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영남불교문화연구원 삼국유사 유적답사 자료
산을 즐겨 찾으시는 친구들과 옛것을 좋아하시는 분들을 위해, 영남불교문화연구원에서 실시하는 삼국유사 유적답사 행사의 답사지 안내문을 싣습니다. 취미생활에 많은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팔공산의 역사와 그 유적
1. 팔공산의 지세와 유래
삼국유사에는 팔공산을 지칭하는 기록이 7번(공산 4, 중악 2, 부악 1) 나온다. 백두산이 2번 기록되어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무척 많은 숫자다. 사서에 등장하는 횟수와 역사의 중요성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신라시대 팔공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팔공산은 덩치가 크고 높이가 높아서가 아니라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교통상, 군사상 핵심적이고 산의 품격이 출중하고 지세가 장엄 수려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민족의 영산으로 추앙 받았던 것 같다. 신경준의 {山經表}를 살펴보면, 한반도의 등뼈에 해당되는 백두대간이 백두산에서 시작해서 고산준령을 이루면서 남으로 내려와 태백산을 세운 후 서남쪽으로 크게 방향을 바꾸면서 지리산으로 뻗어 나간다. 백두대간이 돌아 나간 자리를 백병산, 통고산, 백암산 등이 이으면서 낙동정맥을 형성하고 있다. 낙동정맥의 보현산 어간에서 생성된 한 가닥의 큰 힘이 서남으로 달려와 화산을 일으키고 다시 건너 뛰어 솟아 오른 것이 팔공산인 것을 알 수 있다. {산경표}의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대동여지도}에는 팔공산이 안정된 위치에서 웅혼한 기풍을 간직하고 있음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태백산에서 소백산, 속리산, 추풍령을 거쳐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북에서 서남으로 병풍처럼 둘러싸고 동쪽으로는 주왕산, 가지산, 영취산이 일궈내는 낙동정맥이, 남쪽으로는 낙남정맥의 여항산, 신어산 등이 호위하고 있다. 풍수지리설에서는 생기는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모인다고 한다. 머나먼 백두산에서부터 뻗어 내려온 팔공의 지맥은 서로는 낙동강에, 동남으로는 금호강에 몸을 담그면서 그 흐름을 끝내는 山盡水廻處다. 팔공산이 만들어 내는 명당은 鳳凰歸巢形의 길지다. 비상하던 봉이 큰 날개를 접으면서 둥지로 내려앉으려는 형국이다. 동화사는 봉황귀소형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 동화사를 품고 있는 비로봉은 봉황의 몸통이 되고 동봉, 수봉, 인봉, 노적봉, 관봉은 왼쪽 날개, 서봉, 톱날바위, 파계봉, 가산은 오른쪽 날개에 해당한다. 봉은 오동나무에 둥지를 틀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산다. 桐華寺라는 이름에는 봉이 주택난을 겪지 않고 오래도록 머물 것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고, 팔공산에 유별나게 대나무가 많은 것은 봉에게 먹을거리를 공급하기 위한 풍수염승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동화사의 창건설화에는 한겨울에 오동꽃이 상서롭게 피어 동화사라 했다고 되어 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럴 듯한 발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라시대에는 桐藪, 또는 桐寺라 했고 동화사라 한 것은 고려 때의 일인 것 같다. 시대는 달라도 절 이름에 오동나무를 뜻하는 桐자가 떠나지 않은 것은 오동꽃이 피어서라기 보다 팔공산의 지세 때문일 것이다. 동화사에는 봉과 관련된 것이 무척 많다. 일주문의 이름은 봉황문, 강당은 봉서루, 대웅전 안의 닫집은 봉황으로 장엄되어 있다. 더욱 두드러진 것은 인악대사의 비석이다. 비신이 거북 등위에 있지 않고 봉이 짊어지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형태의 비석이다. 이런 것은 모두 봉이 떠나지 말고 영원히 서식해 줄 것을 기원하는 풍수비보다. 신라시대에는 팔공산을 中岳, 父岳, 公山이라 불렀다. 중악이란 오악 중에서 중앙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오악은 봄, 가을에 조정에서 中祀를 지내는 국가의 성지다. 오악을 지정해서 제사를 올리는 것은 단순히 국토를 진호하고 국운을 융성케 하려는 의도 때문만이 아니라 외적의 침입을 격퇴시켜 국가를 수호하려는 군사적 목적과 지방세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목적과 부처님의 힘을 빌어 민중의 아픔을 달래고 이탈을 막으려는 종교적 목적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팔공산은 신라인에게 있어서는 군사적 요새지며 정치적 거점지역이며 종교적 성지였던 것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에는 공산으로 기재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비로소 팔공산으로 부르기도 한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공산이 팔공산으로 불리게 된 연유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달성군지}의 기록으로 927년 가을 경주를 침공한 후백제 군과 신라를 구원하러 온 고려군과의 공산전투 때 신숭겸, 김락 등 고려의 8 장수가 전사했으므로 '팔'자가 붙었다는 것이다. 