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發心自警文
초심자와 초발심자경문
흔히 불교에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을 초심자라고 합니다.
그 초심이란 무엇인지요. 그리고 초발심 자경문이란 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 지으셨고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 궁금합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지묵스님(송광사)
초심자는 글자 그대로 처음 마음을 내어 입문한 사람이다.
불자는 초발심시 변정각(初發心時 便正覺), 곧 초발심 그 때가 바로 부처를 이룬 때라고
의상 스님은 법성게에서는 말한다.
원으로 말하면, 초발심은 시작의 첫 점에 해당하는데, 마지막 완성 점이 첫 점과 만나서 원을 이룬다.
그만큼 초발심의 풋풋한 시절에 있는 사람은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하다.
초발심 시절의 이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모두가 성공한다고 옛사람은 말한다.
초발심 자경문은 세 권의 책이 하나로 묶인 것이다.
천수경 만큼이나 첫 입산자가 암기하며 공부하는 기본 교과서의 하나이다.
첫째, 계초심학인문이다.
이 책은 본문 907자로 구성된 한국판 백장청규(百丈淸規)이다.
본래는 1205년 동안거(冬安居)를 시작할 때에 수선사(修禪寺) 중창불사 회향을 기념으로 하여 발표된
수선사의 청규(淸規)였다.
수선사는 송광사(松廣寺) 이전의 옛 이름으로 불사 전에는 지금 화엄전 규모의 3, 40칸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암자에 불과하였다.
이 책을 쓴 당시 지눌(知訥) 스님의 춘추는 마흔 일곱 살이었다.
우리는 율장(律藏)에서 부처님 당시의 수도생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듯이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을 통해서 송광사 스님네의 청정한 수도생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생활 주거 공간인 가람 구조는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수선사, 용화전, 문수전,
화엄전, 해청당, 임경당, 도성당 등으로 구역이 확실한 칠전당(七殿堂)을 유지해 왔으며,
조계산 이 도량은 지내본 이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어머니의 태반(胎盤) 안에 든 것 같이 아주 편안하고
조용하여 은거(隱居)하기에 딱 좋은 분위기"이다.
조선 초기부터는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한 권으로 엮어져서
전국 사찰 규모의 청규로 널리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이 초발심자경문의 내용이 당시 상황에 어울리고 아주 많이 필요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이후부터는 우리나라 스님네의 저서인 초발심자경문이 소의경전(所依經典)의 하나로
널리 읽히기 시작하였으니 이때를 불교의 자립이 잘 다져진 시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승가풍토에 맞도록 백장청규의 정신을 다시 결집한 것이 많고
몇몇 군데는 문장을 그대로 옮겨온 부분이 있다.
이 까닭은 물론 지눌 스님이 부처님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 수행하기 위해서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 특히 계율과 그 시대 그 환경에 맞는 청규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인 것이다.
저자 지눌(知訥) 스님은 한국 불교를 중흥시킨 분으로, 신라의 원효(元曉) 스님, 고려의 지눌(知訥) 스님,
조선의 서산(西山) 스님 등, 어떤 관점에서는 우리나라 삼대 스승의 한 분으로 꼽히는
선지식이라고 할 수가 있다.
조계산(曹溪山) 노납(老衲) 지눌(知訥) 지(誌)란 말이 책 끝에 있다.
조계산은 지눌 스님이 선종의 정맥 육조 혜능(六祖惠能) 스님의 종지를 잇는다는 뜻에서
기존의 산명 송광산에서 바꾼 것이다. 육조 혜능 스님의 행화(行化)도량은 광동성 조계산 남화사(南華寺)이다.
보통 글쓴이를 해동(海東) 사문(沙門) 목우자(牧牛子) 술(述)이라고 하고 있으나
송광사(松廣寺) 목판본을 따른다.
조계산 송광사 화엄전에는 3,900 장의 목판을 봉안한 판전(版殿)이 있다.
여기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목판본에서 옮겨온 내용이 조계산노납지눌지(曹溪山老衲知訥誌)이다.
이것은 1612년에 판각한 것.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의 내용은 세 문단으로 나눈다.
첫째 문단은, 처음 발심하여 입산한 초심자들의 언어습관,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가르친 사미(沙彌)의 청규.
부초심지인(夫初心之人)~영향상종(影響相從)까지 내용이다.
둘째 문단은, 일반 대중 청규. 거중료(居衆寮)~기위유지혜인야(豈爲有知慧人也)까지 내용이다.
셋째 문단은, 선원 납자 청규. 주사당(住社堂)~끝까지 내용이다.
둘째, 발심수행장이다.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은 원효(元曉, 617~686, 70세) 스님이
자신의 수행 체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총 706자로 된 운문이다.
경주 분황사(芬皇寺)는 원효 스님의 근본 도량이라 할 만하다.
29세 때에 출가한 본사이고 깨달음 이후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던 장소이며
말년에도 한동안 머물렀던 절이다. 원효 스님 자신도 분황사 사문 원효라고 스스로를 소개할 만큼
분황사를 끔직이 생각했던 것 같다.
수행 초기에 스승으로 모신 한 분은 도가 고매하기로 이름난 낭지(朗智) 스님.
그는 특히 법화경으로 뛰어난 선지식이었다.
경남 울주군 소재 영축산(靈鷲山)에서 산봉우리를 사이에 두고 동쪽 산 위 토굴에서는
스승 낭지 스님이 머물고 있었고 서북쪽 기슭 반고사(磻高寺)에서는 원효 스님이 머물고 있었다.
낭지 스님을 친견하여 가르침을 받던 어느 날이었다.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지으라는 분부를 받고는 그걸 지어서 올리기도 하였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이때 영축산 시절의 체험이 발심수행장의 내용 가운데에 적잖이 들어 있지 않을까 싶다.
발심수행장의 첫 구절 화택문(火宅門)은 법화경 비유의 내용이다.
원효스님은 수행 과정에서 일화가 많다. 우선 깨달음에 관한 일화이다.
원효 스님은 한때 도당(渡唐) 유학의 꿈을 안고 중국으로 건너가려고 두 차례 시도를 한 경험이 있다.
첫 번째 시도는, 650년 34세 때의 일이다.
육로로 의상(義湘, 625~702, 78세) 스님과 함께 고구려 땅을 거쳐 요동을 통과하려고 할 때에
고구려 수비군에게 정탐자로 붙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수 십일만에 간신히 풀려 나온 적이 있다.
두 번째 시도는, 661년 42세 때의 일이다. 바닷길로 의상 스님과 함께 서해를 건너서 가려고 할 때
뜻밖에 깨달음을 얻고 신라로 돌아온 일이 있다.
새벽, 어둠이 가시는 시간이었다. 두 사람이 잠이 깨어 무덤 밖으로 나와 길 떠날 준비를 할 때였다.
문득 원효 스님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어젯밤 물을 마셨던 그 바가지는 해골 바가지였다.
“아니? 저, 해골 바가지의 빗물을 내가 마셨다니!"
속이 메스꺼워서 심한 구토증을 느끼며 악, 하고 토하는 순간이었다. 이 때 홀연 대오하였다.
오도송(悟道頌)은 새로 지은 내용이라기보다 화엄경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온 구절들인데 몇 글자가 다르다.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
마음을 내면 가지가지 법이 일어나고
심멸즉 촉루불이(心滅則 촉루不二)
마음을 거두면 해골 물과 맑은 물은 둘이 아니로다.
삼계유심(三界唯心) 삼계의 근본은 마음이요
만법유식(萬法唯識) 만법의 근본은 의식이라
심외무불(心外無佛) 마음의 밖에는 부처가 없다
호용별구(胡用別求) 그런데, 어찌 따로 부처를 구하랴!
여기서 원효 스님은 신라에 돌아와 70 평생을 보살 만행의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그의 고매한 인품과 학덕은 후세에게 끼친 바 매우 커서 민족의 태양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셋째, 자경문이다.
사료(史料)가 넉넉하지 않은 자경문의 저자 야운(野雲) 스님에 관해서는 나옹 스님의 제자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최근에 새로운 자료 발굴로 해인사 종진(宗眞) 스님의 권단(權旦) 설이 나오고 있다.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힘이 있어 보이는 주장이다.
