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遺跡 /儒敎 美術 建築

문양과 절제의 미덕

초암 정만순 2018. 4. 13. 15:40




문양과 절제의 미덕

그림자의 미학



한옥은 이미 수백 년 전에 그림자의 의미와 중요성을 꿰뚫고 있었고 이것을 집에 실어냈다. 한옥은 그림자를 잘 살려내는 집이다. 빛만 잘 살리고 그림자를 경원한다면 진정한 지혜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림자에만 매달리는 어두운 집이 아니다. 빛을 잘 살리면서 그림자도 함께 잘 살리는 것이 바로 한옥의 지혜다. 한옥이 얼마나 햇빛에 집중하고 햇빛을 소중히 여기며 살려내는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충분히 살펴보았다.

중요한 것은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옥은 햇빛에 더해 그림자까지 둘 모두를 잘 살려서 그림자가 갖는 긍정적 가능성을 한껏 살려낸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림자 자체가 그렇게 나쁘고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며 긍정적 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을 살리면 일상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림자를 살리면 그것은 다시 빛의 의미와 활약을 크게 돕는다. 한옥에서는 빛이 있어서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가 있어서 빛이 있다. 그림자는 빛을 정의하기 위한 짝으로서만 존재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림자 스스로도, 그림자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존재 가치와 조형력을 갖는다. 그런 다음 햇빛과 동등한 자격으로, 동등한 반쪽으로 나란히 서서 집의 의미를 풍요롭게 해준다. 일찍이 이것을 알아채고 활용한 것이 한옥이었다.

한옥에서 그림자는 흰 회벽에 문양을 넣는 방식으로 살아난다. 거꾸로 한옥의 벽을 흰 회칠만 하고 끝낸 이유이기도 하다. 공포와 단청 같은 장식을 법으로 금하기도 했고 선비의 검소함 때문에라도 한옥의 벽은 어쩔 수 없이 희게 남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흰색만으로도 보기 좋았다. 선비의 미덕에도 합당했다. 하지만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심심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자국이 남는 장식은 가하지 않았다. 머물지 않는 무형의 장식을 넣었다. 바로 그림자가 드리우는 문양이다. 예안 이씨 종가 충효당을 보자. 그림자가 드리우니 집이 훨씬 정겹다. 2차원 면이 3차원 입체로 바뀐다. 그림자가 없었다면 체온 없는 멍한 평활면으로 남았을 것인데 그림자가 들어가면서 피가 돌고 표정이 생긴다. 그 표정은 해학적이고 소박하다. 친절하고 은근하다. 사람을 담아도 될 것 같다.


예안 이씨 종가 충효당

흰 회벽에 지붕 그림자가 지면 집의 존재적 의미가 완성된다.


농암 종택 긍구당은 바닥에 붙여 작은 문을 아담하게 냈고 그 위의 넓은 면을 훤칠한 이마처럼 비운 뒤 흰 회벽으로 처리했다. 작은 운동장만 한 흰 회벽 면에 마음껏 문양을 그려넣는다. 마음껏이라 하지만 과하거나 교만해지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예술적 균형을 잡으며 그림자로 문양을 넣는다. 지붕 선은 사선으로 그림자를 내린다. 길고 완만하게 내려오던 그림자는 끝 부분에서 각도가 급해지면서 확 떨어진다. 꺾이는 각도가 상당히 기하학적이다. 완만한 사선 끝에는 서까래 네 개가 벙어리장갑을 뚫고 나온 어린아이 손가락처럼 삐쭉 머리를 내민다. 무슨 장식이 더 필요 있으랴. 사람 손으로 색을 입혀 그린 단청보다 한 수 위다. 자연이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흰 회벽은 그림자라는 부정적 상태가 긍정적 조형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바탕 면이다. 햇빛을 그림자로 둔갑시키고 햇빛이 장식을 그려대는 바탕 면이다.


농암 종택 긍구당

작은 문을 바닥에 붙이면 위쪽에 넓은 회벽 면이 나오고 그 위에 지붕이 그림자를 그린다. 문의 휴먼 스케일을 돕는 자연 장식이다.