이 설은 믿기 어렵다. 사서에는 8 장수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없고 또 달성군지는 일제강점기 때 나온 책이다. 둘째는 여덟 고을에 걸쳐져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역사적으로 팔공산은 8 고을에 걸쳐 있은 적이 없기 때문에 신빙성에 한계가 있다. 셋째는 八簡子 봉안설이다. 동화사의 창건주 심지가 법주사의 영심으로부터 받아온 189 간자 중에 미륵보살의 손가락뼈로 만든 제 8간자인 新熏成佛種子가 동화사에 봉안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넷째는 중국의 팔공산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이다. 이 산에서 전진의 군사가 동진의 군사에게 크게 패한 것이 마치 고려가 후백제에게 패한 공산전투와 양상이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원효대사의 8 제자 해탈설이다. 원효의 1000명 제자 중 마지막 8 명이 팔공산 남북쪽에서 동시에 도를 깨쳤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Ⅱ팔공산의 역사
팔공산 주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잘 알 수 없다. 최근까지만 해도 발견된 청동기 유적들을 근거로 해서 청동기 후반기인 기원전 4세기 이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믿어 왔으나 1998년 서변동 유적지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발굴되어 신석기시대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삼국이 정립되기 전 이곳에 소왕국이 존재했음은 분명한데 기록의 미비로 그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팔공산이 오악 중 중악으로 지정되어 국가를 지탱하는 거점지역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곳으로 천도 계획이 세워지기도 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9년조) 839년에는 민애왕이 죽음을 당하는 처절한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사리호에는 이 때 흉거한 민애대왕의 명복을 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보다 약간 이른 시기에 동화사가 창건된 것 같다. 동화사사적비에는 신라 소지왕 15년(493)에 극달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심지대사의 창건으로 보고 있다. 후삼국 쟁패기 때는 팔공산이 차지하고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사활을 건 전투가 벌어졌으니, 927년의 공산전투다. 이 전투에서 왕건이 처참한 패배를 했지만, 왕건과 관련된 지명과 설화들은 지금도 무수히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인 1202년(신종 5)에는 무신정권에 항거한 민란이 팔공산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부인사와 동화사의 승군들이 주동이 되어 운문사의 승군과 경주 별초군과 연합해서 영주성(영천)을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듬해인 1203년 9월에는 부인사의 승군들이 부석사의 승군들과 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이 무신정권을 자극시켜 부인사에 보관 중이던 부인사 소장 대장경판(보통 초조대장경이라 함)이 불탔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부인사의 대장경이 소실된 것은 1232년(고종 19)이다. 이해는 몽고군의 2차 침입 때로, 몽고군은 처인부곡(용인)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부인사의 대장경이 불탄 것이 몽고군의 소행이라는 데는 의문이 없지 않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5월 21일 대구읍성이 점령되자 대구부사 윤현은 軍民 2000명을 인솔하여 공산성에 입보하였다. 당시 대구는 왜군의 주력부대가 통과한 지점이면서 후방보급기지여서 많은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때문에 의병 창의가 매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 7월에는 徐思遠, 鄭師哲 등이 公山會盟을 맺고 의병활동을 벌였다. 실제활동은 문헌이 없어 구체적 접근이 어려우나, 왜군의 계속적인 주둔과 경비강화로 인해 간헐적인 소규모 유격전으로 적을 교란시키는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 때는 27000명의 사상자를 낸 최대의 격전지가 되어 대구를 사수하는 교두보역할을 해냈다.