가. 신라의 영랑(永朗) 선인 설
영랑 선인은 원효(元曉, 617~686, 70세) 스님에게 계를 받고 야운(野雲)이라고 한 데서
혹시 자경문의 저자가 아닌가 한 적이 있었다. 그는 금강산의 신선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법호처럼 무애자재한 삶을 누린 인물이기 때문인지 자세한 전기가 없다.
영랑 선인의 생존 연대가 글의 내용보다 너무 앞선 까닭에 저자라고 볼 수가 없다.
자경문에 나오는 주인공(主人公)이라는 말과 조사관(祖師關)이란 말이 보편적으로
선종 문헌에 나타난 것이 1229년에 나온 무문관(無門關)이다.
이 책은 송대에 무문 혜개(無門慧開) 스님이 지은 책이다.
영랑 선인은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713, 77세) 스님과는 동시대로 추정 되는 인물이며,
또한 주인공(主人公) 화두"이뭣꼬?"의 시작을 육조 스님에게 두고 있어 시대가 벗어난다.
우리나라 선종의 개창인 구산 선문(九山禪門)은 영랑 선인이 살았던 때보다 200 년쯤을 뒤의 일이다.
나. 고려의 야운 각우(野雲覺牛) 스님 설
왕사(王師)를 지낸 나옹 혜근(懶翁慧勤, 1320~1376, 57세) 스님의 제자이고
함허 득통(涵虛得通, 1376~1438, 63세) 스님과 교류가 있었던 야운 각우 스님을 자경문의 저자로 믿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스승 나옹 스님이 출가 당시부터 주인공(主人公) 화두를 강하게 품고 있고,
무문관의 책은 이 무렵 널리 보급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다. 고려의 권단(權權, ?~?) 설
40년 동안 불교에 푹 빠졌다는데 거사로 있을 때에는 자호가 몽암(夢庵)이다.
원나라 철산 소경(鐵山紹瓊, ?~1311) 스님이 우리나라에 와서 법문을 하는 법석에 동참해서 크게 발심을 하고
나이가 많은데도 출가를 하였다. 자세한 전기가 없고 출가 후 7년 지나 열반하였다.
자경문에 나오는 속서의 몇몇 주요 인용구가 자경문의 저자라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점차 유력한 설로 떠오른다
誡初心學人文
夫初心之人은 須遠離惡友하고 親近賢善하야 受五戒十戒等하야 善知持犯開遮하라.
但依金口聖言이언정 莫順庸流妄設이어다.
旣已出家하야 參陪淸衆인댄 常念柔和善順이언정 不得我慢貢高니라.
夫初心之人(부초심지인)
부, 뒤에 나오는 발심수행장에도 부제불제불이 나오는데
문어에서 문장 처음에 놓는 글자로 그렇게만 이해해 주십시오.
초심지인에 초심은 초발심지인.
초발심. 불교를 옹호해서 자기 완성을 하고 다른 사람들도 완성이 되도록 구제하는것.
그런 원을 세우는 것이 초심지인이다.
또 쉽게 말씀드리면 불교를 배워서 자기 완성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내고 불교에 온 사람이다.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되겠읍니다.
須遠離惡友(수원리악우)
‘수’字는 모름지기 그렇게 많이 새기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조건을 나타내는 부사로,
조건부사로 되죠. 그래서 여기보면 반드시 모름지기 그렇게 나와있고 또 모름지기 하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우리말로 꼭이나 ‘반드시’ 라고 이해를 하십시오. 원리는 멀리 떨어지다는 얘기고,
악우는 나쁜 것 그렇게 해석을 하지 마시고 친구를 지칭하는게 아닙니다.
스승 가운데 불법을 바르게 가르쳐 주는 이를 선지식이라 하고 선지식의 반대를 악우라 하기도 하고
또 악지식이라 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올바르지 못한 선생님 이렇게 이해를 해도 되겠습니다.
우리는 가르치는 지도자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선생이 잘못 되었을 때는 제자도 잘못되기 쉽상이죠.
그래서 자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아주 잘 선택을 해야 겠다. 그렇게 이해를 하십시오 그래서 수원리입니다.
올바르지 못한 스승은 가까이 하면 안된다. 밑에는 반대죠.
親近賢善(친근현선)
현선은 위의 악우의 반대입니다.
그러면 선지식이라 이렇게 이해를 하고 또 올바른. 훌륭한 선생님. 이렇게 이해를 해도 되겠습니다.
五戒 十戒(오계 십계)
사미율의에 나오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善知持犯開遮 (선지지범개차)
요건 좀 어렵습니다.
持는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고 犯은 계율을 파하는 것입니다.
犯戒은 부처님 말씀대로 지키지 않는 것이고 개는 부처님이 어떤 계율을 말씀을 하셨는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무슨 말씀이가 하면 율장에는 비구 스님들이나 비구니 스님들이 가지는 계율에는 가사를 3벌 이상 가지지 말아라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옷을 너무 많이 소유하지 말아라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 후에 부처님 사촌 동생이자 부처님을 20년 이상 모셨던
아난이라고 하는이가 아주 값지고 좋은 가사가 한벌 생겼습니다.
자기한테 형님이 되는 가섭존자한테 그 가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3벌이상의 가사를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
그런 규정이 있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부처님께 말씀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좋은 가사가 생겼는데 이것을 사형인 가섭존자 한테
꼭 드리고 싶은데 부처님은 가사를 3벌 이상 가지지 말라고 하셨으니
이걸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는 부처님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가사를
3벌 이상 가지면 안된다는 것을 고쳐서 10일 까지는 가질 수 있지만 10일이 넘으면 안된다.
이렇게 해서 그 원래 말씀을 고쳐 가지고 10일 동안 기한을 더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계의 규정이 삼의를,곧 가사 세벌을 가지는데 10일이 넘으면 안된다.
이렇게 수행을 했습니다.그것을 ‘개’라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 해석을 보면 그렇습니다.
이걸 잘못 해석을 하면 문제가 커지는 데 특별한 경우에 파할 수 있을 특별한 경우에
계율을 어길 수 있음을 ‘개’라고 한다. 이렇게 해석을 했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해석입니다.
개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계율을 말씀하셨는데 문제가 발생하니까 그 문제를 최소화 하기 위해서,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 ‘개’지 그냥 고무줄 처럼 당기면 늘어나고
놓으면 오그라들고 하는 것이 ‘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 개차라고 하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또 자기 입장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이 개차를 이야기 하면 안됩니다.
우리 나라는 방편이라는 용어도, 원래는 방법과 편언을 방편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너무 확대해석 해 가지고 적당히 하는 것은 방편이라고 쓰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해석이며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개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계율을 말씀하셨을 때 그것으로 인해서 수행자들에게
큰 불편을 주었을 때 또 한가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최소화 하기 위해서 아주 줄이기 위해 가지고
그 계율을 약간 수정한 것을 수정해서 범위를 좀 더 넓힌 것을 개라고 한다.
또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비구계를 받지 아니한 사람하고는 비구는 같이 못 잔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비구계를 받지 아니한 사람, 곧 비구니도 마찬가지죠.
비구나 비구니계를 받지 아니한 사람하고는 같이 자지 못한다.
이렇게 말씀을 했는데 부처님 아들인 라후라가 9살에 출가를 했습니다.
사미율의에도 나오지요. 그런데 그 규정에 따라서 라후라를 밖에 나가라 해서 내 보냈지요.
그러니 라후라가 어데 갈 데가 없으니까 화장실에 가 있었단 말이죠 인도는 독사가 많습니다.
사람 냄새를 맡고 독사가 물려고 하는 순간에 부처님이 재빨리 라후라가 있는 장소에 가서
인기척을 내 가지고 라후라가 밖에 나오도록 해서 뱀에 물리지 않았는데 그래 의아스러워서 부처님이 물으셨다.
‘너는 어찌해서 이렇게 밤이 깊었는데 여기 와 있느냐?’