지붕 그림자를 벽에 지게 해서 각종 문양을 넣어 즐겼다. 처마 길이는 태양 각도와 합작해서 계절에 따라 그림자의 길이를 결정한다. 여름에는 위까지 바짝 올려 몽땅하게, 겨울에는 아래까지 내려뜨려 느슨하게 그림자를 지었다. 서까래와 막새는 그림자 끄트머리를 자글자글하게 만들면서 장식 효과를 높였다. 가끔 나뭇가지도 어울린다. 운조루 사랑채가 좋은 예다. 그림자의 미학을 살리기에 모범적 구성이다. 흰 회벽의 면적이 충분하다. 그 옆에 창문이 딱 알맞게 거든다. 그림자는 충분히 짙고 왕성하다. 맑은 날임을 알 수 있다. 그림자 끄트머리를 솜씨 좋은 화가가 툭툭 쳐낸 것처럼 서까래와 막새의 윤곽이 정겹게 드러난다. 담 밖에 소담하게 서 있을 법한 나뭇가지가 성글성글한 그림자를 옅게 뿌린다. 바탕 면이 충분하고 옆에서 창문이 거들며 나뭇가지까지 살랑대니 그림자의 미학을 살리는 데 좋은 조건을 다 갖추었다.


운조루 사랑채

바탕 면이 충분하고 옆에서 창문이 거들며 나뭇가지까지 살랑대니 그림자의 미학을 살리는 데 좋은 조건을 다 갖추었다.


운조루뿐이랴. 이런 장면은 대부분의 한옥에서 최소한 한 곳 이상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장면은 한옥살이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지금처럼 자극적인 유흥 문화가 없던 시절 이런 장면을 상상하는 일은 감각적 욕구를 보듬는 중요한 구실을 했다. 흰 회벽에 지는 지붕 그림자는 단청과 공포가 금지되었던 한옥에서 그 역할을 대신하는 중요한 장식 요소였다. 사람 손으로 일부러 그린 것도 아니고 해가 그려주는 것일진대, 유교의 법도도 즐겁게 허락하고 즐겼을 것이다. 선비의 미덕 가운데 풍류가 들어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자연과 벗 삼아 예술에 취하고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이 선비의 절제 덕목에 흠이 되지 않듯이 자연이 허락한 그림자는 얼마든지 허락될 수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엄격한 절제를 전제로 허락했다. 그림자 장식은 어디까지나 하루살이다. 단청이나 일반 장식처럼 도장 찍듯 고정되지 않아서 손에 넣을 수 없다. 사람이 물감으로 그려넣는 것도 아니다. 철저히 무채색이다. 고형과 색을 경계하고 거부한다. 고형과 색은 탐욕을 일으키는 주범이다. 부질없을수록 인간의 마음에 찰싹 달라붙어 헛것을 짓게 만들어 인간을 망친다. 이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피했다. 그림자까지만 허락을 받아서 즐겼다. 선비에게 풍류가 허락되었어도 어디까지나 자연과 더 가까워지기 위한 범위 내에서이듯이 그림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자는 해가 지면 안개보다 허무하게 사라진다. 오기는 다시 온다. 날씨가 맑으면 바로 다음 날 똑같은 모습으로 온다. 흐리면 며칠 기다려야 한다. 하루 이틀, 계절이 서서히 지나가면 그림자의 길이와 두께도 조금씩 바뀐다. 자연의 흐름에 맞춰 기다리며 즐겨야 한다. 지붕 그림자는 장식을 주되 탐욕을 경계하는 가르침과 함께 준다. 한규설 대감가 안채를 보자. 그림자 문양이 흥겹고 제법 감흥을 자극한다. 하지만 헛것을 짓게 하지는 않는다. 부질없는 것을 잘 알게 해준다. 바탕이 간결하고 절제하니 문양도 그렇다. 장식을 이렇게 즐길 수도 있는 것이다. 가히 선비의 절제 덕목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쯤 되면 유가와 도가의 가르침을 굳이 이름 붙여 가를 이유가 없어 보인다.


한규설 대감가 안채

흰 회벽과 갈색 문만으로 구성된 추상 미학에 그림자는 중요한 친구다.


절제의 산물이기에 농촌 사회의 세간과 잘 어울린다. 청풍 도화리 고가를 보자. 그림자는 벽에 걸린 각종 농기구와 잘 어울리면서 집의 전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단청이었다면 이렇지 못했을 것이다. 공포(栱包)를 짰어도 이렇지 못했을 것이다. 땅을 일구는 데 필요한 검소한 품목들 사이기에 이렇게 잘 어울린다. 농촌 사회의 세간 목록에 이름을 올릴 만하다. 집안 구성원의 당당한 일원이다.

청풍 도화리 고가

그림자는 단청이나 공포보다 농촌의 세간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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