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도(尋牛圖) 는 인간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 묘사한 것으로,목우도(牧牛圖)라고도 합니다. 대개는 소와 소치는 동자가 등장하며 때로는 소와 스님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모두 10개의 장면으로 구성됩니다.
수행자가 본성本性[소]을 잃어버린 뒤 그것을 찾아 헤매는 그림부터 소를 찾은 후 다시 중생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모습으로, 곧 선禪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순서를 소에 비유하여, 소를 찾고 얻는 과정과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0단계의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기의 본심인 소를 찾아 나선다
2) 소는 못 보고 소의 발자취만 발견한다
3) 소를 발견한다
4) 야생의 소를 잡는다
5) 소를 길들인다
6) 소를 타고 무위의 깨달음의 세계인 집으로 돌아온다
7) 이제 소는 달아날 염려가 없으므로 소 같은 것은 모두 잊어 버리고 안심한다
8) 다시 사람도 소도 모두 본래 공임을 깨닫는다
9)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른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깨닫는다
10)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1.심우 (尋牛)-소를 찾아 나선다.
망망발초거추심 (茫茫撥草去追尋)
수활산요로갱심 (水闊山遙路更深)
역진신피무처멱 (力盡神疲無處覓)
단문풍수만선음 (但聞楓樹晩蟬吟)
망망한 수풀을 헤치고 소의 자취를 찾노니,
강물은 넓고 산은 험하여 길은 더욱 깊기만 하다.
힘이 다하고 기력이 떨어져 지쳐도 찾을 길 없는데,
다만 숲속 나뭇가지엔 매미 우는 소리만 들리네.
심우는 소를 찾는 동자가 망과 고삐를 들고 산속을 해매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처음 수행을 하려고 발심한 수행자가 아직은 선이 무엇이고 본성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찾겠다는 열의로 공부에 임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본래 잃은 것이 없는데 무엇을 찾는단 말입니까?
깨달음을 등지니 번뇌에 휩싸여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2.견적 (見跡)
수변임하적편다 (水邊林下跡編多)
방초리피견야마 (芳草離被見也磨)
종시심산갱심처 (縱是深山更深處)
요천비공즘장타 (遼天鼻孔怎藏他)
물가와 나무 아래 수많은 발자국
풀이 우거졌으나 이를 헤치고 찾아본다
비록 이곳이 산이 깊고 골짜기가 깊다 해도
요천의 비공이 어찌 그것을 감출 수 있겠는가
견적은 소의발자국을 발견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서 본성을 찾으려는 일념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보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풀이 느끼게 된다는 것을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것으로 상징해서 표현한 그림입니다.
교범의 가르침에 의해 선학과 그 뜻을 알고 가르침을 살펴서 심성의 자취를 깨닫는, 아직 깨달음의 문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이제 겨우 심성의 자취를 깨닫는 단계를 나타냅니다.
3. 견우(見牛)
황앵지상일성성 (黃鶯枝上一聲聲)
일난풍화안류청 (日暖風和岸柳淸)
지차갱무회피처 (只此更無回避處)
삼삼두각화난성 (森森頭角畵難成)
나뭇가지 위에 지저귀는 금빛 꾀꼬리
따뜻한 날 화창한 바람에 언덕 위 버들가지 푸르네
다만 이것이니 어찌 다시 회피할 것인가?
삼삼한 두각 그림으로도 그릴 수 없노라
견우는 동자가 멀리 있는 소를 발견한 것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이는 오랜 노력과 공부 끝에 본성을 깨달음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물에는 짠맛이 있으나 보기만 해서는 모르고 맛을 보아야 짠지 아닌지 알수 있듯, 그림의 색깔만 보아서는 그 그림을 채색할 때 아교가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 알 수 없고, 자기가 직접 그림을 그려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즉 본성을 찾기 위한 선은 남이 하는 것을 보기만 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가 직접 체험해야만 깨칠 수 있고 본성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득우 (得牛)
갈진정신획득거 (渴盡精神獲得渠)
심강역장졸난제 (沈强力壯卒難除)
시유재도고원상 (時有縡到高原上)
우입연운심처거 (又入煙雲深處居)
정신을 가다듬어 소를 얻었지만
사납고 힘이 세어 다루기 어렵도다
어느 때는 높은 산 위에 이르고
흑은 깊은 구름 속에 숨으려한다
득우는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낀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 경지를 선종에서는 견성이라고 하는데 마치 땅속에서 아직 제련되지 않는 금광석을 막 찾아낸 것과 같은 상태라고 합니다. 이때의 소의 모습은 검은색으로 표현하는데 아직 삼독에 물들어있는 거친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검게 표현합니다.
오랫동안 산천에 파묻혀 있던 소와 같이 온갖 번뇌 속에 파묻혀 있던 본성을 비로소 만났으나 아직 삼독에 물들어서 야성을 그리워 하고 방종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정진하고 공부에 힘써야 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5 목우 (牧牛)
편색시시불리신 (鞭索時時不離身)
공이종보입애진 (恐伊縱步入埃塵)
상장목득순화야 (相將牧得純和也)
기쇄무구자축인 (羈鎖無拘自逐人)
채찍과 고삐를 쉼 없이 사용하여 곁에서 여의지 말라
그대가 한 걸음 한 걸음 애진으로 들어감이 두렵다
그러나 끌어내어 길들이고 순화되어
채찍과 고삐에 구애되지 않더라도 스스로 사람 따르네
목우는 자연스럽게 놓아두어도 저절로 가야할 길을 갈 수 있도록 거친 소를 길들이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삼독의 때를 지운 보임의 단계를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한 번에 유순하게 길들여야지 만약 이때 달아나면 그 소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소는 길들여진 정도에 따라 차츰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외부의 경에 의해서 오직 자신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소의 고삐를 더욱 단단히 잡아서 늦추지 말고 머뭇거리는 생각이 싹트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6 기우귀가 (騎牛歸家)
기우이려욕환가 (騎牛迤麗欲還家)
강적성성송만하 (羌笛聲聲送晩霞)
일박일가무한의 (一拍一歌無限意)
지음하필고진아 (知音何必鼓唇牙)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네
강적의 피리 소리 저녁노을 속에 울리고 있네
한 박자 한 곡조마다 무한한 뜻이 담겨 있으니
그 지음 어찌 헛된 말하리
동자가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며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소는 완전히 흰색으로서 특별히 지시를 하지 않아도 동자와 일체가 되어서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때 구멍 없는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가히 육안으로 살필 수 없는 본성의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미 본성을 찾았으니 모든 것이 완숙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몸을 소 등에 올려놓고 하늘을 쳐다보니, 소는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잡아당겨도 서지 않으며 오직 본향을 말없이 향하고 있습니다.
