賢者 殿閣/최진석의 노장적 생각

침묵을 영접하라

초암 정만순 2018. 7. 6. 09:00



침묵을 영접하라



세상을 꿈꾸는 자, 우선 침묵하라

 
송필용 작. 침묵
      

유전자로만 본다면 인간과 원숭이 사이에는 약 2%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100분의 2만 다르다.
인간과 동물로 구별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가깝다.
심지어는 아메바와도 차이가 14%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숫자로 본다면 인간과 아메바 사이도 뭐 그리 멀겠는가.
하지만 14%라는 차이만으로도 아메바는 맘먹고 관심을 표하기 전에는 인간에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인간과 원숭이 사이는 더하다. 겨우 2%다. 그것도 커봐야 그렇다. 사실은 2%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원숭이는 동물원에 갇히고 인간은 유유자적 구경한다.
신분이나 계급적으로는 98% 이상의 차이가 난다. 이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다.

미미한 유전자적 차이를 거대한 신분의 차이로 바꿔버리는 요인은 무엇인가. 문화다.

동물이나 식물은 자신의 진보를 전적으로 진화에 의존하지만 인간은 문화에 더 의존한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문화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은 문화적 활동에 철저한 사람이다.

문화(文化)는 글자 그대로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혹은 그려서(文) 변화를 야기(化)하는 일이다.

변화를 야기하는 인간이 더 인간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인간으로는 상급이라는 말이다. 변화를 야기하는 동력을 흔히 창의력이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창의력은 가장 문화적이며 인간적인 활동력이다. 창의력을 통해 인간은 변화를 야기한다.

변화를 야기하려고 시도하는 인간에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주체적이라고 말해준다.

그렇지 않고 누군가 야기해놓은 변화를 수용하거나 답습하기만 하면 종속적이다.


그렇다면 변화를 야기하고 수용하는 일은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어디서 출발하는가. 과거 아프리카의 타조 사냥은 이렇게도 했다고 한다.

타조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쫓는다.

타조와 쫓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유지되는 일정한 간격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존재하게 되는데, 쫓고 쫓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쫓기는 쪽의 긴장감은 커지기만 한다.

타조가 쫓기고 쫓기다가 긴장감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지면 도망가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대가리를 뜨거운 모래땅에 처박는다.

사람들은 그냥 가서 꼼짝 않고 머리를 박고 있는 타조를 잡아오면 되었다. 타조들은 다 그래 왔다.

그리고 또 다른 타조들도 그렇게 잡혀 죽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그런 집단적으로 속성화된 습관에 갇혀서 함께 어울리던 타조 가운데 어느 한 타조가 자폐증을 앓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다른 타조들을 따라서 머리를 처박지 않고 무리에서 이탈하여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쫓아오는 사람들을 노려보는 일을 저질렀다.

DNA에 박혀 있는 일정한 방향을 지키다가 돌발적으로 선회(旋回)하여 습관적이고 집단적으로 공유하던 방향을 혼자서 바꾼 것이다.

모든 타조들과 공유하던 언어와 문법들에서 이탈하여 친구 하나 없는 곳으로 스스로 던져진다.


세계는 인간에게 항상 무엇인가 반응을 강요한다.

우리 삶은 모두 그 강요에 대한 나름대로 반응일 뿐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타조고, 타조를 쫓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반응을 강요하는 세계 전체로 비유된다.

내내 쫓기기만 해왔던 무리에서 이탈한 어떤 한 타조가 뒤를 돌아보고 갑자기 이전에는 있어 본 적이 없는 전혀 다른 반응을 시도했다면, 이것이 바로 새로운 도전이다.

일단 뒤돌아보면 그 이전의 관행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시도될 것이고 그것은 세계에다가 이전에 있어본 적이 없는 어떤 무늬를 그리게 될 것이다.

문화적 활동의 결과를 수용하던 타조가 주도적으로 문화적 활동을 하는 타조로 변했다. 창의적인 타조다.

타조가 한 미증유의 창의적 도전은 어디서 출발하는가?

집단적으로 함께 내달리던 정해진 방향에서 급선회하던 바로 그 지점이다.

대가리를 처박도록 길이 잡힌 방향을 향해 앞으로만 달리던 타조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뒤로 돌았다.

전진(前進)하다 역진(逆進)하는 타조는 두 방향을 다 경험하지만, 이 경험의 여정에는 전진과 역진이 교차하는 신비한 지점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여기가 바로 문화적이고 창의적이며 인간적인 활동의 자궁이다.

이 신비한 지점에서는 세계에 내몰리느라 떼를 지어 달리면서 나누던 수없이 많고 부산스러운 말들이 갑자기 끊긴다.

익숙한 모든 행위와 언어가 갑자기 사라지며 정적에 휩싸이는 순간이 있다.

언어의 길이 끊기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지경이며 어떤 문자나 표지판도 더 이상의 쓸모가 사라져버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상태다.

언어의 길이 끊기는 바로 거기서 새로운 언어가 태어나서 새 길이 난다.

그러니 새 길은 당연히 언어가 끊기던 바로 그 찰나에 뿌리를 둔다.