어린 아이니까 훌쩍훌쩍 울면서 ‘스님들이 너는 밖에 나가거라’ 그리 내 보내서 나왔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부처님이 비구계를 받지 아니한 사람하고는 같이 자지 말라고 하는 그런 말씀이 있으니까
그랬단 말씀이죠. 그래서 참 이 사람들은 너무 아주 막힌 사람들이다.
어린아이를 이렇게 내보내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래서 즉시 날이 밝은 다음에 스님들을 모으고 ‘비구계를 받지 아니한 사람하고 같이 자는데
이틀밤을 자고 사흘째 되는 밤에는 방을 정해 주어서 다른 방에 자도록 해라’
그래서 ‘비구계를 받지 아니한 사람하고는 사흘을 넘지 못한다’ 이렇게 계율을 바꿨습니다.
처음에는 비구계를 받지 아니한 사람과는 같이 못 잔다 하다가 그 다음에는 3일 동안 여유를 줬단 말이죠.
그런 것을 開戒라고 합니다. 수정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이 개라는 말은 첫째는 修正. 두번째는 補完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수정이나 보완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한계가 있는 거죠. 가령 사미십계 그러면 그것은 근본계입니다.
사미 십계 가운데, (앞으로 자세히 강의를 받겠읍니다만은)
살생계에서 부터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하는 계 까지는 근본계라고 합니다. 그것은 수정이 안됩니다.
어느 때는 이렇게 해도되고, 어느 때는 이렇게 안해도 되고 그것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근본계에는 ‘개’라고 하는 용어가 통하지를 않고, 그밖에 무슨 꽃다발을 쓰지 말라던지,
쓴다던지 또 높고 넓은 평상에 앉지 말라 하는 내용은 때에 따라서 신축성을 둘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개가 통하지만, 허락하는 것이 통하지만, 다른 것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주인공아 나의 말을 들으라’ 하는 책에 보면은 분명하게 그래 놨습니다.
‘특별한 경우 파할 수 있음을 개라’ 이건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래서 제가 상당히 길게 설명을 드립니다만은 근본계는 절대‘開’라고 하는 것이 통하지 않고
근본계 말고는 開라고 하는 것이 통하기 때문에 첫째는 이 개라고 하는 의미가 수정이요
둘째는 보완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요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되겠구요. ‘차’라고 하는 것은 ‘금지의 뜻입니다’
처음에는 계율을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그 내용을 언급을 안하셨는데
그대로 있다가 보면은 승단의 유지나 개인이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발생하니까 추가로 한겁니다.
그것을 ‘차’ 라고 한다.
자 정리를 합시다. ‘開’ 라고 하는 것은 수정과 보완이요‘遮’ 라고 하는 것은 없던 계율을 더 말씀을 하셨고,
또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계율을 지켜야 된다는 것을 강조한 내용을 차라고 한다.
이렇게 이해를 해 주십시오 지범은 간단합니다.
‘지’는 그대로 지키는 것이요 ‘범’은 어기는 것이니까 간단하지요
또 개차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계율을 잘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씀인데 ‘선지지범개차’
이 글씨는 계율을 잘 지키라는 내용이지 이것은 수정한 것이니까 내가 이렇게 안해도 되고 이것은 하지 말라.
했으니까 이대로 지켜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전체의 내용은 5계와 10계를 받아서 계율을 충실하게 지켜야 된다,
왜냐, 계율은 불교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해서 비니주성덕이 그랬습니다.
“계율이 청정하게 지켜질 때에는 승단도 발전할 뿐만 아니라 불교가 발전한다 해서 계율은 불교의 생명이다.”
그렇게 말씀을 했으니 보조국사 지눌도 역시 계율을 잘 지켜야지 다른 얘기가 아닙니다.
但依金口聖言(단의금구성언)
‘단’ 많이 나옵니다.
앞으로. ‘단’字가 많이 나오는데 ‘오직’해도 되고 ‘다만’해도되고 같은 의미가 되는데 무엇을 한정하는 부사다.
그렇게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의’는 의지한다.따른다.‘마찬가지금’‘ 금구성언’은 부처님의 말씀을 금구성언이라 그렇게 이해를 하십시오.
그러면 자 계율을 잘 지켜야 된다고 했지요.그 다음에 부처님의 말씀만 따르고
莫順庸流妄說(막순용류망설)
그렇게 나오는데 금구성언은 곧 경율론 삼장.
조금 범위를 확대하면은 조사스님네의 말씀까지가 포함이 되겠습니다.
어록이라 그러죠 보통 어록, 조사의 어록까지를 포함해도 되겠다.
원래 금구 성언은 부처님의 말씀만이 지만, 그렇게 볼 때에는 곧 경과 율이죠.
논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의 경전과 율장을 해석한 내용이니까 금구성언은 경장과 율장이 되지만
좀더 확대 해석을 하면은 조사스님네의 논장하고 어록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부처님 말씀만 오직 따라야 되지 다른 말씀은 따라서는 안된다.
용류는 못난 사람, 모자라는 사람. 부족한 사람 앞에 나오는 금구성언의 반대다.이렇게 이해를 하십시오.
‘망’은 허망한 것이 아니고 함부로 하는말. 자기 마음대로 하는 말은 망설이라합니다.
그래서 고대에서는 간대로, 그랬습니다. 그 간대로의 뜻이 ‘자기 마음대로 ’좀 속되게 표현하면 제멋대로입니다.
그러니까 그 두 귀절은 부처님의 말씀이나 조사스님네의 말씀만 기준을 해야 되지,
불교하고 내용이 맞지 않은 말은 따라서는 안된다.그래서 依와 順은 같은 의미로 보십시오.
자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만 따르고 함부로 하는 말은 따라서는 안된다.그 다음에
旣已出家(기이출가) 나옵니다.
旣는 이미니까 더 설명을 안 드리고요.
우선 세속을 나오는 걸 출가라 하죠. 그 다음에 자기 가족, 자기집을 나오는 걸 출가라.
그 다음에 우리는 사회 생활을 하죠. 불교에서는 삼계라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3가지로 나누어서 말을 하는데 좀 쉽게 말씀드리면 사회다.
사회를 떠나는 것도 역시 출가다.
우리는 눈을 떠서 잠이 들고 심지어는 잠 속에 까지 생각이 쉬지를 않습니다.
그것을 불가에서는 번뇌망상이라 그러죠. 어지러운 생각이 쉼없이 계속된다.
그 어지러운 생각이 쉼 없이 계속되기 때문에 죄를 짓고, 죄를 지으니까
거기에 댓가를 치르기 위해서 사람몸도 받았다가 짐승도 되었다합니다.
그것이 대충 나누어 보니까 여섯가지더라 그래서 지옥, 아귀, 축생, 삼악도 그랬죠.
그 다음에 사람 그 다음에 싸우기를 좋아한다는 아수라,그 다음에 하늘 세계,
그렇게 여섯가지로 나누는데 그것을 6도라고 그랬죠.
육도로 윤회하는 원인은 번뇌로 인해서 죄를 짓기 때문에 그 댓가를 갚기 위해서 다닌다.
자 그러면 번뇌라고 하는 것을 벗어나게 되면 윤회는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번뇌의집을 벗어나는, 번뇌를 벗어나는 것도 역시 출가다 그것을 해탈이라 그러죠.
그래서 대충 세가지로 나누는데 여기서는 자기 집,자기 가정을 떠나는 것을 출가라 그럽니다.
출가란 의미를 많이 설명할 수 있읍니다만은 여기서는 자기집을 나온 것을 출가라 한다.
이렇게 알아 주시구요.또 부처님이 출가하고 제자들도 출가하도록 시킨 것은
부처님 이전에도 수행자들은 거의 자기 집을 떠나서 생활을 했다.
그럽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수도에 전념할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 정반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요즈음 말하면 가출이죠!
가출을 해서 수도를 하여 위대한 깨달음을 얻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오늘날 불교가 존재하게 됐고
우리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게 됐지요.그것을 부처님 이전에 있었던 수행하는 방법의 하나로 택한 것이었다.
해서 여기에서는 자기의 집을 나오는 것을 출가라 한다. 그렇게 알아 두십시오.
參陪(참배)
참은 같이 있다 하는 내용이고, 배는 모신다는 뜻입니다.