7. 망우존인(忘牛存人)
기우이득도가산 (騎牛已得到家山)
우야공혜인야한 (牛也空兮人也閑)
홍일삼간유작몽 (紅日三竿猶作夢)
편승공돈초당간 (鞭繩空頓草堂間)
소를 타고 본향으로 돌아오니
소는 간 곳 없고 사람은 한가롭다
해가 석 자나 떳는데도 늦잠을 자니 오히려 꿈이러니
소용없는 고삐와 채찍은 초당 간에 던져 두노라
망우존인 은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찾던 소는 온데간데 없고 자기만 남아 있다는 내용입니다.
결국 소는 마지막 종착역인 심원에 도착하게 하는 방법이었으므로 이제 고향 집과 고향 산천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방법은 잊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뗏목을 타고 피안에 도달하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금은 광석에서 나오고 달은 구름에서 나온다. 그러나 금을 얻은 다음 폐광석은 버려야하고 달이 뜬 다음 구름에는 마음을 두지 않아야 한다. 깨달음의 한줄기 빛이 영원한 위음왕불 밖의 세계까지 밝게 비춘다.
8. 인우구망(人牛具忘)
편삭인우진속공 (鞭索人牛盡屬空)
벽천요활신난통 (碧天遼闊信難通)
홍로염상쟁용설 (紅爐焰上爭容雪)
도차방능합조종 (到此方能合祖宗)
채찍과 소와 사람이 모두 공하니
맑고 푸른 하늘 멀고 높아 소식 전하기 어려워라
끊는 솥에 어찌 흰 눈이 남아 있겠는가
이에 이르러 비로소 조종과 하나가 되도다
인우구망은 소를 잊은 다음 자기 자신도 잊어버리는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텅 빈 원상만을 그리게 됩니다.
객관적인 소를 잊었으면 이번에는 주관적인 자신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원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상은 주객분리 이전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것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니 전부가 오직 공입니다. 부처가 있는 곳에서도 노닐지 않고 부처가 없는 곳에서도 급히 달려나와 두 곳 모두에 집착하지 않으니 마음은 오직 허허로울 뿐이다. 백 가지 새들이 만 가지 꽃을 물어 오더라도 모두 오직 한바탕 웃음으로 그친다는 뜻입니다.
9. 반본환원(返本還源)
반본환원이비공 (返本還源已費功)
쟁여직하약맹롱 (爭如直下若盲聾)
암중불견암전물 (庵中不見庵前物)
수자망망화자홍 (水自茫茫花自紅)
본향으로 돌아옴도 이미 헛된 공이니
모두 장님과 귀머거리와 같이 되어
암자에 앉아 앞의 것을 보지 않아도
물은 저절로 잔잔하고 꽃은 스스로 붂다
반본환원은 이제 주객이 텅 빈 원상 속에 자신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침을 묘사합니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조그마한 번뇌도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이다.
인생이란 본래 청정하여 한 티끌의 미흑도 받지 않는다. 유상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보고 무위의 적정에 도달하니 눈앞에 보이는것 모두가 환상과 같다고 하는 실상을 바로 알라는 내용입니다.
10. 입전수수(入廛垂手)
노흉선족입전래 (露胸跣足入廛來)
말토도회소만시 (抹土途灰笑滿顋)
불용신선진비결 (不用神仙眞秘訣)
직교고목방화개 (直敎故木放花開)
가슴을 헤치고 맨발로 거리에 서니
흙을 바르고 재 투성 이지만 얼굴 가득한 웃음
신선의 비결 쓰지 않고
바로 가르쳐 마른 나무에 꽃이 피게 한다
입전수수는 지팡이에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때 큰 포대는 중생들에게 베풀어 줄 복과 덕을 담은 포대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의 제도에 있음을 상징한 것입니다. 사립문 닫고 홀로 앉으니 아무도 그 크고 넓고 편안한 마음을 알리 없다.
자기의 모든 것을 묻어 버리고, 앞의 현인들을 뒤좇던 길도 모두 저버렸다. 오직 마음속엔 공이 있을 뿐이다. 표주박차고 거리에 나가 지팡이를 짚고 집집마다 다니며 스스로 부처가 되게 하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불국을 건설한다는 내용입니다.
십우도송 / 곽암사원 | 차곽암십우도송 / 한용운 | |
우거진 풀 헤치며 소찾으러 가네 (茫茫撥草去追尋) 강 넓고 산 멀며 길은 더욱 험하여라 (水闊山遙路更深) 힘다하고 고달파도 찾을 길 없는데 (力盡神疲無處覓) 단지 단풍나무엔 늦매미 울음 뿐 (但聞楓樹晩蟬吟) | 1 | 이 소 원래 찾을 곳이 없는 게 아니라 (此物元非無處尋)산중에 흰 구름 짙은 줄로만 알았었지 (山中但覺白雲深) 깍아지른 절벽 오르지도 못하는데 (絶壑斷崖攀不得) 바람불자 범울고 용마저 울부짓네 (風生虎嘯復龍唫) |
물가 나무아래 발자국 널려있네 (水邊林下跡偏多) 향기로운 풀 헤쳐보라, 그것이 보이는가 (芳草離披見也麽) 아무리 깊은 산 깊은곳에 있다한들 (縱是深山更深處) 먼하늘로 들린 콧구멍 어찌 숨기랴 (遼天鼻孔怎藏他) | 2 | 여우 살쾡이 가득한 산 몇이었더냐 (狐狸滿山凡幾多) 머리돌려 '이 뭐꼬?' 다시 묻는다. (回頭又問是甚麽) 문득 풀헤치고 꽃 밟은 자취 보니 (忽看披草踏花跡) 딴 길에서 다시 찾을 필요야 없겠지 (別徑何須更覓他) |
노란 꾀꼬리 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黃鶯枝上一聲聲) 따스한 날 포근한 바람 버들잎 푸르러라(日暖風和岸柳靑) 여기서는 또 다시 도망칠 곳이 없어(只此更無廻避處) 수풀 위 두각은 그리기도 어려워라 (森森頭角畵難成) | 3 | 지금 꼭 소울음 다시 들어야 할까 (至今何必更聞聲) 빛남을 반기고 맑음을 살피면서 (揖白白兮踏靑靑) 한발짝도 떼지 않고 그 소를 보니 (不離一步立看彼) 털과 뿔 여기와서 이뤄진 것은 아니네 (毛角元非到此成) |