Ⅲ. 팔공산의 유적
1. 동화사입구마애불(보물 제 243호)
이 불상은 螺髮의 머리에 白毫가 큼직하다. 살포시 감은 듯 내려 뜬 눈 밑으로 은은히 번져 가는 입가의 고운 미소는 모든 사람들의 소원을 다 들어줄 것 같은 정겨움으로 가득 찼다. 목에는 三道가 뚜렷하고 通肩衣에 앞가슴이 U자 형으로 크게 노출되었다. 자연스런 어깨선에서 내려온 손은 석가모니가 성도 하여 깨달은 자가 되는 순간을 상징하는 降魔觸地印을 짓고 있다. 항마촉지인을 짓는 통견의 상은 인도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중국에는 몇 사례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상당히 많다. 이는 한 쪽 어깨만 걸치는 더운 지방의 옷으로서는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인간적인 정이 배려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仰蓮과 覆蓮을 바로 연결시켜 반원으로 표시한 연화대좌 위에 結跏趺坐하지 않고 오른쪽 무릎을 비스듬히 올려 세우고 있다. 이 자세는 바로 미래에 나타나실 부처님이신 彌勒佛을 상징하는 것이다. 동화사가 금산사, 법주사와 더불어 미륵을 주존불로 모시는 법상종의 3대 사찰로 법맥을 이어 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상은 미륵불이 분명하다. 이 불상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여름 해질 녘이다. 북향이기 때문에 여름날 저녁때만 잠시 빛이 들어온다. 비로봉에 석양이 걸리면 광배는 불붙는 듯하고 부처님 얼굴은 복사꽃처럼 환하게 피어난다. 이 불상은 팔에 걸쳐서 무릎으로 내려오는 법의에 평행의 주름이 밀집되어 있는 점과 근엄하고 권위적인 표정이 사라지고 부드러우면서도 형식화가 진전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심지 대사가 동화사를 짓던 9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2.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보물 제 244호)
동화사의 內白虎가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바깥 둔덕에 비로암이 있다. 이 터는 화장골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그대로 받고 있어 객관적으로 보아 길지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거기다 동화사에서 등성이를 넘어 들어오던 正路를 버리고 거대한 지맥을 절개해 서쪽에서 불쑥 들어오도록 지세를 바꿔 놓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전통 가람구조를 외면하고 측면진입으로 바꿔놓은 것은 자연에 대한 도전이고 전통을 우습게 아는 무례의 한 본보기로 여겨진다. 관광객들의 편의만 염두에 둔 당꾹과 업적위주의 일부 세속지향형 승려들이 빚어낸 공명심의 소치라고 밖에 할 수 없겠다. 이 암자의 大寂光殿안에 보물 제 244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9세기 조성의 비로자나불상이 가지는 특징은 골고루 구비하고 있다. 정수리에 볼록 솟아있는 육계까지 나발로 되어 있고 잔잔한 계단식의 주름이 있는 通肩衣에 뚜렷한 三道, 광배와 좌대의 화려한 장식 등이 그것이다. 좁은 어깨는 약간 앞으로 굽은 듯 하면서 팔은 가슴 앞에서 智拳印을 짓고 있다. 단아하고 탈속한 듯한 모습은 무아삼매에 든 선승을 모델로 삼은 듯 한 느낌이 든다. 광배에는 두광과 신광의 선을 따라 9구의 화불이 나는 구름을 타고 앉아 있다. 일반적으로 7구로 표현되는데 특이한 양상이다. 불상과 광배에 회칠을 하고 덧칠까지 하여 원래의 인상이 바뀌고 문양의 선명도가 많이 떨어지고 있다. 이 불상 앞의 삼층석탑에서 1967년 해체수리 때 사리를 담았던 舍利壺가 발견되었다. 겉면에는 경문왕이 민애왕을 追崇하기위해 함통4(863)년에 탑을 세운다는 글이 있다. 민애왕은 왕권다툼의 희생자다. 신라 42대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836년) 왕위다툼이 벌어졌다. 왕의 조카인 김제륭이 왕의 종제인 균정을 죽이고 희강왕이 되었다(838년). 2년 뒤 제륭을 옹립했던 상대등 김명이 희강왕을 자살케 하고 등극하니 그가 민애왕이다. 이 때 청해진으로 도망갔던 균정의 아들 우징이 장보고의 군사 5000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민애왕은 이곳까지 나와 달벌평원(대구)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 민애왕이 참살 당하고(839년) 우징이 왕이 되니 45대 신무왕이다. 동화사의 창건주인 심지는 헌덕왕의 왕자로 민애왕의 종형이 된다. 이 불상도 이 탑과 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3. 동화사 염불암 마애여래좌상 및 마애보살좌 (대구 유형문화재 14호 대구 동고 도학동 35)
