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은 백두산에서 부터 시작된 산줄기가 낙동정맥에서 내륙으로 흘러내려 대구경북을 향해 마지막 힘을 모아 솟은 산이다.
그 만큼 기운이 강해선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이 산에서 기도해서 삼국을 통일했다고 기록해 놓았고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이 산을 불의 산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팔공산에서 가장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옛사람들은 소년대(현재 국립지리원발행 지도의 지명은 인봉)를 즐겨 손꼽았고 그 중에서도 소년대 바위 위에 용트림하고 있는 늙지않는 소나무로 여겼다.
팔공산 북지장사의 북서쪽 첫 바위산봉우리가 바로 이곳이며 그 봉우리 위에는 지금도 높이 2m 남짓한 나이를 알 수 없는 소나무가 바위 속 깊이 뿌리박고 있다.
소년대는 팔공산 주능선의 891m 봉우리(지도상 지명으로는 노적봉)에서 뻗어 내린 능선 위에 큼지막하게 솟아있는 바위덩이다.
579m에 불과한 그리 높지않은 봉우리지만 수억년을 팔공산의 정기와 기상을 듬뿍 받고 있다.
그 위에 고색창연한 소나무 한 그루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고 할까? 이 바위 봉우리는 남동쪽 북지장사 방향에선 높이가 2층 남짓이고 서쪽 동화사 방향에선 대략 4~5층 건물 높이다.
이 소년대의 꼭대기는 사람 수십 명이 올라서도 될 정도로 넓고 평평한 데 소나무가 홀로 서 있다.
이 소나무는 갈라진 바위 틈새에 깊이 뿌리를 내려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굵은 가지는 둘레가 60㎝, 가는 가지는 둘레가 50㎝로 마치 팔공산이 오랜 세월 정성을 다해 다듬은 분재(盆栽)처럼 고고하고 단아하다.
선인들의 기록 가운데 270여년전,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ㆍ1711~1781)은 1748년(영조 24년)에 팔공산을 유람하고 남긴 남유록(南遊錄)에서 이곳을 감명깊게 묘사했다.
‘몇리를 들어가니 소년대(少年臺)라는 곳이 있었다.
큰 바위에 올라서니 시내가 굽어보이고, 그 위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고색창연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入數里得所謂少年臺者巨石臨溪而有松生其上枯其一半蒼古可愛》’고 했다.
이밖에도 이계(尼溪) 박내오(朴來吾ㆍ1713~1785년)와 열암(悅菴) 하시찬(夏時贊ㆍ1750∼1828)이 남긴 ‘소년대’ 시에도 북지장사 북서쪽 능선에 우뚝 솟아있는 579m의 바위봉우리를 상찬했다.
소년대 위의 이 소나무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상정이 270년전에 이미 이 나무를 고색창연하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公山奇蹟石臺留 / 공산의 기이한 자취 석대가 남아
劫雨藍風閱幾秋 / 비바람을 겪으면서 몇 년이나 지났던가.
仙子植松松己老 / 신선이 소나무를 심었는데 이미 늙었고
佳名惟屬少年遊 / 아름다운 이름만 소년의 노닒에 붙였네.
-하시찬 ‘소년대’
하시찬은 신선이 소나무를 심었는데 이미 늙었다’고 은유적으로 이 소나무가 아주 오래된 것임을 표현했다.
이뿐아니라 늙지않는 불로의 소나무란 뜻으로 신선이 심은 나무라 했으니 신선송이라 해도 나무랄 수 없을 것이다.
그 만큼 기운이 강해선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이 산에서 기도해서 삼국을 통일했다고 기록해 놓았고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이 산을 불의 산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팔공산에서 가장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옛사람들은 소년대(현재 국립지리원발행 지도의 지명은 인봉)를 즐겨 손꼽았고 그 중에서도 소년대 바위 위에 용트림하고 있는 늙지않는 소나무로 여겼다.
팔공산 북지장사의 북서쪽 첫 바위산봉우리가 바로 이곳이며 그 봉우리 위에는 지금도 높이 2m 남짓한 나이를 알 수 없는 소나무가 바위 속 깊이 뿌리박고 있다.
소년대는 팔공산 주능선의 891m 봉우리(지도상 지명으로는 노적봉)에서 뻗어 내린 능선 위에 큼지막하게 솟아있는 바위덩이다.
579m에 불과한 그리 높지않은 봉우리지만 수억년을 팔공산의 정기와 기상을 듬뿍 받고 있다.
그 위에 고색창연한 소나무 한 그루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고 할까? 이 바위 봉우리는 남동쪽 북지장사 방향에선 높이가 2층 남짓이고 서쪽 동화사 방향에선 대략 4~5층 건물 높이다.