온갖 정신 다하여 잡기는 잡았으나 (竭盡精神獲得渠) 고집세고 힘이 좋아 다스리기 어려워 (心强力壯卒難除) 어떤 때는 고원 위에 올라가 있고 (有時纔到高原上) 다시 안개구름 깊이 들어 가누나 (又入烟雲深處居) | 4 | 보았으나 못잡을까 의구심 다시 들어 (已見更疑不得渠)소털같이 흔들리는 맘 다잡기 어려워라 (擾擾毛心亦難除)문득 그 고삐 손 안에 있음을 알았으니 (頓覺其轡已在手) 원래부터 떨어져 있던 것은 아니었네 (大似元來不離居) |
채찍 고삐 한시라도 떨구지 않는건 (鞭牽時時不離身) 내키는 대로 흙먼지로 들어갈까봐 (恐伊縱步入埃塵) 서로가 짝이되어 어울리게 되면 (相將牧得純和也) 멍에 안채워도 절로 사람 따르리 (羈鎖無拘自逐人) | 5 | 꼴먹이고 길들이며 키우는 것은 (飼養馴致兩加身) 옛 버릇 쫒아 진흙행 염려 때문 (恐彼野性逸入塵) 한시라도 고삐와 멍에에 기대려 마라 (片時不待羈與絆) 이제는 모든 게 나에게 달려있네 (萬事於今必須人) |
소타고 굽이굽이 집으로 가려하니 (騎牛迤邐欲還家) 피리소리가 늦은 노을 전송하네 (羌笛聲聲送晩霞) 한박자 한가락 정취는 끝없어라 (一拍一歌無限意) 소리 듣는데 북과 입이 필요하랴 (知音何必鼓脣牙) | 6 | 채찍 쓰지 않고 집 가도록 맡겨두니 (不費鞭影任歸家) 산천의 안개와 노을이 어찌 방해되랴 (溪山何妨隔烟霞) 날 저물도록 긴 길의 풀 다 먹어치우니 (斜日吃盡長程艸) 봄바람 안보여도 향기 입안 가득한걸 (春風未見香入牙) |
소를 타고 고향 산에 이르러니 (騎牛己得到家山) 소는 사라지고 사람은 한가로와라 (牛也空兮人也閒) 벌건 낮까지 집안에서 잠이나 자며 (紅日三竿猶作夢) 채찍과 밧줄은 헛간에 버려두네 (鞭繩空頓草堂閒) | 7 | 마음대로 물과 산을 돌아다니니 (自任逸蹄水復山) 녹수청산이여 한낮에 한가로워라 (綠水靑山白日閒) 몸이야 이미 복숭아 들판에 와 있건만 (雖然已在桃林野) 조각 꿈은 아직 작은 창가에 걸려있네 (片夢猶在小窓間) |
채찍 고삐 사람 소 한꺼번에 사라지니 (鞭牽人牛盡屬空) 푸른하늘 멀고 넓음 표현조차 어려워라 (碧天遼闊信難通) 붉게 타는 난로 위에 눈이 어찌 견디리(紅爐焰上爭容雪) 이제야 조사의 뜻 얻었다 하리라 (到此方能合祖宗) | 8 | 색만이 공이 아니라 공또한 공이로다 (非徒色空空亦空) 원래 막힌 곳 없으니 통할 것도 없어라 (已無塞處又無通) 티끌조자 서지 못할 천검에 따르니 (纖塵不立依天劍) 천년 이은 조사의 뜻 혼쾌히 수긍된다 (肯許千秋有祖宗) |
원래대로 돌아오려 많은 노력 쏟았으나(返本還源已費功) 눈멀고 귀먹은 이와 말다툼할 것같네 (爭如直下若盲聾) 암자 안에 틀어박혀 집앞 일을 못보았네(庵中不見庵前物) 물은 절로 넓어지고 꽃은 절로 피는 것을(水自范范花自紅) | 9 | 삼명육통이야 힘쓸 일도 아니건만 (三明六通元非功) 어찌 눈멀고 귀먹은 자와 같으리오 (何似若盲復如聾) 털과 뿔 나지 않는 밖으로 머리 돌리니 (回首毛角未生外) 옛날처럼 봄이 와서 온갖 꽃이 피어 있네 (春來依舊百花紅 |
가슴 풀고 맨발로 시장바닥 들어가니 (露胸跣足入廛來) 흙과 재 덮어서도 웃음은 뺨에 가득 (抹土塗灰笑滿顋) 신선의 비결이 무슨 소용있으랴 (不用神仙眞我訣) 고목에서 절로 꽃핌을 바로 알려 드리리라 (眞敎枯木放花開) | 10 | 진흙속 물속 마다않고 드나들며 (入泥入水任去來) 끝임없이 울든 웃든 뺨에조차 티가 안나 (哭笑無端不盈腮)훗날 망망한 괴로움의 바다 속에서도 (他日茫茫苦海裏)불불 속에서 연꽃 핌을 다시 알려 드리리라 (更敎蓮花火中開) |
- 제1연 : 尋牛(소 찾으러 나섬)
그는 궁극의 행복으로 안내할 깨달음을 추구하다가, 고생 진땅하게 된다.
그에게는 이미 궁극의 행복이 아니면 자신이 구제되지 않는다는 관념이 형성되어 있다 / 또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풀리지 않는 (한용운 제2연 '이 뭐꼬? 등의) 화두'를 들고 애태우고 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이상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현실 / 풀지못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조감 등 원래 없던 괴로움까지 떠 안게 된다. 그의 노력이 진지하면 할 수록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더욱 커져) 그는 더욱 괴로워진다. 스스로 만든 괴로움은 결국 '깍아지른 절벽 오르지도 못하는데 바람불자 범울고 용마저 울부짓는' 상황으로 몰고 간다.
* 곽암사원 4행 '단지 단풍나무엔 늦매미 울음 뿐'은 '처량스럽게 우는 매미소리를 들으니 내 신세가 더욱 서글프게 느껴진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내가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스스로의 법칙대로 잘 돌아간다'는 견적을 의미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의견) 상기 2편의 시 모두가 '괴로움'에서 출발해서 그것이 갈때까지 간 결과, (곽암사원 제3행 '神疲' 등이 말해주듯) 그들의 머리 속에는 오랜 긴장과 압박이 꽉 들어서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 관련 있을 거라 보인다.
『두 바다 사이의 높은 산마루 위에 내가 저 예언자와 같은 영혼에 가득 차 있다고 하면,
무더운 평원에서 지쳐서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모든 것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을 것이다.
