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퍼붓는 엄동설한 눈밭을 헤치며 광한루로 간 어사 성이성이 그곳에서 밤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그곳에서 만난 늙은 기녀에게 했던 이야기는 과연 어떤 내용이었을까?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번지 계서당(溪西堂). 춘향전의 주인공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ㆍ1595∼1664)이 광해군 5년(1613) 소나무 숲 우거진 동산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 잡아 지은 집이다.
이 곳에서는 한국 고대 최고의 러브스토리 춘향전의 로맨스를 남긴 성이성(이몽룡)을 만나볼 수 있다.
계서당 돌과 나무의 결에 내밀하게 농축시켜 놓은 숨소리를 들으며, 춘향전의 연인들이 피워낸 전설의 꽃 한 송이를 마음으로 그려본다.
◆ 성이성(成以性)과 이몽룡(李夢龍)
성이성은 광해군 때 남원부사를 지낸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ㆍ1561~1629)의 셋째 아들이다.
창녕 사람인 성안의는 남원에서 4년을 선치하며 이름을 높였고 광한루 옆에는 그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성이성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1616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지만 광해군 시기의 혼란과 아버지의 명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인조 5년(1627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고서야 녹봉을 받기 시작했다.
주로 언관직을 거치면서 곧은 말과 품행으로 오히려 주위의 견제를 받곤 하여 높은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진주부사 등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네 차례나 어사(御使)에 중용될 만큼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선비 성이성이 최근 조명을 받는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한국 최고의 로맨스이자 고전소설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의 실존 모델이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성이성의 4대손 성섭(成涉)이 엮은 ‘교와문고’에 춘향전의 어사출도 장면과 흡사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점 등을 고증함으로써 실존인물인 성이성의 행적에 부쩍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최근 계서당을 찾는 탐방객들의 발길이 잦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오랫동안 춘향전 연구에 몰두해 오면서, 춘향전에 역사적 실체가 숨어있으리란 가정 아래 이를 밝히는데 끈질긴 집념을 보인 국문학자 설성경 교수의 추적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가정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자료로 성이성 본인의 일기 따위를 후손이 편집해낸 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稿)와 성섭의 필원산어(筆苑散語)를 손에 넣고서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사료는 물론 민간에서 구전된 설화와도 면밀히 대조·분석해 이몽룡의 모델은 성이성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춘향전의 주인공은 지금껏 성춘향과 이몽룡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에 근거한다면 ‘李도령’은 이제 ‘成도령’으로 바꿔 불러야 할 것이고 자연스레 ‘成춘향’도 ‘李춘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찌하여 성씨 성을 춘향에게 붙여 주었던 것일까. 성이성의 내력에 대해서 공개를 거부하고 숨기기만 하던 성씨 문중이 근년에서야 이몽룡이 성이성을 모델로 했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 후손들이 기생과 사랑 놀음에 빠진 조상을 부끄럽게 여겨 공개를 막았음을 실토하였다.
◆ 암행어사 출두
성이성은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머무르는 동안 기생을 사귀었고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지역을 순행하다가 남원을 찾았다.
성이성은 다시 옛 연인을 만나려 했지만 그녀는 죽고 없었다.
‘십이월 초하루 아침 눈을 부릅뜨고 남원으로 들어갔다.
오후에는 눈바람이 크게 일어 지척이 분간되지 않았지만 마침내 광한루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늙은 기녀인 여진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소동과 서리들과 더불어 광한루에 나와 앉았다.
흰 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도다.
거푸 소년시절 일을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구절은 성이성 자신의 암행어사 활동 행적을 기록한 ‘호남암행록’의 한 대목이다.
실제인물 성이성의 행적과 춘향전 주인공 이몽룡과의 밀접한 관계는 춘향전의 하이라이트라 할 ‘암행어사 출두 장면’이 그대로 유입된 필원산어의 한 대목에 의해 더 구체적으로 뒷받침된다.
성섭은 필원산어에서 자신의 고조 성이성이 남원 땅에서 행한 '암행어사 출두사건'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해 놓았다.
‘독에 든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소반 위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진다.
’ 전후 사정의 기술은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장면 그대로다.
특히 성이성의 한시 구절은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지어보인 칠언절구와 정확히 일치한다.
암행어사 출두장면은 그것이 판소리 계열의 춘향가든, 소설의 춘향전이든 ‘金樽美酒千人血’로 시작되는 시구는 예외 없이 실려 있다.
이쯤 되면 기왕의 춘향전은 형성요소의 절반이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테면 춘향전은 ‘팩션’의 효시인 셈이다.
설성경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춘향전은 성이성 등 실존인물의 역사적 사실을 절반으로 하고 각종 고사·설화 등 허구를 절반으로 하여, 한 유능한 작가의 창작에 의해 최초의 텍스트가 성립된 이후 각양·각층의 민중 참여(첨삭)를 통해 오늘날의 춘향전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1999년 12월4일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 스토리텔링
특히 ‘늙은 기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밤잠을 설쳐가며 소년시절을 회상했다’는 성이성의 진술로 미뤄보면 비록 성이성이 직접 옛 연인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앞뒤 정황상 틀림없이 옛 사랑(혹은 춘향)을 그리워한 대목이라고 판단되며, 그 여인은 기생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중에서도 관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즉 옛 연인이 성이성과의 이별 뒤 연정과 절개를 지키려다가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의 신분과 관기사회의 규제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이성이 기녀인 옛 연인의 죽음을 언제 알게 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어쩌면 그가 계서당에서 지내던 내내 그녀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채 측면에 독특하게 마련된 간이 소변기에서 오줌을 누면서도 그녀(춘향)를 생각했겠고, 남원 쪽을 향해 45도쯤 굽은 소나무(수령 약5백년 된 일명 이몽룡 소나무)를 보면서도 그녀를 떠올렸겠다.