淸衆(청중)
청정대중, 깨끗한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 깨끗한 생활을 하는 여러 스님네, 그렇게 아십시오.
참배청중 그랬으니까 바르게 수행하는 많은 스님들을 모신다.
그것이 참배입니다. 그런데 어느 절을 참배한다 할 때는 참은 마찬가지인데 그 때 배는 ‘절할 拜’字 입니다.
참배하러 간다. 대웅전에 참배하고 오시요! 할 때는 ‘절할배’자 입니다.
이 ‘모실배’자가 아닙니다.이것은 지금 처음 출가를 한 어린 사람들이거나 나이 많다 하더라도
절에 와서는 출가한지가 얼마 안되니까 곧 유치원 생이죠 하니까 참배가 통하지요. (해서) 모신다.
스님네를 모신다 웃어른을 모신다할 때는 ‘모실 陪’字고 절을 한다 할 때는 ‘절할拜’字니까 말은 같지만
내용은 틀리니까 구별을 해야 됩니다.
자기 집을 나와 가지고 청정하게 수행하는 많은 스님들을 모시고 있을 때 用心이 나옵니다.
어떻게 마음 가짐과 몸 가짐을 가져야 되느냐
常(상)이니까
항상. 언제나 늘 그렇죠. 항상. 어떤 때는 이렇게 해도되고 어떤 때는 이렇게 안해도 되고가 아닙니다.
상이니까 항상常이죠.언제나 한결같이 계속해서 이것은 間斷(간단)없이 하는게 常이죠.
柔和善順(유화선순)
따로 떼면 네 글자가 각각 다르죠.
부드럽고, 온화하고, 착하고, 순종하라 이지만 유화선순은 두 용어로 봅시다.
유화는 사람이 부드럽다. 선순은 착하다.처음 들어온 사람이 뻣뻣해 가지고는 안된단 말이지요.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유화고, 선순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그대로 따르는 것을 선순이다.
부드럽고 착한 것만을 생각할 지언정 유순하고 그 다음에 착한 것만을 생각할지언정
곧 스님네 한테 항상 부드럽게 대하고 착하게 스님들을 모셔야 되고
不得我慢貢高(부득아만공고)
부득. 보통 해석하기를 ‘시러금’ 그럽니다.
시러금은 실어에 힘준 말인데 원어로는 실어곰입니다.
시러금 버따 능히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한문 글자로 보면은 가할可’字 있죠. 가하다 허가 한다 할 때의 가. 무슨 서류를 제출해 가지고
인가를 받는다 하는가 그것을 가할가 그러죠. 이 ‘可’(가)字의 의미가 들어있읍니다.
또 ‘능할 能’(능)字나 이런 의미가 바로 실어의 뜻입니다.
사전에 찾아보면 그렇게 나왔는데 그래서 시러금은 실어곰인데 그게 달라져 가지고 시러그 한다 그러면
시러금을 실어의 힘준 말이다.
그 의미는 뭐냐. ‘능할 能’字나 ‘가할 可’字의 의미이다.위에 ‘아니 不’이 있단 말씀이죠 (그러면 不可나 不能이니까.)
不可나 不能의 의미가 되니까 그렇게 해서는 못 쓴다고 하는 의미이다.
해서 정리를 하면은 금지사인 “勿”(물) 字나,“莫”(막)자의 의미이다. 즉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알아 주십시오 좀 설명을 어렵게 해 드렸는데 하지 말라는 말씀, 곧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말씀이다.
해서 시러금 하고 새기지를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못쓴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해석을 한다.
좀 어렵게 설명하면 不이나 不能의 뜻이요 그것을 다른 글자하고 연결시키면 ‘勿’字나 ‘莫’字의 의미를 가졌다.
해서 그렇게 하면 못쓴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 자! 붙여서 해석을 하면 아만은. (“아만공고” 나오죠)
아만은 나의 신분과 그 신분이라고 하는 건 자기의 출신을 가리킵니다. 곧 가문이죠.
나의 가문과 지식과 용모와 세력 등을 믿어서, 아주 쉽게 설명하면 그렇습니다.
나의 여건을 믿어서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다, 다른 사람을 잘 보는 번뇌를 아만이라고 합니다.
또 쉽게 설명하면 ‘교만’이다. 나를 중심하기 때문에 아만이라고 합니다.
또 그걸 쉽게 설명하면,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을 아만이다.
그렇게 아시면 되겠고, “공고”가 문제입니다. 높은 것 바치지 말아라 그게 아니고 잘난체 한다.
뽐낸다 는 것을 공고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만과 공고가 같은 얘기죠. (자! 그래서) 쉽게 설명하면
“부득아만공고”는 잘난척 하지 말아라. 그렇게 해도 되고 아만 부리지 말아라, 내가 잘났다고 하는 것,
내가제일이라고 하는 것을 아만이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나는 너보다 낫다. 그런데 윗사람을 모시고 있는데 내가 잘났다고 하는 사람이,
내가 제일이라고 하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할 리가 만무지요.
그러니까 “상념유화선순”은 시키는 대로 잘 순응하고 복종하고 내가 잘났다고 뽐내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만을 높이 바치지 말아라. 그렇게 해석을 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아만하고 공고하고 같은 내용이다. 또 어렵게 설명을 하면 아만은 인도의 표현이요 공고는 중국식의 표현이다.
이렇게 설명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이출가하야”에서 아만공고까지는 출가한 다음에는 스님을 모시는데 어떻게 해야 된다는 내용이 나왔지요.
大者는 爲兄하고 小者는 爲弟니 儻有諍者어던 兩說로 和合하야
但以慈心相向이언정 不得惡語傷人이어다.
若也欺凌同伴하야 論說是非ㄴ댄 如此出家는 全無利益이니라.
[大者는 爲兄하고 小者는 爲弟니라](대자는 위형하고 소형은 위제니라)
대는 ‘큰 大’인데 키가 크고 작고, 그걸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첫째는 나이입니다. 첫째는 나이요 두번째는 출가한 기간을 말합니다.
자! 왜 그렇게 해석을 해야 되는가 하면, 부처님은 교단을 이끌기 위해서어떤 생각을 하셨는가 하면,
내 모든 집안은 자기의 가문과 용모와 학력과 과거의 경력과 지식 같은 것은 일체 없던 걸로 하고
그 때부터, 출가한 그 시간 부터는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기 때문에, 나이가 많고 적고,
가문이 훌륭하고 못하고 지식이 많고 적고, 또 용모가 잘 생기고 못 생기고그런 것은 다 백지로 돌려서
출가한 그 시간부터 새 출발이다.그렇게 규정을 내려서, 왕자라 하더라도 늦게 출가하면 밑 자리에 앉고,
아주 미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출가를 일찍 해 가지고 일찍 계를 받으면 윗자리에 앉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나오는 “대자위형” 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해야 됩니다.
키가 크다든지 나이가 많다든지 그것은 별개 문제가 아닙니다.그래서 아까는 제가 나이를
말씀을 드렸는데 그것은 조금 확대한 해석이고 엄격하게 따지면 출가한 기간이 많은 것이 대자다.
그 다음에 “소자는 위제니라” 해서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나서 교단이점점 커지니까 석씨 왕자들도
출가를 하게 되었습니다.그 때 아홉 사람이 같이 출가했다고 경전에는 기록이 돼 있는데
그 때 우바리존자, 계율을 가장 잘 지키고, 또 자비심이 많아서 병 간호하는 것을 그렇게 극진히 했다고
하는 그 우바리존자에게 왕자들이 귀금속을 다 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바리존자는 그 때까지 미천한 가정에 태어나 가지고 왕궁에서 왕자들을 위해서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였다고 해요. 그러니까 괴팍한 왕자들은 우바리한테 애를 많이먹였던 모양이죠.
머리를 잘못 깎았다고. 공들여 깎아 줘도 투정을 하고그렇게 하니까, 자기들이 출가하는 마당에,
출가하면 그런 귀금속이필요하지 않으니까, 귀금속이라는게 쉽게 말하면 악세사리란 말이죠.