어두운 가슴 속에서 천둥과 구원의 광선을 쏠 준비를 하며,
"그렇다"라고 말하고 "그럼요"라고 대답하며 웃는 천둥, 예언자적인 천둥을 잉태하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잉태하고 있는 자는 행복하다! 실로 미래의 빛을 밝히고자 하는 자는
그런 먹구럼처럼 오랫동안 산 위에 걸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제3부 '일곱개의 봉인' 중 -
- 제2연 : 見跡 (소 발자국 발견)
곽암사원의 제2행에서는 '향기로운 풀'을 헤치고 소발자국을 보았다. 그는 괴로움이나 괴로움을 조장하게 된 '소를 찾겠다는 생각/의도가 없는 마음의 상태로 주의를 돌렸다고 추측된다.
* '풀을 헤치다'는 전에는 간과했던 '감정, 상태 또는 생각의 속으로 주의를 돌려 자세히 살피다'로 풀이해볼 수 있다. - 예를 들어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골돌히 생각하다가, 그런 생각이 없는 상태로 주의를 돌렸을 경우, 그 상태는 아무런 문제점이 없다는 점이 인식된다
그 상태는 감정, 생각 등 다른 정신적 내용물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이기에 비어있는 듯(空한) 하며, 다소 후련하고 맑은 느낌을 주기에 '향기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거라 추측해본다.
이는 (주의만 한다면) 우리의 머리 속에서 수시로 지각될 수 있는 상태이므로, 3, 4행에서처럼 숨어본들 숨을 수가 없다고 했을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의식의 본성'이라고 하나, 그게 본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상태가 생겼다 없어졌다를 반복하는지에 대해서는, 각자가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한용운 제7연 2행 '공 또한 공이로다'라는 표현을 보면 나타났다 없어졌다하는 뉘앙스가 더 많다.
반면, 한용운은 그냥 풀을 헤치고 그것을 보았다. 만약 2행 '이 뭐꼬?'가 선생이 참구하는 화두가 아니라 앞 행의 여우, 살쾡이 -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 - 가득한 산을 의미한다면, 그는 번뇌 이전(또는 번뇌의 속)의 상태를 본 것이라 추측된다.
- 제3연 : 見牛 (소를 봄)
나는 화두를 풀어본 경험이 없어, 화두를 풀면 어떤 기전에 의해 깨달음이란 현상이 나타나는지 모른다.
다만 한용운 선생은 '이 뭐꼬?'라는 화두를 참구하던 중 바람에 뭔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심이 풀려 적었다는 시(사나이 이르는 곳마다 고향이거늘, 몇몇은 오랜 나그네 시름에 잠겨있네, 한 소리 크게 울려 삼천세계가 허물어지니, 눈 속의 복숭아 꽃이 조각 조각 날린다)'의 '삼천세계가 허물어지니' 등의 이야기나, 위 2편의 시 제7연에서 '공'이 심도있게 언급되는 점을 감안하면, 깨달음은 '현상의 속성이 공'이라는 자각과 관련됨은 확실한 듯 하다.
옛 사람들은 아무 것도 지각되지 않는 비어있는 상태를 '공'이라 표현했다. 이러한 '공'은 흔히 아무 것도 없는 '무'와 혼동된다. - 아무 것도 없는 '무'란 지각의 대상이 아니므로 이러한 '무'는 없거나, 최소한 있는지 없는지 우리가 알 수 없는데, 있는 것은 이미 '유'이므로 실제 '무'는 없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사람들은 '정신 또는 마음'이 육체를 작용하게 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손을 들려 마음먹는다면 바로 손을 들 수 있는 사례 등에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손을 들려는 마음을 먹지 않더라도 흔히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기도 하므로, 손을 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육체는 정신으로부터 생겨나고, 정신은 공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공은 모든 것이 사라진 상태일까?
우리는 지구의 공전에 따라 가만히 누워있어도 1초에 30km의 속도로 태양주변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각할 수 없듯이, 뇌 신경계에서 호르몬 등 수많은 신경전달물질의 량이 항시 증감되고 있다는 사실도 감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현상들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옛날에는 유전자의 특정 부분이 활성/비활성화 됨에 따라 수면호르몬(멜라토닌)이 저녁에 해가 지면 분비되어 새벽 2~3시에 가장 활발하고, 각성호르몬(코르티솔)은 낮에는 잠잠하다가 잠이 들고 난 2~3시간 후를 시작으로 점차 많이 나와 수면/각성 호르몬 등의 비율이 일정 상태가 되는 것이 잠에서 깨어나는 여러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 인간은 외부의 음식을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인간은 주로 시각에 의해 먹이활동을 하도록 진화되었고, 이 시각은 빛이 있어야 작용할 수 있기에(동공을 투과할 광입자가 있어야 망막에 상이 맺히는 등), 밝아질 즈음에 맞추어 유전자의 특정 부분이 활성화/비활성화되어 관련 물질들을 분비/억제하는데, 이에 따른 신경계의 특정한 자극상태를, 우리는 '의식' 또는 '깨어있음'으로 인식한다고 상상해본다.
마찬가지로 그가 바로 그 순간 '공'이라고 여기고 있는 상태 밑에는 감지되지는 않지만 모종의 신경작용들이 간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옛날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즉 '비어있음' 같은 것은 없다. '공'은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당연히 신경계가 특정한 형태로 균형(또는 불균형)을 취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런 상태를 '공'이라고 인식/해석했을 뿐이다.
이는 십우도 제3단계의 깨달음이 '현상의 속성이 공이라는 진리'가 아니라 '현상의 속성을 공이라고 느끼는 모종의 착각'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우리의 문제가 '자각'이 아니라 '현상과 조화'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곽암사원 1,2행의 '黃鶯枝上一聲聲, 日暖風和岸柳靑'은 강력한 착각이 낳은 정서에 불과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 자각'은 왜 아름다움과 평화를 낳는가?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세옹지마'와 유사한 사건들은 우리네 인생사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착각도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자아의 착각 때문에 우리는 살벌한 자연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훔친 돈을 열심히 일해서 벌었다고 속이며 전해준 돈은 늙은 어머님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다.
'공에 대한 자각'이 진정한 깨달음인지 착각인지는 몰라도, 자각이 일으키는 행복감은 오랜 고민을 해결했을 때도, 골치아픈 오해가 풀렸을 때도 나타난다. - 오랜 훈련 끝에 금메달을 따거나, 배우자가 바람피웠다고 의심하고 분노했는데 실제 조사해보고 오해가 풀렸을 때 등
괴로움에 대한 오해가 풀렸을 때 특히 그렇다. 오랜 세월동안 괴로움을 제거하고자 분투하다가 괴로움이 우리의 생존을 위해 위험을 회피하라는 고마운 신호임을 이해하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사람들은 오랜 괴로움의 문제로부터 풀려나 십우도 3연과 같은 홀가분한 해방감과 느긋한 평화로움을 느낀다.