누구든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한 자락, 남모를 그리움을 담고 살아가지 않은 이 어디있으랴. 그것이 비록 슬픔일지라도 달맞이꽃 같은 추억 하나 쯤은 남겨놓는 법인데 춘향전은 그러한 감성을 자극하여 완벽하게 재구성된 소설이라 하겠다.
우리의 현실에서도 ‘스토리텔링’이라는 문학용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고 널리 응용되면서 어느새 시대적 화두가 되어가고 있다.
기왕의 이야기에 이야기의 의미를 덧씌워 가치와 이해를 높이고 나아가 소통을 넓히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물론 문화재를 활용한 관광마케팅 등 문화콘텐츠 산업에도 폭넓게 적용되는 개념이다.
우리지역은 어느 곳보다 풍부한 이야기와 전통, 우수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어 창조적 스토리텔링의 보고라 할만하다.
하지만 이를 적극 발굴 개발하여 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은 좀 떨어지는 것 같다.
적어도 국가중요민속자료 제171호 계서당에 관한한 너무나 많은 아쉬움이 있다.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에게 부가가치를 높이는 스토리 제공은 커녕 ‘춘향전’과 ‘成어사’ ‘청백리’‘권선징악’ ‘암행어사 출두’등과 관련한 한 귀퉁이나마 제대로 환기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고택 외벽에 고작 낡은 현수막 두장 펄럭이는 것 말고는 정말 아무 것도 없다.
한때 ‘이몽룡 테마타운 조성’운운하며 야심찬 포부를 내세우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성이성의 묘소가 있는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뒷산까지는 가보지 못했지만, 고택에 살면서 종가를 지키는 선생의 13대 후손 성기호씨 내외의 협조를 얻어 계서당 우측 사당에 모셔져 있는 선생의 신위를 접견할 수 있었다.
그 신위 앞에 손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선생께서 제공한 모티브로 인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국문소설 춘향전과 판소리 춘향가가 탄생될 수 있었음에 감사드렸다.
이어서 이곳 계서당을 찾는 탐방객들에게 춘향전의 역사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부속 건물로 작은 기념관 하나 마련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리하여 소박하게나마 ‘암행어사 축제’라도 열리는 날 다시 찾을 것을 약속하고 계서당 초입의 황소와 눈 맞추며 한쪽 눈을 깜박였다.
권순진 시인·칼럼니스트
계서당
계서당이 국가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데는 오로지 경북 북부지방의 전통적 민가인 'ㅁ'자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주택발달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이 집의 사랑채는 후에 개축된 것으로 추측되나, 아래쪽 마당 끝에 대문간채를 두고 그 위쪽 높은 곳에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로 연결된 ‘ㅁ’자형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또한 계서당은 풍수지리상으로 목마른 소가 물을 마시기 위해 내려오는 지세에 들어선 집이라 집터로는 명당 중에 명당이라고 한다.
실제로 계서당 안채에서 서쪽 뒷산
을 보면 소머리를 닮은 산세가 등, 허리, 엉덩이로 해서 계서당 뒤편으로 이어져 있고, 소의 젖에 해당하는 부위에 계서당의 안채가 들어앉아 있다.
그리고 계서당 서편에서부터 시냇물이 흘러 목마른 소가 물을 마시는 명당의 지세를 충분히 납득시키고 있다.
게다가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계서당 초입에는 우사가 하나 있는데, 옆집에서 키우는 누렁소 두어 마리가 맨 먼저 탐방객을 맞아 멀뚱멀뚱 눈망울을 굴리고 있다.
사람들은 문화재와 황소의 생뚱맞은 조합에 의아해 하면서
도 친근감을 느끼기도 한다.
무릇 옛집이란 그 집이 살아온 풍상만큼의 역사와 사연들을 집안 곳곳에 숨겨놓기 마련이다.
세월을 견디면서 기둥이 비틀렸고, 기둥에 박힌 옹이 또한 함께 형상을 비틀었을 것이다.
기둥 방주에 놓인 자연석이 힘껏 올려 받히는 수직항력의 흔적도 볼 수 있다.
국가 중요민속자료
문화재는 지정주체가 어디냐에 따라 국가지정문화재와 시도지정문화재로 나뉘고, 국가지정문화재는 국보, 보물, 중요무형문화재,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중요민속자료 등 7개 유형으로 구분된다.
이는 문화재의 가치등급 기준이 아니라 문화재의 존재 양식이나 형태에 의한 분류라고 해야 옳겠다.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위치한 계서당은 일찌감치 안동 하회마을(122호)등과 같은 날짜인 1984년 1월 ‘국가중요민속자료 171호’로 지정되어, 같은 중요민속자료이지만 지정시기로는 양동마을(1984년 12월 189호)이나 한개마을(2007년 12월 255호)보다도 앞선다.
지난해 9월 268호로 지정된 ‘안동 번남댁’까지 주로 한국의 전통적 생활양식이나 민속적 풍경이 잘 보존된 곳이거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전통가옥 등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전체 268호 가운데 경상북도가 서울을 포함한 다른 어느 지역보다 월등히 많은 75점의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를 보유(28%)하여 문화유산 보고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최근 ‘민속자료’라는 어휘가 주는 다소 가벼운듯한 느낌과 의미의 한계 때문에 명칭을 ‘민속문화재’로 개칭하기도 했는데, ‘민속자료’라고 해서 저렴하게 여길 문화재는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