팔공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등산로인 동화사 서쪽 계곡에 염불암이 자리잡고 있다. 북쪽을 동봉의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동서 역시 능선이 감싸 안은 오목한 곳으로 마치 항아리 속 같은 화평과 정적이 감도는 장소다. 중심 전각인 극락전 동북쪽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다. 이 바위 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절을 짓고 이름을 염불암이라 했다는데, 요즘도 기도가 지극한 사람에게는 목탁소리를 들려준다는 영험스러운 바위다. 이 바위의 서면과 남면에 각각 한 구씩의 마애불상이 조성되어 있다. 서쪽 면의 불상은 민머리에 미간에는 백호가 없고 치켜 올라간 두 눈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 놓고 엄지와 엄지를 맞대고 양 검지를 곧추세워 엄지에 닿게 한 아미타 상품상생인을 짓고 있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는 중생이 극락정토에 이르는 단계를 상품상생(上品上生)에서 하품하생의 9가지로 나누고 있다. 미륵불(Maitreya)을 주불로 모시는 법상종에서는 신라 중대 이래로 아미타신앙이 혼합되어 미륵보살이 계시는 미륵정토(도솔천)에 태어나고자 희망하는 상생사상은 아미타 상품상생인으로 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서도 미륵신앙의 대찰로서 위상을 갖춘 동화사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남면의 보살상은 일반적으로 보살상들이 쓰는 화관이 아닌 程子冠같이 생긴 토속적인 보관을 쓰고 있다. 이러한 관은 무속에서 많이 쓰는 것으로 고령 개진의 마애불에서도 볼 수 있다. 크고 각진 얼굴에 이목구비는 작고, 코와 입이 바로 붙은 듯 가까워 만화 같은 형상으로 보인다.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연 줄기를 받치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세워 줄기를 잡고 있으며 줄기는 어깨를 지나면서 잎을 피우고 모자 옆에서 봉오리를 맺고 있다. 아미타불을 협시하는 관세음보살상이다. 이 보살상 주위에는 작은 구멍들이 여럿 있다. 여기서 매 끼니 때마다 이 절에서 식사할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왔다 한다. 어느 땐가 욕심 많은 스님이 구멍을 키우자 그때부터 쌀이 나오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동화사 사적비에는 염불암이 경순왕 2(928)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이 불상들은 그 때 새긴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조성한 것으로 보여진다.
4. 당간지주(보물254호)
당간지주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돌로 만든 시설물이다. 당간은 그 꼭대기에 당을 걸기 위한 깃대다. 당과 당간과 당간지주가 세트를 이루어야 완벽한데 지금 당은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당간은 천당간, 석탄간 합쳐서 8기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고 당간지주는 200여기가 현존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직까지 많은 수의 당간지주가 각 지역에 골고루 잔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나 고려시대에는 거의 모든 사찰들이 필수적으로 건립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나 지금은 눈여겨보는 사람들이 드물다.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불교가 쇠퇴하면서 당을 다는 의식도 함께 사라졌다는 점과 당 자체가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과 예술성이 두드러지지 않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중국불교의 영향으로 도입되었겠지만 중국보다 훨씬 더 성행했던 당간 건립은 한국불교의 특징 중의 하나라 할만하다 하겠다. 동화사 당간지주는 외부공간에서 핵심공간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우뚝하게 서있다. 현재의 자리가 원래의 위치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지만 북쪽 지주 하단부 간공부위에 절단된 흔적이 남아 있다. 중간 부분에 당간이 닿는 안쪽 부분을 제외한 3면을 한 단 낮게 다듬어 시각에 변화를 주고 있다. 바같면은 세로로 띠 장식을 하고 위로 갈수록 가늘어지다가 꼭대기에 와서는 호형으로 깎여 부드럽고 단아하게 처리되어 있다. 간공은 지면에서 20cm 쯤에 나 있는 데 지름이 17cm정도이고 북쪽 지주는 관통되어 있고 남쪽 지주는 관통되지 않고 깊이가 15cm정도로 파져 있다. 밑의 간공과 꼭대기에 시공되어 있는 간구가 당간을 고정시켜주는 장치다. 이러한 형식은 시기적으로는 통일신라 초, 중기, 지역적으로는 경주지방에 집중적으로 건립되어 있다. 이런 경향으로 추론해 본다면, 동화사 당간지주는 그 전시기에 유행했던 경주 지방의 양식을 차용해서 제작한 9세기의 작품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