(의견) 소위 깨달음에서 나타난다는 자유와 평화 및 아름다움이 긴장과 긴장의 해소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강도짓이나 강간으로 감방에 갖힌 죄수가 출옥하는 날 자유롭고 평화로와지며 감방 밖의 공기조차 싱그럽게 느껴지듯..
- 제4,5연 : 得牛(소를 붙잡음), 牧牛(소를 기름)
제4~5연에서는 곽암사원 등 이 방면 전문가들이 견우 다음 단계로 득우니 목우니 하는 것을 보니, 깨달으면 모든 것이 한방에 해결되어 잘먹고 잘산다는 과장된 헛소리는 듣지 말도록 하자.
좀전에 좋게 지내다가 갑자기 신경질 내는 나처럼 정서와 감정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좋은 상태도 시간 지나면 시들해지는 것은 인간의 쾌락적응(hedonic adaptation) 속성일 것이고, 지루해지면 새로운 자극을 찾아 나서는 것도 자신을 활성화 해야하는 신경의 속성일 것이다.
물과 만나면 자동으로 녹는 설탕을 생명체로 보지 않듯, 어떤 현상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도록 배열되어 있는 단백질 조각을 생명체로 보기는 힘들 것같다. 그러나 유전자 안 단백질의 이러한 배열들이 활성화되면 꾀꼬리로 하여금 '짝이 안보이면 울어라', '새끼가 있으면 먹이를 먹여라' 등의 기계적 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 이에 생명은 비생명에서 파생된다고 보이며, 인간은 이러한 유전정보의 결과를 보고 곽암사원 제3연 1행의 '노란 꾀고리 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움을 느낀다.
'공'이 실제가 아니라면 만사를 '공'이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것은 관념이다. '공' 의 관념을 아무리 강하게 가지고 있어본들, 숨은 쉬어야 하고, 배가 고프면 먹을 생각이 나고, 생식세포의 활동 등에 따라 성욕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런 것들은 유전자의 번식과 그것의 이송을 담당하는 개체의 생존을 최우선 고려하여 작동하는 유전자 내 조각들의 기계적 작동과 관련되어 있으며, 흔히 욕망이라고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때로는 과도하게 발달된 뇌신경회로에서 발생된 생각들은 스스로를 복제하고 증폭되면서 생물적 본능에 반기를 들곤 하겠지만, 무대뽀로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위 4~5연이나 우리의 경험이 말해주듯 잘 되지도 않는다. 정신과 영혼의 중요성을 강조해본들, 생명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욕망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5연 3행 - 곽암사원 '서로가 짝이되어 어울린다면', 한용운 '한시라도 고삐 멍에에 기대려 마라' -에서 말하듯이
본능과 이성은 조화를 이루어야 하겠지만, 이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현상을 궁극까지 사유하면서 평생동안 어렵게 개발해야 할 기술들로, 위 시에서처럼 1 줄 쓰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라고 보인다.
- 제6,7연 : 騎牛歸家(소타고 집에 돌아옴), 忘牛存人(소를 잊음)
마음이 한가로울 때 자연 등 외부 현상들은 아름답게 인식된다. 그러나 자연 현상들이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자신의 생계를 남의 노동에 얹혀 무위도식으로 유지하는 사람들이야 자연을 늘상 찬미할지도 모르겠지만, 내면의 명령에 따라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절대다수 사람에게는 자연현상이 가혹할 때도 많다.
밭에 나가 일을 시작하자 마자 땀으로 범벅이 되게 하는 한여름의 무더위, 먼지만 폴폴나며 싹을 틔우지 못하는 땅을 보면서 애태우게 하는 가뭄, 콩밭의 싹 95%를 단 며칠 만에 잘라버리고 생계를 막막하게 하는 산비둘기 등은 결코 음풍농월의 대상이 아니다.
삶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있다. '싫어도 일하며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다'
그가 벌건 대낮까지 잠이나 자고 일어났을 때는, 굶주린 창자가 삶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그에게 다시 공부시켜 주리라 보인다.
그러므로 곽암사원 10연과 달리 가슴도 여미고 신발도 꼭 신고 알바나 노가다라도 하면서 상사의 신경질을 꾹 참는 대가로 받는 몇 푼으로 자식들 창자를 채우고 공부시키는 것이,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고목이 되어서도 몇 송이 꽃을 피울 수밖에 없는 자연의 섭리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도 있다고 보인다.
십우도(十牛圖)는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하는데 소를 찾아 나서는 것에 비유하여 선 수행의 단계를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로부터 소는 인도나 중국에서 농경생활의 필수적인 동물이므로 사람과 매우 친숙하다. 세존께서 성불하기 이전에 고타마 싯타르타 태자였는데, 이 '고타마'는 곧 '최상의 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농선일치(農禪一致)를 표방하는 선종에서는 농업 및 노동과 관련 있는 소를 등장시켜, 선수행의 단계를 비유하여 마음을 조복(調伏)받는 10가지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십우도는 언어와 어떤 이론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불립문자, 不立文字), 부처님이 가르친 언어 밖의 의미를 되새겨(교외별전, 敎外別傳), 사람 마음의 실상을 찾아(직지인심, 直指人心), 바로 부처가 되는 것(견성성불, 見性成佛)을 이상과 원리로 삼는 선의 종지(宗旨)를 담고 있다. 십우도는 중국 송대(宋代)의 보명(普明)과 곽암(廓庵) 스님의 그림이 대표적이다. 보명의 심우도(목우도, 牧牛圖)는 조동종(曹洞宗)의 묵조선(默照禪)을 반영한 것으로 점수(漸修)적인 오염과 청청의 과정을 나타낸 것이다. 마지막만 원으로 그리고 있다. 곽암의 심우도는 임제종(臨濟宗)의 간화선(看話禪)을 반영한 것으로 돈수(頓修)적인 잃음과 얻음의 과정을 나타낸 것이다. 열 단계가 모두 원상 속에 그려져 있다. 아래의 십우도는 곽암사원(廓庵師遠) 스님의 작품인데, 석고희이(石鼓希夷) 스님이 화답하는 게송을 지었으며, 다시 괴납대련(壞衲大璉) 스님이 화답 게송을 넣고 있다. 곽암의 십우도는 잃어버린 소를 찾아나서서 소를 보고 잡아 끌어서 마침내 소와 내가 하나가 되어 결국은 공적(空寂)의 상태가 되고, 다시 본래의 일상 생활로 되돌아가는 차례를 그리고 있다. 마음의 작용을 잘 다룬 곽암의 십우도가 가장 널리 유행하여 오늘날 우리 나라 각 사찰 벽화에는 어김없이 십우도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심우도 혹은 십우도는 본래 도교의 팔우도(八牛圖)에서 유래된 것으로 12세기 중엽 중국 송나라 때 곽암선사(廓庵禪師)가 2장면을 추가하여 십우도(十牛圖)를 그렸다. 도교의 팔우도는 무(無)에서 그림이 끝나므로 진정한 진리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청거(淸居)선사가 처음 그렸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한국에는 송(宋)나라 때 제작된 곽암본과 보명(普明)본이 전해져 2가지가 조선시대까지 함께 그려졌는데 현재는 보명본보다 곽암본이 널리 그려진다. 곽암본과 보명본은 용어와 화면 형식이 달라서 곽암본은 처음부터 마지막 단계까지 원상(圓相) 안에 그림을 그리는데 보명본은 10번째 그림에만 원상을 그린다. 대부분 모든 법당 외벽에 자리하고 있다.