그런게 아무 필요가 없는거야 수행자 한테는. 그러니까 왕자들이 의논하기를 우바리가 우리를 위해
가지고 고생을 많이 하고 우리들이 마음에 안들면 때려주기도 하고 온갖 욕도 하고 그랬으니
우리가 출가하는 마당에 우리가 갖고 있는 귀금속, 악세사리를 다 모아서 우바리에게 주면
저 사람은 저것만 가져도 일생동안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주었다고 그러죠.
그러면서 ‘너는 지금부터 이런 어려운 일을 하지 말고 이걸 가지고 편안한 생활을 해라’
그렇게 얘기를 하고 ‘너는 지금까지 고생을 했으니까 잘 있으라’ 이렇게 손을 흔들며
하직 인사를 했다고 하죠. 손 흔드는 건 제가 붙인 말이구요. 그 당시 제가 없었잖아요.
그러니 보지는 못했고 우바리가 그렇게 말을 하고 떠나는 것을 보고 왕자들도 부처님께 귀의하기 위해서
떠나는 데 내가 이까짓거 악세사리 좀 받아서 편안하게 살아서 뭣하겠느냐.그래 그걸 팽개치고는
급히 왕자들 한테 가서 “왕자님들 저는 이런게 다 필요 없으니까 부디 저를 데리고 가 주십시오”
그래서 아홉 왕자들이 의논해 가지고 같이 부처님께 데리고 가서 같이 계를 받게 됩니다.
그 때 왕자들이 또 의논하기를 “지금까지는 우바리를 우리가 부리고 살았는데 참 미안하다.
한 옆으로 생각하니까. 그러니 지금은 우바리를 우리 앞서서 계를 받도록 부처님께 요청을 하자”
그래서 왕자들이 부처님께 요청을 했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이 지금 아홉 사람이
같이 출가를 했는데 이번에는 저희들 한테 먼저 계를 주지 마시고 우바리부터 먼저 계를 주십시요”
부처님은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하고 우바리에게 먼저 계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바리가 윗자리에
앉게 되었읍니다.
인도는 철저한 계급 사회였다고 그럽니다. 지금도 그것이 상당히 남아서소위 조선 시대의
아주 나쁜 폐습의 하나인 종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대략 한 400만이 있다고
말한 글을 한 번 본적이 있어요 그렇듯이 철저한 계급 사회였는 데도 부처님은 그걸 깨고
우바리가 왕자들 윗자리에 앉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 법에는 먼저 계를 받은 사람은
윗자리에 앉고, 늦게 계를 받은 사람은 밑에 앉는다 하는 그것을 기준해서 요 귀절도 해석을 하는 것이
좋겠다 해서 나이 많은 사람보다는 먼저 출가한 사람은 형이 되고 늦게 출가한 사람은 아우가 된다.
세속적인 해석이라면 아까처럼 나이 많은 사람은 형이 되고 나이 어린 사람은 아우가 된다.
그건 맞지를 않아요. 그러면은 혼란이 생긴단 말씀이죠.
그 다음에
[儻有諍者어든](당유쟁자)
사람이 모여 살면 반드시 의견 충돌이 있고 의견 충돌이 있으면 잘못하면 육신 설법을 하게 된다.
싸우는 것을 부처님 경전에는 인신 설법이라 그럽니다. 몸으로 가지고 설법을 한다.싸움이란 말이죠.
저 육탄 공격이라는게 있잖아요 싸움이 지나치면 막 치고 받으니까, 여기 “쟁”이라고 하는 것은 언쟁,
그렇게 봅니다.
[兩說은](양설)
싸움이란게 상대가 없이, 孤掌難鳴(고장난명)이라 그랬잖아요.
손바닥 하나 가지고는 소리가 안 난단 말이에요 상대가 없으면 싸움이 안 나잖아요,
그러면 서로 다투는 두사람을 兩이라 하고 舌은 자기 주장입니다.
그러면 다투는 두사람의 주장 그렇게 알아 두십시오.
자 이간질을 불교에서는 ‘양설’ 그럽니다.
우리말로 이간질을 불교에서는 ‘양설’ 그러는데 그 때는 두가지 양자(兩)에다가 ‘혀 설(舌)’字를 씁니다.
혀를 두가지로 놀리면 안된다.혀를 두가지로 놀리는 게 이간질이죠. 그러니까 쓰는 게 다릅니다.
그래서 여기의 양설의 兩은 다투는 두사람. 舌은 자기의 주장 그렇잖아요. 갑은 갑대로 자기 유리하게
자기 주장을 내 세우고,을은 을대로 자기 옳다고 주장을 내 세우니까 자기 주장이다 그렇게 알아 두시구요.
[和合은](화합)
잘 조화를 시키는 것이다. 두사람 싸우는 상대방의 주장을 각각 들어보고 그것을 잘 달래서
서로 화해를 하고 더 이상 다투지않도록 해라. 두 사람의 주장을 화합시켜서, 화합, 조화라 그럽니다
또 한가지는 여기 화합은 화해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화해, 왜 이런 용어를 썼는가 하면 ‘승가’ 하고 ‘스님’ 이렇게 쓰는 용어가 원래 화합이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한문으로 쓰면 ‘중 승(僧)’ 그러죠. ‘사람 인(人)’ 변에다 ‘일찍 증(曾)’한 字가 ‘중 승(僧)’字인데
사람보다 앞선 것이 스님이다 이겁니다.그것은 범어의 samga 僧伽를 줄인 말인데,
그 승가라고 하는 것이 비구계를 받은 네사람 이상이 화합하면서 산다라고 하는 의미가 들어 있어서
승가를 번역하면 화합입니다. 그 의미도 들어 있지만 쉽게 설명을 하려면 요즈음에 화해한다고 그러죠,
화해 또 그것을 조금 걸러서 설명하면 조화시킨다. 이렇게 해도 되겠습니다.
만약 서로 다투는 사람이 있거든 두가지의 주장을 화해 시켜서
[但以慈心](단이자심)
다만. 앞에 나왔죠. 以字는 ~ 으로써 영어의 with 하고 같은 용법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자심은 자비심의 준말이요.
[相向의](상향)
‘향’字는 ‘대할 대(對)’字 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지요 상대. 상대한다고 그러지요.
‘저 사람은 상대할 사람이 못돼’ 하는 상대하고 같습니다.
[惡語는](악어)
추악어의 준말입니다. 추악한 말, 추악어 불교에서는 악담을 악구라고 합니다.
악구. 악구라고 하죠. 다른 표현입니다. 추악어나 악구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게 기록을 해 놓으십시오.
나쁜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성질이 나면 악담을 하죠. 다른 사람이 들으면 끔찍한 말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악어라하거나 악구라 합니다.그러나 악구라 했을 때 고약한 입, 험악한 입,
나쁜 입 그러니까 악당이다. 추악한 말로
[傷人](상인)
사람을 손상시키지 말아라.
남 기분 나쁘게 하지 말아라 이거죠. 해서
<부초심지인에서부터 선지지범개차까지는>
출가한 사람은 일단 계를 받아서 계를 잘 지켜야 된다는 얘기고,
그 다음 <단의 금구 성언에서 부터 망설까지는>
부처님 말씀만 기준을 해야 되지 그밖에 다른 말을 따르면 안된다.
그 다음에 <기이 출가에서부터 아만공고까지는>
출가한 다음에는 스님네를 잘 모시고 자기 잘난체 하면 안된다.
그 다음 <출가한지 오래된 사람은 형으로 생각해야 되고 출가한지 늦은 사람은 아우로 생각을 해서
형은 아우를 다독거려 주고, 잘 타이르며 비호해 줄 의무가 있단 말이죠>
그렇게 살아야 된다.
그런데 여러분도 행자 생활을 같이 하게 되면 의견 충돌이 있고 의견 충돌이 심하면 싸우게 된단 말이죠.
그 때는 서로서로 상대방의 주장을 듣고 조화를 시켜 가지고 싸움을 그만 두게 해야 되지
같이 고함을 지른다든지, 또 아주 남이 듣기 거북한 말을 사용하게 되면은 그것은 도리어 이익보다는,
자기 자신은 구업을 짓죠, 악구를 했으니까 악담을 했으니까 구업을 짓게 되고 상대방 한테는
마음을 상한다.
상인의 상은 상대방의 마음(상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못쓴다.
