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巨樹 保護樹 記念物/성주 노거수

회연서원 보호수

초암 정만순 2020. 8. 16. 07:27

회연서원 보호수

 

 

 

 

@ 탐방일자 : 2020. 08.20

 

회연서원

 

소재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회연서원(檜淵書院)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한강 정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역 주민의 유학교육을 위해 세운 서원이다.

1974년 12월 10일 시도유형문화재 제51호(성주군)로 지정되었으며, 청주정씨 문목공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회연서원은 1581년 정구 선생이 후진 양성을 위하여 성주군 수륜면 양정봉비안(陽亭鳳飛岩) 기슭에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지어 존현양사(尊賢養士)의 실현을 위하여 강론하던 곳이다.

선생의 별세 2년 후에 전국의 사림이 모여 이곳 초당지에서 서원 창건론을 발의하였다.

영남 5현(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정구) 가운데 한 사람인 정구가 1583년(선조 16년)에 세워 제자들을 교육하던 회연초당(檜淵草堂)이 1627년(인조 5년) 지방사림의 여론에 따라 서원이 되었으며, 1690년(숙종 16년) 12월에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칙령이 내렸다.

그러나 1871년(고종 8년) 3월에 국령(國令)에 의하여 서원이 훼철(毁撤)되었다.

1974년 6월에 국고 보조 및 후손들의 출자로 서원에 대한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1977년 사당, 동무·서무를 고쳐 세우고 담장을 쌓았다.

1981년에는 후손들이 서원의 복원(復院)을 발의하였고, 1984년 5월에 다시 위판을 봉안하고 복원하였다

 

회연서원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서원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서원의 하나로 선생의 문집판 ‘심경발휘’가 보관되어 있으며, 이곳의 현판은 한석봉이 쓴 것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 6칸의 강당, 각 3칸의 동재()와 서재(西), 신문(), 외문(), 4칸의 숙야재(), 고사(), 별사(), 비각,

 

한강 정구 신도비등이 있다.

 

사우에는 정구와 이윤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토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서재는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며, 신도비의 비문은 신흠(申欽)이 정구와 이윤우의 학문·덕행 및 공적을 찬양한 글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中丁 : 두 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4두(豆)이다.

유물로는 용두장(龍頭杖)과 가죽신·창의 등 여러 점이 보관되어 있으며, 소장전적은 목판본과 《심경발휘 心經發揮》 외에 수십권이 보관되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4,600평, 임야 9,000평, 대지 1,500평 등이 있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

 

 

정구 선생은 1543년(중종 38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유촌(柳村)에서 태어나 1620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릴 때부터 영채(英彩)가 뛰어났던 선생은 5세 때는 보는 사람마다 그 재주에 탄복하여 신동(神童)이라 했고 7세에 벌써 대학, 논어(大學, 論語)의 뜻을 이해하였다.

10세에 이미 학문에 뜻을 두어 독서에 열중하였고, 13세에 성주향교에 교수로 와 있던 덕계 오건(德溪 吳建)에게 주역(周易)을 배우면서 건곤(乾坤) 2괘(掛)를 읽고는 나머지를 모두 미루어 통달했다고 하며, 22세에 과거 보러 상경한 적이 있었으나 느낀 바 있어 시험장에 들어가지 않고 귀향하여 그 길로 과거를 포기하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정구 선생은 38세 때 창녕(昌寧) 현감으로 있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임명되자 벼슬을 버리고 시골인 성주(星州) 회연(會淵)에 돌아와 초당(草堂)을 지었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살면서도 매화와 함께 사는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노래했다.


정구 선생은 가야산과 그 아래를 흐르는 대가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젊은 시절부터 가야산 일대를 돌아다니며 호연지기를 키웠다.

그는 나중에 관직에 나아가기 전 보름 동안 가야산을 돌면서 치세의 지혜를 얻고자 하기도 했다.

그가 창녕현감으로 나가기 전에 쓴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이 바로 그것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정구 선생은 다시 가야산으로 되돌아왔다. 멀리 가야산 자락이 보이는 대가천 옆에 초당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회연초당은 그의 사후에 회연서원(檜淵書院)으로 바뀌었다.

임진왜란으로 많은 유생들이 피해를 입고, 지방의 교육기관이 붕괴된 직후에 정구 선생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제자를 키웠다.

초당 앞에 100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백매원(百梅園)’이라 불렀다. 겨울에도 지조를 잃지 않는 매화처럼 고고한 선비의 향기를 널리 퍼뜨리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

길을 본다’는 뜻의 누각인 ‘견도루(見道樓)’ 앞에는 해마다 하얀 매화가 피고 있다.

그 당시의 심경을 정구 선생은 시 한 수에 담았다.

 

小小山前小小家(소소산전소소가)
자그마한 산 앞에 조그만 집을 지었네
滿園梅鞠遂年加(만원매국수년가)
뜰에 심은 매화 국화 해마다 늘어나고
更敎雲水粧如畵(갱교운수장여화)
구름과 시냇물이 그림처럼 둘렀으니
擧世生涯我最奢(거세생애아최사)
이 세상에 나의 삶이 사치하기 그지없네

 

 

무흘9곡 제1곡 봉비암(鳳飛巖)

회연서원 뒤쪽으로 흐르는 대가천이 절벽 봉우리를 만나면서 절경을 연출하니 바로 봉바암이다

 

 

 

 

 

보호수

느티나무

 

 

높이가20m 둘레가3.7m 수령이 약430년

1982년 10월 26일자로 고유번호 11-24-1번으로 군 보호수로 지정

 

 

매화 노거수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 선생은 성주 회연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초당을 짓고 백매 100그루를 식재하였다.

그리고 ‘백매헌(百梅軒)’이라는 편액을 걸어 놓았다.

회연서원에는 이때 정구 선생이 심은 100그루의 매화나무 중 지금은 다 없어지고 세 그루만 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

그나마 세 그루 중 한 그루는 고사상태에 있고, 한 그루는 원줄기는 거의 죽어 가고 있고, 일부 가지들이 새로 돋아나고 있다.

 

 

@ 동영상

 

 

 

# 사진첩

 

회연서원 정면

견도문

 

회연서원

 

무흘구곡 제1곡 봉비암

 

 

한강 정구선생 신도비

 

 

견도루

 

보호수 니티나무

 

 

 

 

 

회연서원

 

 

동재 명의재

서재  지경재

 

 

한강매

 

 

 

향현사

 

 

 

 

비봉암 오르는 길

 

대가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