다.

 

필자는 이 복제품 산신도를 보는 순간 이 그림이 우리나라 산신의 원형을 계승하고 있는 산신도라는 직감이 들었다.

단군이 죽어서 산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 ‘단군’이 세월이 흐르면서 ‘당골’로 변하였다.

단군이 무속신앙의 산신으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흰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 모습으로 산신도에 그려진다.

그러나 이 정취암 산신도는 단순한 할아버지가 아니라 원래의 단군신앙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그림이다. 단군 할아버지 본래의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는 그림이다.

지리산 일대에는 단군과 고대 한민족 신앙의 원형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산청군 정취암도 크게 보면 이 신앙권에 포함된다.

단군의 원형을 간직한 산신도가 남아 있다는 것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단군, 정취보살, 여우 숭배가 모두 보존되어 있는 매우 뿌리 깊은 영지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