이 소년대의 꼭대기는 사람 수십 명이 올라서도 될 정도로 넓고 평평한 데 소나무가 홀로 서 있다.
이 소나무는 갈라진 바위 틈새에 깊이 뿌리를 내려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굵은 가지는 둘레가 60㎝, 가는 가지는 둘레가 50㎝로 마치 팔공산이 오랜 세월 정성을 다해 다듬은 분재(盆栽)처럼 고고하고 단아하다.
선인들의 기록 가운데 270여년전,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ㆍ1711~1781)은 1748년(영조 24년)에 팔공산을 유람하고 남긴 남유록(南遊錄)에서 이곳을 감명깊게 묘사했다.
‘몇리를 들어가니 소년대(少年臺)라는 곳이 있었다.
큰 바위에 올라서니 시내가 굽어보이고, 그 위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고색창연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入數里得所謂少年臺者巨石臨溪而有松生其上枯其一半蒼古可愛》’고 했다.
이밖에도 이계(尼溪) 박내오(朴來吾ㆍ1713~1785년)와 열암(悅菴) 하시찬(夏時贊ㆍ1750∼1828)이 남긴 ‘소년대’ 시에도 북지장사 북서쪽 능선에 우뚝 솟아있는 579m의 바위봉우리를 상찬했다.
소년대 위의 이 소나무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상정이 270년전에 이미 이 나무를 고색창연하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公山奇蹟石臺留 / 공산의 기이한 자취 석대가 남아
劫雨藍風閱幾秋 / 비바람을 겪으면서 몇 년이나 지났던가.
仙子植松松己老 / 신선이 소나무를 심었는데 이미 늙었고
佳名惟屬少年遊 / 아름다운 이름만 소년의 노닒에 붙였네.
-하시찬 ‘소년대’
하시찬은 신선이 소나무를 심었는데 이미 늙었다’고 은유적으로 이 소나무가 아주 오래된 것임을 표현했다.
이뿐아니라 늙지않는 불로의 소나무란 뜻으로 신선이 심은 나무라 했으니 신선송이라 해도 나무랄 수 없을 것이다.
북서쪽을 쳐다보면 팔공산 정상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에서부터 비로봉, 천왕봉, 동봉, 삼성봉 순으로 늘어서 있다.
소년대에 올라서면 팔공산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 관봉과 환성산이 보이고, 남쪽으로 대암봉과 용암산, 그리고 문암산과 응봉이 이어진다.
서쪽으로 도덕산과 거저산이 보이고, 그리고 북서쪽에 팔공산 정상부의 4개 봉우리가 우뚝하게 서있어 팔공산의 정기와 기상이 자연스럽게 소년대로 모이는 형국이다.
소년대 신선송을 가는 길은 지금도 옛사람 묘사에 못지않게 그윽하고 감동적이다.
솔숲입구에서 북지장사에 이르는 약 1.5㎞ 구간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삼림욕을 하기에는 팔공산에서 으뜸이다.
울창한 솔숲과 바닥에 깔린 깔비(솔가리)에서 풍기는 향긋한 솔향기 길도 좋지만 시냇물소리를 따라 북지장사에 이르는 맛깔 나는 물소리길도 더할 나위없다.
향기와 소리에 취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북지장사 산문에 다다른다.
동쪽에서부터 비로봉, 천왕봉, 동봉, 삼성봉 순으로 늘어서 있다.
소년대에 올라서면 팔공산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 관봉과 환성산이 보이고, 남쪽으로 대암봉과 용암산, 그리고 문암산과 응봉이 이어진다.
서쪽으로 도덕산과 거저산이 보이고, 그리고 북서쪽에 팔공산 정상부의 4개 봉우리가 우뚝하게 서있어 팔공산의 정기와 기상이 자연스럽게 소년대로 모이는 형국이다.
소년대 신선송을 가는 길은 지금도 옛사람 묘사에 못지않게 그윽하고 감동적이다.
솔숲입구에서 북지장사에 이르는 약 1.5㎞ 구간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삼림욕을 하기에는 팔공산에서 으뜸이다.
울창한 솔숲과 바닥에 깔린 깔비(솔가리)에서 풍기는 향긋한 솔향기 길도 좋지만 시냇물소리를 따라 북지장사에 이르는 맛깔 나는 물소리길도 더할 나위없다.
향기와 소리에 취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북지장사 산문에 다다른다.
북지장사는 팔공산에서 동화사와 더불어 삼국유사에 ‘공산 지장사’로 기록되어 있을 만큼 신라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북지장사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전형인 쌍탑 가람으로 현재 삼층석탑 2기가 남아있다.
동화사 금당암의 삼층석탑 2기보다 크기가 작고 모양이 간략한 것으로 보아 동화사보다 늦게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지장전은 1칸, 옆면 2칸 규모이나 앞면 1칸에 사각형 사이기둥을 양쪽에 세워 마치 3칸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 특이한 구조이다.