무너진 표지판 곁에 새 표지판은 아직 서지 않고, 어떤 말도 의미를 담지 못한 미숙의 상태, 어떤 숫자도 얹혀 있지 않은 좌표답지 못한 좌표, 방향을 잃은 아둔한 의식, 이것을 우리는 침묵(沈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전진의 문법과 역진의 언어가 사멸과 탄생으로 운명을 달리하며 서로 등을 대는 바로 그 교차점이다.

여기는 새 언어가 태어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철 지난 언어가 사라지는 곳이 아니던가.

언어가 끊긴 곳에서는 유령처럼 침묵만이 태어난다. 모든 방향의 선회는 침묵을 지나간다.


건명원(建明苑)을 열어 새 시대를 여는 창의 전사를 양성하고 있다.

역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강한 기운을 갖게 해주고 싶다. 반역의 기운이다.

그런 충동적 기운을 배양할 목적으로 구성된 프로그램 가운데 ‘걷기 명상’이 있다.

모든 원생(苑生)들이 함께 5시간 정도를 걷는다.

핵심은 1시간 정도를 빼서 ‘묵언’(黙言)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걷는다.

침묵을 지나가 보라는 것이다.

뜨거운 모래 바닥에 머리를 처박도록만 훈련된 사람들에게는 함께 어울려 부산스러운 잡담을 나누는 일이 더 익숙하고, 침묵은 큰 곰을 어깨에 앉혀 놓고 걷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나 한 번 침묵을 내면 깊숙한 곳까지 끌고 가 본 사람은 (전진과 역진 사이의 교차점에 서 본 사람은) 그 ‘신비한 유령’을 피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법의 양탄자’ 같아서 침묵을 경험한 그 사람을 새로운 어딘가로 반드시 데려간다.

그 사람은 가는 내내 알 수 없는 힘을 발휘하며 새 길을 낸다. 이것이 침묵의 힘이다.

원래 있었던 것이라도 이제는 더 이상 원래의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재탄생하여 현현한다.

잡담과 부산스러움을 극복하고 원래 있었던 것의 감춰진 진실을 등장시킨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저 멀리 산이 있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 산을 고압선을 놓을 자리로도 보고, 돌을 캘 곳으로도 보고, 산삼을 감추고 있는 곳으로도 보고, 전원주택을 지을 곳으로도 본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산의 진실이 아니다.

그렇게 보는 그 사람의 진실일 뿐이다. 조작된 것이다. 잡다하고 폭력적인 ‘소유’적 발상일 뿐이다.

의 진실은 고압선이나 돌이나 산삼이나 전원주택으로 보는 시각이 끊긴 곳에서 드러나는 그 무엇일 뿐이다.

그런 잡다한 시각이 끊긴 곳에서 침묵이 유령처럼 등장한다.

그 침묵의 유령만이 감춰진 산의 진실을 영접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산을 어떤 특정한 소유적 시각으로 제한하지 않고 그저 한마디 할 뿐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의 진실은 우리가 정하지 않고 산이 스스로 드러낸다.

드러나는 그것은 산을 산이게 하는 것으로서 산에만 있는 성스러움이다.

이 성스러움은 침묵의 간이역에만 등장한다.

당연히 침묵은 또 외부의 성스러움을 영접할 수 있는 준비다.

그런데 침묵으로 외부의 성스러움을 받아들여 본 사람은 또 자신의 성스러움을 깨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태리 가서 메디치 가문을 보고 온 부자들이 많다.

메디치 가문에 대해서는 이태리 사람보다도 더 많이 알기도 한다. 세 번을 보고 왔다는 사람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메디치 가문을 보고 이해하는 대열 속에서 계속 경쟁적으로 전진한다.

그런데 메디치 가문을 세 번이나 보고 와서 그 사람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메디치 가문에 대한 지식이 증가한 것 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메디치 가문을 구경하는 전진만 있었지 역진으로 선회할 침묵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침묵을 경험하면 역진으로 선회하여 내가 내 나라에서 할 수 있는 메디치 가문 같은 역할은 무엇일까를 고민한다. 이 반성만이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그가 다시 태어나면서 그가 속한 사회도 비로소 달라진다.

전진하던 사람끼리 공유하는 문법과 언어의 잡다한 수다를 끊고, 스스로 무리에서 이탈하여 고독 속으로 자폐하는 것이다.

그 자폐의 통증을 동력 삼아 역진하여 그는 아직 열리지 않은 새 세상의 문고리를 잡는다.

역진의 기운이 꿈틀대는 침묵 속에서 삶이 확장성을 회복한다.

자신의 감춰진 성스러움이 서서히 현현한다.

이제 무엇인가를 그려서 변화를 야기하는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힘은 인간에게는 성스러움 그 자체다.

그러니 인간은 침묵의 간이역에서만 성스러워질 수 있다.

침묵은 자신을 성스럽게 하는 힘이자 외부의 성스러움을 영접하는 장치다.

장자는 말한다.

“참된 인간(眞人), 즉 무엇인가 그려서 변화를 야기하는 인간, 창의적 인간, 모험하고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은 고요하다.

외부 세계를 소유적 시각으로 제한하지 않으니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是之謂眞人 其容寂…與物有宜 而莫知其極. 『莊子`大宗師』)

참된 인간은 고요하게 침묵을 지나간다.

침묵은 자신의 성스러움을 드러내며, 외부의 성스러움을 영접한다. 여기서 위대함이 자란다.

 새 세상을 꿈꾸는 자, 우선 침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