[1] 소를 찾아 나서다 (심우, 尋牛)
사람이 본래 소유한 청정한 마음을 잃고, 방종하다가 득실 시비 가운데서 그 마음(소)을 찾고자 한다.
* 처음 발심한 수행자가 아직은 선이 무엇이고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찾겠다는 열의로 공부를 시작하는 단계를 상징한다. 종내불실 하용추심(從來不失 何用追尋) 애초에 잃지 않았는데 어찌 찾을 필요 있겠는가 유배각이성소 재향진이수실(由背覺以成疎 在向塵而遂失) 깨침을 등진 결과 멀어져서 세간을 향하다가 길을 잃었다 가산점원 기로아차(家山漸遠 岐路俄差) 고향집에서 점차 멀어져 갈림길에서 어긋난다 득실치연 시비봉기(得失熾燃 是非鋒起) 얻고 잃음의 불이 타오르니 옳고 그름의 분별력도 어지럽게 일어나네
[2] 소의 자취를 발견하다 (견적, 見跡)
경전의 가르침을 따라 점차 마음의 작용, 그 자취를 이해한다.
*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를 하다보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다.
의경해의 열교지종(依經解義 閱敎知踪) 경전에 의거해 뜻을 헤아리고 가르침을 배워서 그 자취를 안다 명중기위일금 체만물위자기(明衆器爲一金 體萬物爲自己) 그릇들이 다 한가지로 금임을 밝혀내고 우주만물이 곧 자기라는 사실을 체득한다 정사불변 진위계분(正邪不辨 眞僞繫分) 바름과 삿됨을 가려내지 못한다면 어찌 참됨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으리오 미입사문 권위견적(未入斯門 權爲見跡) 아직 입문하진 않았으나 임시 방편으로 '자취를 본다'고 한다
[3] 소를 보다 (견우, 見牛)
가르침을 듣고 익힌 수행공덕으로 본래 구족한 불성에 대한 확신으로 믿음을 일으킨다.
* 본성을 보는 것이 눈앞에 다다랐음을 상징한다. 종성득입 견처봉원(從聲得入 見處逢源) 소리를 쫓아 들어가니 보는 곳마다 근원과 마주친다 육근문 착착무차(六根門 着着無差) 육근(眼耳鼻舌身意)의 문마다 한치도 어긋남이 없네 동용중 두두현로(動用中 頭頭顯露) 움직이는 작용 속에 낱낱이 바탕을 드러냈다 수중염미 색리교청(水中鹽味 色裏膠靑) 물 속의 소금 맛이요 물감 속의 아교인데 잡상미모 비시타물(眨上眉毛 非是他物) 눈썹을 치켜 뜨고 바라보아도 별다른 물건이 아니로다
[4] 소를 얻다 (득우, 得牛)
마침내 참 마음의 성품을 보았다. 곧 깨달음에 이른 상태이다.
이 경지를 선종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 하며, 땅 속에서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금강석을 찾아낸 것에 비유한다. 이 때의 소는 검은색을 띤 사나운 모습으로 그려지며, 아직 탐(貪)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三毒)에 물들어 있는 거친 상태임을 상징한다. 구매교외 금일봉거(久埋郊外 今日逢渠) 오랫동안 야외에 숨어 있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그댈 만났네 유경승이난추 연방총이불기(由境勝以難追 戀芳叢而不己) 뛰어난 경치 때문에 쫓아가기 어려운데 싱그러운 수풀 속을 끊임없이 그리워 하네 완심상용 야성유존(頑心尙勇 野性猶存) 고집센 마음은 여전히 날뛰니 야성이 아직도 남아 있구나 욕득순화 필가편달(欲得純和 必加鞭韃) 온순하게 하고 싶으면 반드시 채찍질을 가해야 한다
[5] 소를 길들이다 (목우, 牧牛) 소고삐를 잡고 길들이는 모습인데, 깨달음 이후의 정진(수행)의 필요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삼독의 때를 지우는 단계로, 선종에서 이 과정을 가장 중요시한다. 이 때의 소는 길들이는 정도에 따라 검은 색이 차츰 흰색으로 바뀌어간다. 전사재기 후념상수(前思裳起 後念相隨) 앞 생각이 조금이라도 일어나면 뒷 생각도 따르나니 유각고이성진 재미고이위망(由覺故以成眞 在迷故而爲妄) 깨달음에 의해 진실을 이루기도 하며 미혹으로 인해 헛되기도 한다 불유경유 유자심생(不由境有 唯自心生) 대상 사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마음이 일어났을 뿐이요 비삭뢰견 불용의의(鼻索牢牽 不容擬議) 코를 꿴 고삐를 당길 뿐이니 사량분별은 용납치 않는다.
[6] 소 타고 집에 돌아가다 (기우귀가, 騎牛歸家) 번뇌의 업에 이끌리지 않고 스스로 잘 조절할 수 있는 상태이다.
동자가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정경을 그리고 있다. 이 때의 소는 전체가 완전한 흰색을 띠고 있다. 소와 동자가 일체가 되어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뜻하며, 구멍 없는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깊은 마음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본성의 소리를 의미한다. 간과이파 득실환공(干戈已罷 得失還空) 투쟁이 끝나서 얻음도 잃음도 모두 비었구나 창추자지촌가 취아동지야곡(唱啾子之村歌 吹兒童之野曲) 나뭇꾼의 시골노래를 흥얼거리며 시골 아이들의 풀피리를 불어 보노라 신횡우상 목시운소(身橫牛上 目視雲霄) 태평한 모습으로 소 등에 누워 눈은 아득한 허공을 바라본다 호환불회 로총부주(呼喚不回 撈寵不住) 불러도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아름다움에 이끌려도 머무르지 않는다.