현재 지장전 편액이 걸려있으나 전각 안에는 아미타삼존불좌상과 대웅전 뒤 땅속에서 발견된 석조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삼국유사 천룡사 고려 정종6년(1040년)기록 중에 ‘공산 지장사는 납입된 전지가 200결’이라는 기사로 보아 그 무렵에는 사세가 매우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지장사는 수성현에 있다’는 현재의 남지장사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서사원의 낙재일기(樂齋日記) 1592년 7월 11일자에는 ‘적이 지장동(地藏洞)에 들어와서 동남의 재사와 지장사를 분탕(焚蕩)하였다’는 기록이 실려있다.
이 두 기록으로 볼 때 임진왜란 이전에는 팔공산 북지장사와 가창의 남지장사는 같이 지장사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두 곳의 지장사는 임진왜란 중에 왜적에 의해 모두 불타버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 복원된다.
인악당(仁嶽堂) 의첨(義沾ㆍ1693∼1764)이 영조 7년(1731년)에 지은 ‘남지장사전우소화중수기(南地藏寺殿宇塑畵重修記)’에는 팔공산 지장사는 북지장사로, 가창의 지장사는 남지장사로 나와 있어 임란이후부터 두 지장사의 이름을 구분했던 것 같다.
이 사실은 영지요선(嶺誌要選)에 ‘남지장사는 지금 폐하였고, 북지장사는 팔공산에 있다’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북지장사 주차장에 이르러 서쪽 능선으로 나있는 등산로를 따라 잠시 오르면 커다란 바위가 눈앞에 우뚝하게 서서 반긴다.
7월 한여름, 내려쬐는 햇볕에 소년대는 용광로처럼 달아오른다.
바짝 달아오른 소년대 위에 올라서자마자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진다.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바위틈새에 뿌리를 내린 신선송이 삼매에 든 수도승같이 굳게 입을 다문채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지키고 있다.
소년대 소나무의 늠름한 자태는 탈속한 도인인가하면 고결한 선비의 기상을 닮았다.
소년대란 명칭은 많은 선인들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지만 현재 사용되고 있는 지도에서의 명칭과 지역민들이 부르는 명칭이 각기 달라 고증을 통한 질정이 있어야 후대에도 혼란이 없을 것이다.
1918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지도에는 579m봉우리를 소년대가 아닌 노족봉(老足峰)으로 표기하였다.
이는 소년대가 ‘장로인 천왕봉을 소년이 시봉한다’는 뜻에서 소년대와 같은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노족봉(老足峰)은 ‘천왕봉인 장로(長老)’와 소년같이 손아래 사람을 뜻하는 족하(足下)’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노족봉의 유래를 이해하지 못하고 발음이 노족봉과 비슷한 낟가리를 뜻하는 노적봉(露積峰)으로 오인하면서 혼란이 시작되었다.
한국지명총람(1978년)에는 ‘노족봉→노적봉’이라 하였고 ‘노적봉은 도장골 북쪽에 있는 산. 높이 800m’라고 수록된 것이 논란을 불렀다.
589m 봉우리는 1918년부터, 2007년까지 5차례 지도에 표기되면서 1918년 노족봉(576m), 1965년 노족산, 1980년 노족봉, 1986년 노족봉으로 각각 표시했다.
반면 2007년에는 이같은 논란끝에 578m의 노족봉은 인봉(印峰)으로, 종주능선상의 891m의 인봉은 노적봉(露積峰)으로 각각 고쳐졌다.
북지장사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전형인 쌍탑 가람으로 현재 삼층석탑 2기가 남아있다.
동화사 금당암의 삼층석탑 2기보다 크기가 작고 모양이 간략한 것으로 보아 동화사보다 늦게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지장전은 1칸, 옆면 2칸 규모이나 앞면 1칸에 사각형 사이기둥을 양쪽에 세워 마치 3칸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 특이한 구조이다.
현재 지장전 편액이 걸려있으나 전각 안에는 아미타삼존불좌상과 대웅전 뒤 땅속에서 발견된 석조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삼국유사 천룡사 고려 정종6년(1040년)기록 중에 ‘공산 지장사는 납입된 전지가 200결’이라는 기사로 보아 그 무렵에는 사세가 매우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지장사는 수성현에 있다’는 현재의 남지장사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서사원의 낙재일기(樂齋日記) 1592년 7월 11일자에는 ‘적이 지장동(地藏洞)에 들어와서 동남의 재사와 지장사를 분탕(焚蕩)하였다’는 기록이 실려있다.
이 두 기록으로 볼 때 임진왜란 이전에는 팔공산 북지장사와 가창의 남지장사는 같이 지장사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두 곳의 지장사는 임진왜란 중에 왜적에 의해 모두 불타버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 복원된다.