[若也欺凌同伴하야 論設是非인댄](약야기능도반하야 론오시비인댄))
우선 여러분들이 원전을 모르쟎아요.
번역된 책도 많은데, 하필 우리 나라 정화 이후에 가장 많이 발간된 책이금강경이고,
그 다음에 법화경이고, 그 다음에 아미타경, 또 지장경 대부분 법보시를 한다면 그런 것들이고
또 많이 읽히는 것은 천수경입니다.
그 기본이 되는 책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발간이 되었는데 초심도 해설서라 역주를 한 책이
제가 수집해 가지고 있는 것만 하더라도 13종이나 됩니다.거의 비슷비슷하지만 그렇게 많은데
주의를 안해 가지고 아는 것도 잘못 해석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더 저한테 배정을 받았기 때문에 좀 꼼꼼하게 강의를 해드리려고 하니까
지겹더라도 잘 들어두면은 여러분들한테 약이 될 것입니다.
‘약야’ 두 글자가 만약입니다. 그 ‘야’字는 좀 특별하게 쓰였는데 만약 하면 가정을 나타내는 부사지요.
또 조건을 나타내는 부사밑에 야자가 놓일 때도 그냥 별 역할없이 만약이나 또 반드시,
꼭, 이런 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기는 ‘속일 기’字가 아니고 ‘업신여길 기’字입니다.
능도 ‘업신여길 능’字입니다.두 글자가 업신여길 입니다. 동반은 도반입니다. 도반 사회에서 말하는 동반.
같이 무슨 일을 하는 걸. ‘동반 뭐 한다’고 그러죠 그게 아닙니다. 여기서는 도반을 동반이라 그럽니다.
道修行을 같이 하는 벗이다. 그런 뜻으로 동반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보통 같이 도를 닦는다.
그래서 도반이라 그러죠
[論設](논설)
논이나 설은 말을 따진다 그말입니다. 따진다.
[是는 ‘옳을 시’字, 非는 ‘그를 비’字]
옳고 그름을 따질 것 같으면.
시비. 여러 가지 말씀을 했는데 잘잘못을 시비라 하기도 하고 (잘잘못)잘잘못이나 옳고 그름이나
마찬가지죠. 또 다른 표현으로는 분별.분별이라고 그러죠 분별심 여러 가지 어지러운 생각을
불교에서는 분별이라고 하는데 이 분별심을 다른 표현으로 시비심이라 합니다(시비심)
자기 마음 가운데 어지러운 생각이 없을 것 같으면 남의 잘잘못은 보지 않게 됩니다.
해서 저는 아직 ‘도’라는 걸 꿈에도 못 봤습니다.
도라는 걸 꿈에도 못 봤는데 제가 도인이 된다 그러면 그 경지는 어떻겠느냐 한 번 생각을 해 봤습니다.
도인이 되어야 도인의 경지를 안다.사회 말씀도 ‘聖人而能知聖人’이라고 성인이 되야 성인의 위치를 안다.
이런 말씀이 있죠 제가 한번 생각을 해 봤습니다. 자 모든 번뇌가 다 끊어진 상태를 도인의 경지다.
그러는데 그러면 최소한도 다른 사람의 잘잘못은 보지 않아야 되지 않느냐 따라서 분별심 곧 시비심이
최소한도 없어진 상태라야만 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너는 나한테 잘하니까 예쁘고
너는 나를 애를 많이 먹이니까 나쁘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아는 것이 하류들보다 더 많이 중국의 천태지자나 청량국사보다 더 변재가 능하고
저술이 많다 하더라도 도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시비를 다른 표현으로 하면
분별심이요 분별심이 곧 번뇌가 아니냐 이렇게 해석을 할 수가 있는데 여기서는 옳고 그름 또 잘하고
잘 못하는 것만 국한시켜서 해석을 하십시오.그래서 만약에 도반을 업신여겨서 너는 잘하고 나는 못하고,
나는 잘하는데 너는 못한다. 이런 것만 자꾸 따져서 시비를 일삼는다면
[如此出家는](여차출가)
이와 같은 출가는
[全無利益이니라].(전무이익)
하나도, 전은 하나도 일체, 전 字는 일체 하는 표현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자 어떤 점방(商店) 같은데 보면,이것을 일체라고 읽어야 되는데 ‘끊을절’字니까 ‘일절’ 그러는데
그건 잘못 읽는 겁니다. (一切) 상주일체 하는 일체는 ‘체’라고 읽는게 맞습니다.
이것은 끊는다 그러면 ‘절’인데 모두 전부 할 때는 온통 ‘체’로 발음해서 체로 읽어야
그게 제대로 되는 겁니다. ‘일절’하면 그것은 남김없이 모조리 끊어버린다는 의미지 전부다 하는 의미는
없습니다. 해서 여기 ‘절’자는 일체라는 의미로 해석을 하면 되고 하나도 ,조금도,또, 전부,해도 되죠.
이익이 없다.출가한 이익이 뭐냐 나날이 수도에 전념할 수 있어야 되는데 수도에 전념하지를 않고
사회사람들처럼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이런 것만 따져가지고는 수도하는이의 보람이 없으니까
시비를 일삼지 말고 또 도반을 업신여겨서도 안된다. 그러면 <대자위형에서 부터 전무이익까지는>
같이 사는 분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야 되느냐 그런 내용이죠
財色之禍는 甚於毒蛇하니 省己知非하야 常須遠離어다.
無緣事則不得入他房院하며 當屛處하야 不得强知他事하며
非六日이어든 不得洗浣內衣하며 臨盥漱하야 不得高聲涕唾하며,
[財色之禍는 甚於毒蛇하니](재색지화는 기어독사)
사미율의에도, 세번째, 不淫에도 나오고또 열번째, ‘생상금은 전보를 가지지 말아라’ 거기에 나오는 말씀인데....
부처님이 아난존자를 데리고, 영축산,기사굴산에서 중생을 교화하러 내려오시다가
금덩이를 하나 보셨습니다. 부처님이 먼저 발견을 하시고 말씀이 “독사니라” 그러셨단 말이죠
그러니까 아난존자가 그걸 보고 “독사니다” 그랬습니다. 부처님은 “독사니라” 그랬고 그러니 주의하라
이런 말씀이고 아난존자는 그걸 보니까 금덩어리를 “독사니다” 했으니까 “아하! 독사가 맞습니다”
이런 말씀이죠.
그 때 마침 나무꾼이 옆에서 부처님과 아난존자 두분이 대화하는 걸 들었습니다.
엄청나게 큰 금덩어리를 보고 부처님은 “독사니라” 그랬고 아난은 “독사니다” 그래 대답하고는
두분이 내려 가셨단 말씀이죠 나무꾼이 “야! 오늘 참 재수 좋다 저렇게 큰 금덩어리를 부처님하고
제자는 보고 그냥 갔으니 나는 이제 살판 났구나” 그걸 갖다 팔아서 엄청난 부자가 되어 가지고
집을 잘 짓고 살았습니다. 그 산에는 1년에 한 번씩 왕이 사냥을 하러 나옵니다.
산에 왕이 사냥을 나와서 보니 산모습이 많이 바뀌었단 말입니다.
없던 집도 새로 생기고, 또 집을 지었는데 아주 요즈음 표현으로 호화 주택을 지었단 말이죠.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자기 측근들한테 물었습니다.
“없던 집이 이렇게 갑자기 생겼느냐 그 이유를 자세히 알아서 보고를 해라”
그 때는 임금 명령 하나면 모든 일을 다 처리해야 될 때이니까 아, 어느 영이라고 어기겠습니까
사실대로 보고를 했지요 그러니 왕이 화가 났단 말이죠 그 당시도 물론 사유 재산을 인정했지만
그렇게 주인 없는 물건은 전부 왕의 소유다.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명령 내리기를
“잡아 들여라” “네 이놈 어째서 내 허락도 없이 그 큰 금덩어리를 팔아 가지고 무엄하게
내가 다니는 사냥터에 집을 짓고 이렇게 사느냐” 이렇게 실컷 두드려 맞고, 사형감이라 법관한테 물어보니
사형시켜야 된다고하고, 그래 인제 마지막 사형을 받을려고 하는 찰나에 “세존, 아난”그런단 말이죠
그 이상하거든. 그래, 사형을 멈추고 이 사람이 세존 아난 그렇게 부르짖습니다 자기 죽을 찰나니까
얼마나 목소리가 애통하겠어요 그래 임금한테 보고를 또 올렸습니다. 그걸 자세하게 한번 들어봐라
그래 물어 보니까 자기가 나무를 하러 갔다가 처음에는 그 금덩이를 못 봤는데 부처님하고 아난 두분이
내려오시다가 부처님이(아까 말씀처럼) “독사니라 주의해라” 또 아난은 “독사가 맞습니다.