[7] 소는 잊고 사람만 있다 (망우존인, 忘牛存人) 마음이 공(空)하여 청정한 줄은 알았지만 법(法:경계)에 대해서는 아직 실유(實有)라는 의혹이 남아 있다.
집에 돌아와보니 애써 찾은 소는 간데 없고 자신만 홀로 남은 상태를 표현한다. 결국 소는 본성을 찾기 위한 방편이었고, 이제 고향집으로 돌아왔으니 그 방편은 잊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뗏목을 타고 피안에 도달했으면 방편인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법무이법 우차위종(法無二法 牛且爲宗) 법엔 두 법이 없나니 임시 소에 의탁해 종으로 삼았노라 유제토지이명 현전어지차별(喩蹄兎之異名 顯筌魚之差別) 올가미와 토끼가 명칭이 다른 것 같고 통발과 고기가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일세 여금출광 사월이운(如金出鑛 似月離雲) 마치 금이 광석에서 나오고 달이 구름을 벗어난 것 같으니 일도한광 위음겁외(一道寒光 威音劫外) 한 줄기 차가운 빛은 무한한 시간 밖의 위엄 있는 소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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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도(尋牛圖 또는 십우도)의 의미
사찰에 가면 법당의 벽화로 심우도를 볼 수 있는데, 사찰을 찾을 때 이 심우도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도 탐방의 의미를 더욱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소(牛)는 道家에서는 유유자적, 儒家에서는 義를 상징했지만 佛家에서는 ‘人間의 本來 자리’를 의미한다.
수행으로 人間의 本性을 깨달아 가는 過程을 비유한 ‘심우도’가 이같은 의미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그만큼 소(마음)은 다른 그 어떤 동물보다 佛子와 친숙하다.
대부분의 법당 벽화에 ‘심우도’가 그려져 있고, 불경 곳곳에 소(본성)를 비유한 상징들이 들어 있다.
禪師들도 이러한 소를 수행의 채찍으로 삼아왔다.
高麗 때의 보조국사 지눌은 號를 목우자(牧牛子)라 했다.
‘소를 기르는 사람’ 즉 참다운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卍海 한용운 선사도 만년에 서울의 자택을 심우장(尋牛莊)이라 했다. ‘佛性을 찾기에 전념하는 곳’이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심우도’는 동자와 소를 등장시켜 참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을 묘사한 그림으로
이때 소(牛)는 人間의 眞面目, 본래모습인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수행단계를 10단계로 나누어 표현하기 때문에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심우도는 중국 송나라 때 보명(普明)스님의 심우도와 확암스님의 십우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이 두종류의 그림이 함께 그려졌으나 최근에는 확암스님의 십우도가 법당벽화로 주로 그려지고 있다.
<강길웅 신부님 해설>
신부님 : 부처님은 먼 피안의 세계에 있지 않아요. 각각 사람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마음 안에 있는 本性(부처)를 바라보면 成佛하는 거죠. 그래서 깨닫기 위해서 끊임없이 마음 안에 있는 本性을 찾아 本性을 바라봐야 되요,
여기서는 마음(본성)을 소(牛)로 묘사한 것입니다. 동자가 깨닫기 위해서 소(본성)을 찾아 나서는 것이죠. 그림이 열장이라 해서 십우도(十牛圖), 또는 소를 찾는 그림이라 해서 尋牛圖(심우도)라고도 합니다.
1. 심우(尋牛)
처음 발심(發心)한 수행자가 아직은 禪이 무엇이고 本性(본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찾겠다는 열의로 공부를 시작하는 단계를 상징한다.
신부님 : 동자가 고삐를 들고 소(本性/마음)를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요.
마음(본성, 소)가 어디 있는지?... 아무 대책이 안 섭니다.
그런데 경전을 읽고 수행을 하다 보니까
2. 견적(見跡)
견적은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마음공부를 하다 보면
本性(소, 마음)의 흔적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됨을 상징한다.
신부님 : 잡초 사이로 소(본성, 마음)의 발자국, 흔적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동자는 어렴풋이 본성, 마음이 무언지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정진하다 보니 드디어 마음 한 쪽을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소꼬리를 바라보게 되는 거지요.
우리로 치면 이래요.
어느 날 대책이 안서는 十字架(십자가)가 들이 닥칩니다. 쉽게 말하면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를
내가 떠 맡게 되요. 대책이 안서요. 어떻게 모셔야할 지를...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 시어머니를 모시다 보니까 이게 내 팔자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3. 견우(見牛)
本性(소, 본래마음)을 보는 것이 눈앞에 다다랐음을 상징한다.
신부님 : 하도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를 간절히 하다 보니 하느님 뜻이 어렴풋이 보이는 겁니다.
4. 득우(得牛)
이 경지를 선종(禪宗)에서는 見性이라고 하며,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금강석을 땅 속에서
찾아낸 것에 비유한다. 이때의 소(본성, 본마음)은 검은색을 띤 사나운 모습으로 그려지며,
아직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은 삼독(三毒)에 물들어 있는 거친 마음(心)의 상태임을 상징한다.
신부님 : 네 번째는 드디어 마음(소, 본성)을 붙잡게 됩니다. 바라보게 되는 거지요.
소(본마음, 본성)은 아직 길들여 지지 않았어요.
몸 가는 데 마음 안 오고, 마음 가는 데 몸이 안 오고...
몸은 보이지 않는 마음이고, 마음은 보이지 않는 몸이고...
몸과 마음 이게 일치가 잘 안 되죠.
사실 로마서 7장에 보면 바오로도
‘마음은 善을 하고 싶은 데 몸은 자꾸 惡으로 기울어진다.’고 하듯이
마음과 몸이 갈등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천주교에서도 성체조배를 한다... 묵주기도를 한다... 하지만,
머리는 사우나로 갔다... 미장원에 갔다... 입으로는 기도를 하는 데 이러잖아요?!
바로 요런 상황입니다.
십자가로 치면 이런 거예요.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가 십자가라는 사실을...
하느님 뜻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런데 왜 하필 “나야? 다른 동서도 있는데...”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이럴 때는 소(마음, 본성)이 길들여 지지 않았으니까 코뚜레를 꿰어 가지고
채찍으로 때려야 되요. 즉, 고행과 나눔이 필요한 거예요. 더 고생을 해야 되는 거지요.
5. 목우(牧牛)
삼독심(三毒心)의 때를 지우는 단계로, 선종에서는 이 過程을 가장 重要視한다.
이때의 소(마음)은 길들이는 정도에 따라 검은색이 차츰 흰색으로 변해 간다.
