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 따라 꽃길 따라 섬진강 봄 마중

 

물길 따라 꽃길 따라 섬진강 봄 마중

3월, 지리산 맑은 물로 몸을 불린 섬진강이 들판을 감싸 안으면 강기슭 매화는 화르르 등불을 매단다.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은빛 물결 따라 봄 마중 가는 길. 내딛는 걸음걸음 설렘이 가득.

향긋한 매화 향으로 만나는 봄

이른 아침, 서울을 떠나 얼마나 달렸을까? 눈을 떠보니 차창 밖으로 아슴아슴 연한 빛들이 어린다. 그리운 임이라도 만나러 가는 양 두근대며 서두른 길. 어젯밤 내린 비에 혹여나 여린 꽃잎들이 상했을까 마음을 졸였는데 눈앞에 펼쳐진 섬진강에는 봄빛이 가득이다. 섬진강 일대 하동과 구례, 광양은 3, 4월이면 꽃 대궐을 이룬다. 흰 매화와 노란 산수유, 연분홍 벚꽃이 차례로 꽃망울을 터뜨리고 푸른 하늘과 색색의 꽃을 품은 섬진강은 황홀한 봄 풍경을 선사한다.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흐드러지게 핀 봄꽃들을 보러 전국에서 몰린 사람들로 긴 행렬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하동에 도착하니 하동군청 김지원 문화관광해설사가 방문객을 반긴다. 지난가을 토지길에서 인연을 맺은 그녀가 이번 여행의 동행이 돼주기로 했다. 그녀는 고운 매화가 올해는 더욱 부지런을 떨었다며 걸음을 재촉한다. 향긋한 매화 향 맡으며 입담 좋은 길동무와 함께 걷는 길이라니,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으랴. 봄비 흩뿌려진 섬진강변에는 이른 봄 언 땅을 떨치고 일어난 봄꽃들이 포근한 봄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거울같이 잔잔한 섬진강. 걷다 보면 마음까지 고요해진다.

고요한 강물 따라 번지는 봄기운

하동읍에서 섬진강 하류로 발길을 잡았다. 이번에 함께 걸을 길은 '섬진강 100리길'. 화개에서 악양을 지나 남해까지 이르는 총 40km의 길 중 중간 지점인 하동송림에서 시작해 걸어보기로 했다.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변을 따라 여유롭게 주변 풍광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출발부터 발길이 붙잡혔다. 위엄 넘치는 소나무들이 웅장한 숲을 이루는 하동송림은 1745년 당시 도호부사였던 전천상이 섬진강의 강바람과 모래바람을 피하기 위해 만든 숲이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8백50그루의 할아버지 소나무들이 섬진강의 맑은 물결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부드러운 백사장을 끼고 있는 숲은 맨발로 거닐기에도 참 좋은 산책로다. 하동송림을 비롯해 목도송림 등 섬진강 주변에는 곳곳에 크고 작은 숲들이 많은데, 모두 섬진강의 거센 강바람과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나무를 심은 것이다.

거센 섬진강의 강바람과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진 소나무 숲이 위용 넘치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고개를 돌리니 거울같이 잔잔한 섬진강이 소리 없이 흐른다. 이토록 고요한 물길인데 어디서 그리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지 봄기운에 취한 방문객은 도통 알 수가 없다. 순풍에 실려 온 꽃향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걸음을 옮겼다. 강과 함께 이어지는 길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볕이 드는 곳에는 어김없이 하양 빨강 매화가 얼굴을 내밀고 강바람을 타고 온 씨앗은 소박한 들꽃을 피워냈다. 강 넘어 언덕배기에 눈처럼 내려앉은 뽀얀 봄이 꿈결 같기만 하다.

벚꽃 필 무렵 섬진강에서 나는 벚굴. 홍매화가 붉은 꽃망울을 터뜨렸다. 보랏빛을 띠는 재첩껍데기.

벚꽃 필 때 맛보는 별미 재첩국과 벚굴

"섬진강에 살다 보면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을 나누는 게 무의미해져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옛날부터 왕래가 잦다 보니 서로 동화된 것이 많거든요. 말도 섞여서 이게 경상도 사투리인지, 전라도 사투리인지 헷갈려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푸른 하늘과 맑은 강, 흰 매화가 어우러진 섬진강에 봄 기운이 가득하다.

구수하면서도 경쾌한 억양을 구사하는 김지원 해설사는 하동에서 나고 자란 하동 토박이다. 초등학교 5학년과 2학년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곧잘 아이들을 데리고 강을 찾는다. 이른 아침 물안개 피어오르는 섬진강은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풍경. 보름달 밝은 밤이면 평사리 백사장에 모여 앉아 지인들과 차 한잔을 기울인다. 섬진강은 언제나 그렇듯 모두에게 변함없이 너그러운 어머니와 같은 강이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머리 위에 떴다. 마침 도착한 곳은 섬진강 하구 재첩마을. 강과 바다가 만나고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섬진강 하구는 특히나 질 좋은 재첩이 많이 나는 지역이다. 제철을 맞은 진한 재첩국과 벚꽃이 필 때 난다고 해 '벚굴'이라 부르는 강굴은 봄철 섬진강에서 꼭 먹어봐야 할 별미. 재첩이 눈에 좋다고 해서 섬진강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가막조개(재첩)국을 많이 먹었다. 정력에 좋아 많이 먹으면 다시 첩을 얻는다 해 '재첩'이라는 우스갯말도 있단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참 얄궂은 이름이다. 바다 석화보다 큼지막한 벚굴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쫄깃한 식감과 달큰한 향이 입맛을 돋운다. 봄철 섬진강 꽃구경에 별미까지 맛보았으니 올봄 누릴 호사는 다 누린 것 같다.

산골마을에도 뽀얀 봄이 내려앉았다.

눈부시게 펼쳐지는 봄의 향연

섬진강 하구 갯벌로 이어지는 길을 걷다 보니 화사하게 피어난 꽃나무 아래 분홍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다. 벌써 꽃이 진 것인가 놀란 마음에 다가가보니 꽃잎이 아니라 재첩껍데기다. 이곳에서는 조개껍데기마저 봄빛이구나 싶어 설핏 웃음이 나왔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곧 있으면 만개할 벚꽃을 그려본다. 섬진강을 벗 삼아 19번 국도를 타고 달리는 '십리벚꽃길'은 하얀 눈처럼 피어난 벚꽃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그중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5km 구간에서 절정을 이룬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연분홍 벚꽃길과 맑은 화개천, 첩첩이 쌓여 있는 지리산 자락이 한 폭의 그림이 돼 펼쳐진다. 사랑하는 연인이 손을 잡고 걸으면 백년해로한다 해 혼례길이라고도 불리는 길이다. 산수유와 매화도 축제를 기다리고 있다. 광양 매화축제가 3월 22일부터 30일까지 열리고 구례 산수유축제도 같은 기간 동안 열린다. 구름처럼 몰려온 차들로 도로 위에서 꼼짝할 수 없다면 차에서 내려 걸어보는 건 어떨까? 한층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눈부신 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는 섬진강 갈대 숲은 겨울 철새들의 쉼터가 되기도 한다. 차밭과 매화, 강이 어우러진 섬진강의 봄 풍경.

Tip 섬진강 100리길 추천 코스

(약 15km, 예상 소요 시간 약 3시간~3시간 30분)
하동송림→목도송림→섬진강 갈대숲→재첩마을→선소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