예, 주의 하겠습니다” 그러고 내려가는 것을 보고 제가 금덩이를 발견해서 지금 한 때는 호강을 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살았는데 바로 제가 죽게 됐으니 죽게 된 것은 금덩어리 때문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부처님 말씀과 아난의 말씀이 맞는 얘기 입니다. 독사입니다.그래도 용서해 줄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독사란 말이죠 재물이 독사다.
다음에 색은 여기에서는 여자를 가리키고, 남행자 쪽에서 보면 여자고 여행자 쪽에서 보면 남자지요.
자기의 반대되는 성, 그것을 색이라고 그렇게 압니다. 보통 경전에서 색이라고 그러면
여자를 가리키는데,여러 가지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사분율장에 보면 그렇습니다.
‘차라리 남근으로(남자의 성기를) 독사의 입에 넣을지언정 여인하고는 가까이 하지를 않겠다’
또 독사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되기까지는 자꾸 자꾸 맴을 돕니다. 맴도는 것을 불교에서는 윤회라 그러죠
윤회하게 되는 원인이 바로 탐진치 삼독이라고 하는데, 욕심, 성냄,어리석음 세가진데,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은 것을 탐이라 하죠 또 탐욕 그런단 말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싶거나
자기의 소유로 만들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되면 화를 낸다. 그것을 진이라 합니다.성낼 진자도
두가지입니다. ‘입구(口)’字에다가 ‘참진(眞)’字 한 경우가 있고 (嗔) ‘눈목(目)’字에 다가 ‘참진(眞)’字 한
경우가 있는데 (瞋) 두 글자가 다 ‘성낼진(瞋)’字입니다. 왜 그렇게 만들었는가 하면 사람이 성을 내면
눈을 부릅뜨죠 그러니까 눈목자에다 참진자 했죠 또 성이 나면 말을 함부로 하죠 성난 사람이 말을 곱게
합니까. 부드러운 말씀을 안하잖아요
그러니까 말을 함부로 할 때에는 입구자에다가 참진자를 써서 성낼嗔 그러고 눈을 부릅뜨고
얼굴을 험상궂게 가질 때는 눈목자를 써 가지고 성낼瞋 그런단 말입니다.
어쨌든 뜻대로 안됐을 때, 자기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때는 화를 낸다.
그것도 하나는 눈을 부릅뜨고 하나는 또 험한 말을 한다. 이렇게 글자를 두가지로 씁니다.
진할 때 글자를 두가지로 쓰는걸 참고로 하시고 여하튼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땐 화를 낸다.
‘진’그런단 말이죠. 그 두가지는 어떻게 생기느냐 .사람들이 마음에 어리석기 때문에 그렇다
이 세가지를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할뿐만 아니라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 또 사람을
나쁜 곳으로 인도하는 무서운 독약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삼독이라 그럽니다.그러나 어린아이들 보고
사탕을 단 것을 많이 먹으면 이빨이 상한다고 주의를 쥐도 어린아이들은 단 것을 먹으면 좋으니까
달콤하니까 자꾸 먹다가 이빨이 많이 상해가지고 나중에는 후회하게 되듯이 결과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에게 좋은 것만 생각하고 또 그것을 오래 익혀왔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멀리하고 싶어도 멀어지지
않는 것이다. 큰 자석이 있는데는 옆에 쇠붙이가 가기만 하면 자석에 달라 붙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해서 끊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수도인에게 수도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첫째는 경제적으로 재물, 그 다음에 두번째는 여자다.
사회에서도 酒色雜技(주색잡기) 그러죠, 술을 많이 먹고 그 다음에 여자를 좋아하고
그 다음에 잡기 하는건 노름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과는 어떻게 되느냐 敗家亡身(패가망신)하게 된다.
자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했는데, 돈을 많이 모으려고 한다든지 이성을 밝힌다든지,
수도하고는 도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다.한데 왜 독사보다 심하다고 했느냐 독사는 한번 물리면
이 생명하나만 끝나면 됩니다. 사람도 독사에 물린다고 다 죽는건 아닙니다.
뱀 독을 아주 많이 타는 이들은 독사에 물리면 죽고 그렇잖으면 고생만하면 낫는이도 있고,
어떤이들은 또 지네 있잖아요.지네에 물리면 지네 독을 또 많이 타는 이가 있어요.
그런이들을 뱀독보다 지네독을 더 많이 탄다고 그래요 헌데 여기서는 독사한테 물리면 잘못하면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에 무섭다고 하는 비유로 하신 말씀인데 어쨌건 이생명 하나로 끝난다 이겁니다.
독사한테 물려서 죽는다 하더라도,그걸로 이번으로 끝나 한번으로 끝나지만,
가령 재물에 눈이 어두어가지고 탐욕심을 많이 가졌다고 한다든지 바람을 많이 피웠다고 할 것 같으면
한번으로 끝나지를 않는다.지혜의 생명을 끊어 버리기 때문에, 지혜의 생명을 한번 끊기게 되면
그것은 좀체로 살아나기 어려운 것이다
독사를 인용해 온 것이다.이걸 우선 그렇게 이해를 해 주시구요.
[於 ](어)
‘ 어조사 어’
늘어 그러는데 어조사於 ,어조사于, 어조사乎 세글자가 같은 성격으로 쓰입니다.
강원에서 그 외에 이 세글자 외에 형용사가 형용사가 놓이면 형용사가 있으면 가령 크다,
작다 던지 검다 붉다 던지 많다 적다든지, 심하다 의 전부 형용하는 어떤 성질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형용하는 형용사가 형용사거든요 놓일 때는 비교급을 만든다. 따라서 ~보다 크다든지, ~보다 붉다든지, ~보다 작다든지, 또 ~보다 심하다, 이렇게 이렇게 비교를 해야 됩니다
재물의 화는 (아까 말씀드린대로 ) 또 수도하는 비구나 사미가 여자를 가까이 할 것 같으면 자기의 혜명을 끊으니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독사보다 더무서운 것이다.
그러니 이를 여간하지 않으면 안된다.
저 짝에 霜葉이 紅於二月花라 했는데 상엽은 붉게 든 단풍잎을 말합니다. 이제 홍어 이월화 그랬죠.
그러면 이월에 이월달에 피는, 저 이월은 음력 이월을 가리킵니다.
음력 2월달에 피는 붉은 꽃보다도 가을에 단풍든 잎이 더 붉다.참고로 해주시구요.
여하튼 재물도 멀리해야 되고 사미나 비구는 여자를 멀리해야 되고 사미니나 비구니는 남자를 멀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더 심하니
[省己知非하야](성기지비)
그 기는 자신입니다. 자신, 자신을 살펴서 그 성은 반성의 성 그렇게 아시면 됩니다. 비자는 ‘그를 비’字도 되고 ‘어긋날 비’字도 되고요.
‘그를 비’ 해도 되고 ‘어긋날 비’ 어긋났다. 잘못된 것을 말합니다.
곧 자기 자신을 반성해 가지고 잘못된 걸 알아서,
[常須](상수)
앞에도 나왔죠. ‘상’字는 항상 반드시 멀리 여의어야 된다 그러니까
재물에 눈이 어두워도 안되고 여자에 눈이 어두워도 안되는 것이다.
여 행자님들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도 안되고 남자에 눈이 어두우면 자기 일생을 망치게 되고 그것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니까 여간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수도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재물과 여자에 대한 말씀이지요.
이것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사미율의 강의를 할 때 또 자세히 말씀을 할 겁니다.