인악당(仁嶽堂) 의첨(義沾ㆍ1693∼1764)이 영조 7년(1731년)에 지은 ‘남지장사전우소화중수기(南地藏寺殿宇塑畵重修記)’에는 팔공산 지장사는 북지장사로, 가창의 지장사는 남지장사로 나와 있어 임란이후부터 두 지장사의 이름을 구분했던 것 같다.
이 사실은 영지요선(嶺誌要選)에 ‘남지장사는 지금 폐하였고, 북지장사는 팔공산에 있다’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북지장사 주차장에 이르러 서쪽 능선으로 나있는 등산로를 따라 잠시 오르면 커다란 바위가 눈앞에 우뚝하게 서서 반긴다.
7월 한여름, 내려쬐는 햇볕에 소년대는 용광로처럼 달아오른다.
바짝 달아오른 소년대 위에 올라서자마자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진다.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바위틈새에 뿌리를 내린 신선송이 삼매에 든 수도승같이 굳게 입을 다문채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지키고 있다.
소년대 소나무의 늠름한 자태는 탈속한 도인인가하면 고결한 선비의 기상을 닮았다.
소년대란 명칭은 많은 선인들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지만 현재 사용되고 있는 지도에서의 명칭과 지역민들이 부르는 명칭이 각기 달라 고증을 통한 질정이 있어야 후대에도 혼란이 없을 것이다.
1918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지도에는 579m봉우리를 소년대가 아닌 노족봉(老足峰)으로 표기하였다.
이는 소년대가 ‘장로인 천왕봉을 소년이 시봉한다’는 뜻에서 소년대와 같은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노족봉(老足峰)은 ‘천왕봉인 장로(長老)’와 소년같이 손아래 사람을 뜻하는 족하(足下)’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노족봉의 유래를 이해하지 못하고 발음이 노족봉과 비슷한 낟가리를 뜻하는 노적봉(露積峰)으로 오인하면서 혼란이 시작되었다.
한국지명총람(1978년)에는 ‘노족봉→노적봉’이라 하였고 ‘노적봉은 도장골 북쪽에 있는 산. 높이 800m’라고 수록된 것이 논란을 불렀다.
589m 봉우리는 1918년부터, 2007년까지 5차례 지도에 표기되면서 1918년 노족봉(576m), 1965년 노족산, 1980년 노족봉, 1986년 노족봉으로 각각 표시했다.
반면 2007년에는 이같은 논란끝에 578m의 노족봉은 인봉(印峰)으로, 종주능선상의 891m의 인봉은 노적봉(露積峰)으로 각각 고쳐졌다.
그러나 비교적 근대의 기록으로는 눌헌(訥軒) 채무식(蔡武植ㆍ1868~1926)이 1910년 한일합방이후 팔공산 도장동(道藏洞)에 은거한 장와(藏窩) 최성규(崔性奎ㆍ1874~1924)를 찾아와서 지은 ‘천장인봉(千丈印峰)’이란 시구에 이들 봉우리 이름이 뚜렷이 나온다.
도장동 마을 안에서 보면 종주능선상의 891m 봉우리는 ‘천장인봉(千丈印峰)’이란 시구에 걸맞게 우뚝하게 솟아있으나, 579m 봉우리는 891m 봉우리에서 내려 온 능선에서 약간 도드라져 있다.
현재의 지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1918년 지도에서 주능선에 있는 891m 봉우리를 왜 인봉(印峰)이라 표기했을까?
팔공산 정상부에 있는 제1봉 천왕봉(1192m), 제2봉 비로봉(1176m), 제3봉 동봉(1167m), 제4봉 삼성봉(1150m)이 자리한 팔공산 정상부의 4개 봉우리를 모두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인봉은 도장처럼 생긴 바위가 아니라 팔공산 정상부가 마치 도장을 찍은 것처럼 한눈에 들어온다는 뜻이 아닐까.
인봉은 도장처럼 생긴 바위가 아니라 팔공산 정상부가 마치 도장을 찍은 것처럼 한눈에 들어온다는 뜻이 아닐까.
우리나라 여러 곳에 보호수로 지정된 소나무가 많지만 소년대 소나무처럼 문헌에 기록이 남아있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팔공산이 오래도록 정성을 다해 다듬어 키웠고 오랜 세월 선비들의 남다른 사랑과 흠앙을 받았으니 특별한 이름을 지어 팔공산의 기개를 상징하는 소나무로 지정하는 방법도 바람직할 것 같다.
글=홍종흠 팔공산 문화포럼고문
조명래 팔공산문화포럼 학술이사
사진=강위원 사진가
조명래 팔공산문화포럼 학술이사
사진=강위원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