신부님 : 다섯 번째는 드디어 소(마음)이 길들여집니다. 동자가 잠을 자도 소는 도망가지 않아요.
즉,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가 반만 하얗습니다.
이것은 三毒心이 아직 다 안 빠져서 그래요.
세 가지 毒이란, 貪(탐), 瞋(진), 癡(치)를 말합니다.
탐(貪)은 탐욕으로 慾心, 진(瞋)은 분노 성질 부리고 화내는 마음, 치(癡)는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깨닫기는 했는데 아직 삼독심 거기에 얽매여 있어요.
우리로 말하면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가 하느님 뜻이라는 사실은 알았어요.
그래서 마음이 편해요. 그런데 성지순례도 가고...어디 좀 갈려고 하면
때때로 “심란하다.” 바로 그 뜻입니다.
6. 기우귀가(騎牛歸家)
동자가 소(마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며 本來 마음의 故鄕으로 돌아오는
정경을 그리고 있다. 이때의 소(마음)은 전체가 완전한 흰색을 띠고 있다.
소(마음)과 동자가 하나가 되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뜻하며,
구멍 없는 피리에서 나오는 소리는
깊은 마음자리,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없는 소리를 의미한다.
신부님 : 여섯 번째. 동자가 소를 타고 집으로 갑니다.
이제는 욕심,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에서 완전히 벗어났어요. 완전히 초탈한 상태입니다.
소를 타고 집으로 아주 멋있게 개선장군처럼 가는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여기까지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느라고 많은 고생을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꺼꾸로 십자가가 나를 짊어지고 가요. 이 말을 잘 음미해 보세요.
십자가가 어떻게 나를 짊어지고 가나.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를 모시게 되니까
여기 가서 불평하고, 저기 가서 불평하고...
“못 살겠어. 정말 아주 냄새 나는 시어머니 땜에...” 마구 이러니까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속으로 그럽니다.
“저 여자 팔자가 사나워서 그래.”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래.” 등등...
이렇게 말들을 해요.
그런데 이 며누리가 천주교에 입교를 하더만,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섬기네요.
어디를 가서도 시어머니 자랑 하고... 아~ 이러니, 사람들이 이번엔 뭐라 그래요?
“아무개 엄마는 하늘이 낸 여자야.” “아무개 엄마는 천사 같애.”
십자가가인 똥 오줌 싸는 시어머니가 이번엔 며느리를 태우고 가는 거예요.
7. 망우존인(忘牛存人)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찾아 끌고 온 소는 온데 간데 없고 자신만 홀로 남은 상태를 말한다.
結局 소(마음)은 本性, 본래마음을 찾기 위한 方便이었고, 이제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그 方便이었던 소(마음)은 잊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 행복의 나라에 도착했으면
타고 강을 건넌 뗏목(소, 마음, 방편)은 다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신부님 : 일곱 번 째. 소를 타고 집에 갔더니 소가 없어졌요.
소(마음)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소(마음) 이 건 하나의 방편이었어.
무슨 方便? 하느님의 집(천국)에 들어가는 하나의 방법이었어요. 소는 본래 없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내 기도나, 내 수행이나, 내 의지만으로는 하느님 아버지 집에 못 들어 가요.
못 들어가 안 돼! 어떤 도구가 있어야 돼. 방편이 있어야 돼.
그 방편, 그 도구 그게 뭐야? 십자가! 십자가입니다.
즉 불청객(갈등, 고통 등등)이 찾아 와야만, 그것 때문에 하느님 집에 들어갈 수 있어요.
일단, 주, 하느님 아버지 집에 들어가면 십자가는 필요가 없는 거예요.
‘아! 이 십자가, 방편이 나를 하느님 집으로 인도 했구나.’ 라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8. 인우구망(人牛俱忘)
소(마음)도 자신도 모두 잊어버린 상태를 圓相(동그라미 모양)으로 그리고 있다.
客觀이었던 소(마음)를 잊었으면 主觀인 동자 자신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주관과 객관이 分離되기 以前의 본래마음의 상태, 本性의 상태를 象徵한다.
이와 같은 의식 수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일컫는다.
신부님 : 여덟 번째는 나도 없어요. 내가 완전히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내가 소금이라면 물에 다 녹아서 소금물 하나가 되어 버리듯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것을 깨달은 거예요. 緣起 또는 空의 성품을 깨달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因緣에 의해서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없어지는 거예요. 없는 거요.
여러분들도 어머니 아버지가 만나기 前에 여러분들은 어디 있었어요?
없었어요.
우리가 죽으면 내 몸에서 바람이 빠져나갑니다. 물도 빠져나가요.
온기도 다 빠져나가고, 내 몸이 흙이 되고 거름이 되어 풀도 되고 나무도 되요.
그럼 내가 돌아가서 의지할 곳이 어디냐?
물질적으로 보면 내가 돌아가서 바람도 되고,
물도 되고, 흙도 되고, 나무도 되고, 풀도 되요.
9. 반본환원(返本還源)
주관과 객관의 분별 구별이 없는, 즉 있는 그대로 비치는 自然의 모습을 표현한다.
'산은 산, 물은 물' 自然 그대로의 모습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경지이다.
신부님 : 아홉 번 째. 이것은 나도 없는 겁니다.
나무도 불타면 없어지잖아요. 돌도 닳으면 없어지고...
이 사실을 깨달으면 어떻게 되느냐? 事物의 眞面目, 본래면목, 본바탕을 보게 돼요.
내가 돌아가서 의지할 것이 바람이죠, 물이죠, 땅이죠, 풀이죠, 나무죠.
알고 보니 ‘이 宇宙 自然은 내 몸과 하나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요.
그리고 이 우주는... 자연은... 내 집과 같다. 내 몸과 같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요.
10. 입전수수(入廛垂手)
중생 교화를 위하여 석장을 짚고 다시 세상 속으로 나서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중생 제도에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신부님 : 반본환원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세상 속 저잣거리로 나가요. 술집에도 가고, 고기집에도 가서
욕심 부리는 사람, 성질 부리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 있으면 가르쳐 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피정의 집에 와서 강론도 듣고, 절에 와서 설법도 들었으니,(웃음)
집에 갔을 때, 누군가가 십자가인 똥 오줌 싸는 시어머니 때문에
화 내고, 불평하고, 원망하면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의지나 기도만으로는 결코 하느님 아버지 집에 못 들어갑니다.
그것(십자가, 고통 괴로움, 똥 오줌 싸는 시어머니)가 와야만 그것을 도우며 그것을 방편 삼아서
하느님 아버지 집에 들어가게 돼서 하느님과 만나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일러 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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