그 다음에 같이 생활을 하는데 여러 가지 주의해야 할 내용이 나옵니다.
혼자 살지 않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같이 공동생활을 하는데 주의해야 될 여러 가지 상황입니다.
[無緣事](무연사)
하면 ‘만약 약(若)’字는 생략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만약 若’字. 만약 하는 것은 가정을 나타내는 것이지요.만약 내일 비가 온다면 어떻게 합시다.
‘만약약’자 하고 그 다음에 곧 즉자 이게 호응이 되면 가정을 나타내는데 여기에 때에 따라서는 앞에 나오는 약자를 생략하고 뒤에 ~한다면 하는 則자만 나와 가지고 가정을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문장 관계를 볼 것 같으면 약자가 있어야 될 걸 생략을 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가정법으로 해석을 했지요. 만약에 연사는 연은 중요하다. 또 이유 긴요하다 그렇게 세가지로 해석하면 되겠습니다.그러면 연사는 중요한 일이 되죠 그 다음에 긴요한 일이 되죠
이유 있는 일, 위에 無자가 나오니까 곧 이유 있는 일이 없으면, 중요한 일이 아니면 또 긴요한 일이 아니면 중요나 긴요나 같겠읍니다만은 그 연 字를 급박하다 급하다
이렇게 해석을 해도 되겠습니다 쉽게 정리를 해서 말씀드리면 이유없이 하거나 아니면 중요한 일이 아니거든 無자는 아닐 비자로 해석을 해도 되지요 그대로 또 없다 이렇게 해석을 해도 되죠
[不得入他房院하며](부득입 타방원)
방원은 원래 방은 조그마한 방을 가리키고, 원은 담장이 둘러 쳐져 있는 독립된 건물을 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보통 절을 사원 그러죠. 사원 그러는데 보통 담장을 쳐 놓았기 때문에 院자를 씁니다.
여기서는 방원 그러니까 방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不得은 하면 안된다고 그랬지요.
다른 사람의 방에 들어가지 말고,일없이 중요한일이 아닌데 남의 방에 들어가지 말아라.
(왜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이 싫어 하니까, 방해가 되니까.
중요한 일이 아니거든 다른 사람의 방에 들어 가지 말며
[當屛處하야 不得强知他事하며](당병처하야 부득강지타사하며)
병처는 잘 안보이는데 우리 말로 하면 으슥한데 또 비밀스러운 곳 그것을 병처라 한다.
곧 가리워진 장소 이런 뜻이니까요 ‘당할당’자는 만난다는 뜻입니다.
부득강지타사하며 강자는 억지로 다른 사람의 일, 타사는 타인의 일 그말 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을 억지로 알려고 하지를 말고, 남이 두사람이거나 세사람이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데 억지로 알려고 그러면 그분들한테 실례가 된단 말이지요.
또 우리는 수도인이 다른 사람의 일을 억지로 구태여 알아가지고 무엇하겠느냐 이 말이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일을 억지로 알려고,구태여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 강지는 구태여 해도 되고 억지로 해도 되고, 다른 사람 일에 너무 그렇게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사실 그렇잖아요. 내 일 하기도 바쁜데 내 수도하기도 바쁜데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하든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일을 그렇게 너무 신경 써서는 안되는 일이다.
[非六日이면](비육일)
육일 그러니까 한달에 육일,십육일,이십육일 세번으로 보통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육재일을 가리킵니다.
‘8일,14일,15일,23일, 29일, 30일’ 그렇게 한 달에 여섯 날. (6일)을 육일이라 이렇게 해석을 해야지.
6자가 든날 6. 16. 26일 그렇게 보면 잘못된 겁니다.
‘8일, 14일, 15일’ 그러면 이건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가 되죠 그 다음에 ‘23일, 29일, 30일’ 그럼 그것은 이제 후반기가 되죠.한달로 볼 때 그렇게 6일 동안을 육재일이라고 하는데 6재일의 6일로
봐야 제대로 된 해석입니다. 그러면 인도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인간은 능력이 보잘것 없는 것이다.
인간보다 더 능력이 있는 것이 하늘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생활하는데 잘잘못을 항상 하늘 사람들이 살펴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주거나 잘못을 하는사람에게는 벌을 준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 그 6일 동안에는 하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는가 하는 것을 살핀다고 합니다. 해서 부처님 가르침이나
성인 가르침에 맞도록 생활을 하면 복을 주고, 만일 부처님 가르침이나 성인 가르침대로 생활하지 않으면 재앙을 준다 그래요. 그런데 재라는 것이 몸조심한다는게 ‘재’입니다. 재의 본뜻이 거기에다가 그날 곤충을 위해서 특별히 제도를 한다 그럽니다.그러면 우리가 세탁을 할 때,
요즈음은 이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DDT 나오고 난 다음에 이라는 것이 거의 없어졌다고 해요.
6,25 때는 이가 많아 가지고 양지 바른 곳에서 이 잡는 광경을 종종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탁을 하게 되면, 삶게 되거나 또 뜨거운 물로 하게 되면, 이가 죽게 되니까, 죄를 짓게 되죠.
그러니 그날 만일 세탁을 다할 것 같으면 이 6재일 에는 특별히 곤충을 제도하기 때문에 죄가 안된다.
그래서 인제 세탁을 하지 말아라.
[不得洗浣內衣](부득세완내의)
내의를 세탁하지 말아라.
요즈음엔 지켜지지 않는데, 사실은요. 사시공양, 그걸 재라고 그러죠
정오를 지나지 않는 시간안에, 정해진 시간 안에 공양하는 것을 재라고 했는데 사시 공양하기 전에는 일체 빨래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이 되어 있어요 요즈음에는 그게 지켜지지 않는데 참고로 알아 두시고요.
여기에서는 6일. 6일에 세탁을 하라.
요즈음에는 내의도 많을 뿐더러 땀이 많이 나고 하니까 수시로 세탁을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곤충을 위해서 또 이 보조스님이 살아 계실때요, 무신들이 곧 군인들이 고려 왕실을 좌지우지
할 때 입니다.
임금은 그냥 이름만 임금이라고 그렇게 해 놓고 모든 권력을 무신들, 곧 군인들이 장악하고 있을 땝니다.
불행하게도 최씨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 입니다. 또 몽고 군인들이 쳐내려 와 가지고 안팎으로 굉장히 어려울 때였으니까 자연히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을 때지요. 단, 보조스님이 이것을 48세에 썼는데 책의 뒤에도 나옵니다만은 특별히 최씨 무신 정권에서, 수선사만은 특별히 보호를 해서 경제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데 나 하나만 편안하자 그렇게 할 수 없잖아요. 우리가 다섯 손가락 가운데 어느 손가락 하나만 다쳐도 온 손이 다 아프 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상당히 어려울 때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어려우니까 이렇게 세탁을 자주하지 말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 뜻으로 이런 말씀을 했고, 또 그것을 보조스님이 마음대로 쓴 것이 아니고 경전의 6일, 6재일에는 보살들이 곤충을 제도하는 날이다. 그래서 6일날에 세탁을 하도록 하시오
6일이 아니면, 만약 6일이 아니면 내의를 세완, 완이나 탁이나 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탁하지 말고
[臨盥漱하야](임관수 하야)
관은 세수하는 것이고, 수는 양치질하는 것입니다.
세수하고 양치질 할 때, 임은 앞에 나오는 당병처의 당하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세수하거나, 양치질 할 때에는
[不得高聲涕唾하며](부득고승체타 하며)
체는 자전에는 보통 ‘눈물 체’자로 나오는데 그건 요즈음 해석이고 ‘코풀체’자로 해석해야 됩니다.
코풀체라 비액이라, 비액왈, 그러니까 콧물을 체라 한다. 그랬거든요.
코푸는 것은 체고,타는 침타가 아니고 침, 가침, 그것도 그냥 침이 아니고‘가래침 뱉을 타, 그렇게 해석을 해야 맞습니다. 그러니까 코를 풀거나 가래침을 뱉거나 하면 안된다.
그것도 어떤 일인가 높은 소리로 코를 풀거나 가래침을 뱉지 말며, 부득은 위에 나온 것하고 마찬가지죠